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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감시센터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 국민이 감시합니다

  • 칼럼
  • 2003.12.30
  • 509
한해의 마지막이니 횡설수설 좀 하겠다. 2003년은 내게 깨달음 하나 던져줬다.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다. 이 대목에서 피식 웃는 40대들이 많을 줄 안다. 보아하니 30대 초반 같은데, 벌써 나이 타령이냐고 타박하고 싶은 것도 안다.

그런 눈총조차 별 상관않는 것까지가 이 깨달음이 남기고 간 뱃심이다. 뱃심은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의 무기다. 나는 올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버렸다. 그걸 버리고 나니 남은 게 별로 없다.

나이를 먹는 건 오히려, 삶의 고단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2003년은 그걸 ‘비감’한 해였다. 내년에는 고단한 일상이 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것은 매해의 끝마다 나를 배신했다. 예전에는 그게 나이를 덜 먹었기 때문인지 알았다. 여유와 여백과 윤택을 누리기엔 아직 충분치 않은 나이라 그런줄 알았다.

이제서야 알겠다. 그런 순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나 온다. 그래서 그런 기대가 충족되는 건 종종 그렇지 않은 것만 못하다.

깨달음도 없이 번뇌만 쌓이는 것. 어제의 번뇌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오늘의 번뇌가 그것을 덮을 뿐이다. 더 황당한 노릇은 잠잠했던 과거의 번뇌까지도 어느날 갑자기 삼킬 듯 달려들곤 한다는 거다. 그게 나이 먹는 거다.

염세주의라 욕하지 말지어니, 새삼스레 별볼 일 없는 어느 30대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게 아니다.

여의도에서 기자 명함을 돌리며 이 짓을 하고 돌아다닌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닮은 한국정치를 보았다. 정치를 손가락질하고 침뱉고 욕하는 많은 필부들도 아마 그걸 알고 있을 게다. 사실은 정치권의 꼬락서니가 각자 사는 모습하고 비슷하다는 것 말이다. 해가 갈수록 늘어가는 건 근심이고, 줄지 않는 건 구태다.

니코틴과 알코올과 지방과 숙변이 뱃살에 꾸역꾸역 주름으로 잡히듯, 친일과 유신과 5공과 6공과 상도동과 동교동은 사라지지 않고 그냥 차곡차곡 쌓인다. 켜켜이 쌓인 어제의 번뇌도 벅찬데, 오늘은 갑자기 ‘사이비 386’ 들이 등장해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이제는 대통령까지도 가끔씩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혼란을 준다. 민노당이 남았다는데 두고 보긴 하겠다.

그러나 두고볼 때 보더라도, 2004년 정치가 올해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라. 지난해의 기대가 올해에 배신당했던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의 길이다. 어떤 모양으로 살건 나이와 함께 고단함도 늘어만 간다는 걸 깨달았다면, 최선의 방법은 기대를 접는 거다. 희망을 포기하는 거다. 삶과 정치는 언제나 기대보다 초라하다.

이제 나는 ‘여유와 윤택’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 얄팍한 기대따윈 안녕, 허망한 소망따윈 영원히 안녕.

대신 어느새 목밑까지 차오른 번뇌와 고단함을 ‘해석’하기로 했다. 그걸 외면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용은 결국 이해다.

너 왜 거기 있니? 거기서 뭐하니? 해가 바뀌면 번뇌 덩어리들에게 그렇게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와 함께 늘어가는 고단함은 피해나갈 수 있는 대상이 애시당초 아니었으니, 그것들을 끌어안는 수밖에. 그렇게 신음하는 수밖에. 그런게 원래 삶이었다면, ‘내일’의 약속이 없어도 ‘오늘’을 그대로 수긍하는 수밖에.

대신 철저히, 밑바닥까지 철저히 이해해야 할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끌어안을 수 없으니. 내일의 새로운 고뇌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 고뇌까지도 오늘의 고뇌 위에 포개놓을 수 없을테니.

오늘 나는 2004년 한국정치에 대해 기대를 접는다. 아직은 이르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염려치 말라고 일러주고 싶다. 어제의 구태를 오늘 끊지 못한다고 내일 좌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등장을 통해 발전해왔다. 어제의 모순을 모두 풀어야 오늘의 모순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친일을 다 풀어야 유신이 오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것들은 지겹도록 자꾸 오는 거다. 박정희 다음에도 전두환은 오고, 전두환 다음에도 노태우는 왔다.

김영삼에 환호한 사람도 있었고, 김대중에 환호한 사람도 있었고, 노무현에 환호하는 사람도 아직 있다. 그러니 지겹도록 과거의 그늘과 맞선다고 해서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에 좌절하는 사람은 기대와 희망이 너무 거대하거나, 삶을 아직 잘 모르는 경우다. 아직 세월가는 이치를 모르는 경우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힘들게 하는 이 번뇌 덩어리의 정체를 정확히 보는 거다. 끌어안는 거다. 거기까지가 삶과 세상이 우리에게 짐지운 숙명이라 여긴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역사에서 인물은 단지 시대정신의 ‘현현(顯現)’일 뿐이었다.

후대에게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번뇌로부터 해방된 행복한 삶이 아니라, ‘저 나름의’ 번뇌를 제대로 겪을 수 있는 기회다. 박정희를 철저히 고민한 사람이 있었으니, 선배들은 전두환을 겪었고, 나는 오늘 노무현을 부여잡고 있다. 번뇌덩어리, 노무현. 내 딸에게는 결코 그를 물려주지 않겠다! 그러나 그를 끝내 밀쳐내지 않겠다. 칼을 들이대듯 내 목에 그를 들이밀고, 그가 상징하는 이 시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이해하겠다. 하여 2003년을 닮았을 2004년이여 어서 와라. 우리는 각오했다!
안수찬 한겨레신문 기자 (ah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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