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12-02-29   2781

[칼럼] 의회의 강화가 민주주의 강화다

의회의 강화가 민주주의 강화다

 

홍재우 인제대 교수,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정치를 평생 연구의 주제로 삼고, 대학에서 정치를 가르치면서 살고, 가끔 이렇게 정치에 관한 칼럼이나 에세이 등을 쓰지만,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늘 쉽지 않다. 정치학도 학문이니만큼 전문성이라는 것이 있고 내부 분화도 다른 학문처럼 매우 다양하게 되어 있어서 정치학자들도 전공하지 않은 정치학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매우 신중하고 확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에서 정치는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로 대접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얼마간 비관적 전문가들이다. 정치학자라는 이유로 (심지어 초면에도) 사람들은 내가 물리학자나 화학자였다면 받지 않았을 내 전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정치란 구제불능인 게 틀림없고 그래서 나 같은 전문가(정치학자)도 별 수 없다는 고백을 받아내려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질문은 대개 “이번 선거에 누가 당선되느냐”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드물게 답변을 해도 곧 불신의 표정이나 허술하지만 피곤한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누구나 비판하고 심지어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이지만 정치의 필요성, 역할, 본질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치가 ‘필요악’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수많은 부정적 어휘와 연결된다. 부패, 거짓말, 탐욕, 이기심, 비리, 싸움을 비롯해서 가치중립적인 권력과 권위 같은 단어도 정치와 연관되어 부정적인 뜻을 갖곤 한다. 정치인은 가장 믿을 수 없고 자기 교활하며 가장 부패한 직종으로 흔히 꼽힌다. 그러나 정치가 원래 그런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 정치는 유자(儒者)와 사대부(士大夫)가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며 출사(出仕)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유학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하나의 실천이었다. 정치의 실제에 대한 비난과 실망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았지만 정치의 의미와 존재 자치에 대한 적대는 상당히 근대적 발명품(!)이자 현상이다. 즉, 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이 그 어느 시대보다 분산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소위 반정치(反政治·anti-politics)로 표현되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은 권력의 분산과 인민의 관심을 싫어하는 엘리트와 기득권층이 쉽게 취하는 전략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반정치의 여론이 많은 보수 언론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반정치적 인식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은 국회의원과 국회에 대한 것이다. 최근 모 언론은 국회의원이 200여개의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고 그 목록은 SNS을 통해 널리 유포·회자되었다. 일부 사회 통념상 지나친 것도 있지만 그 특권이라는 데는 여섯 명의 보좌진 고용이나 의원회관에 사무실을 준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 뿐 아니라 회기 중 불체포 특권 같은 국민의 대표로서 (행)정부를 감시하는데 필수적인 권한까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어떤 항목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 하지는 않겠다. 다만 국회에 대한 비난이 국회의 역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그 불만과 비난이 결국 의회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국회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여론은 입법부에 쓰는 돈은 낭비성 예산이라고 보는 반면 (행)정부가 좌우하는 예산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하다. 정부가 입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예산을 쓰고 실제 더 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감독·감시해야 하는 입법부의 능력과 권한은 자꾸 깎아 내리려고 한다. 국회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운전기사까지 포함한 여섯 명의 보좌관으로 정부의 관료조직에 맞서야 하는 각 의원실이 얼마나 중과부족인지 알 것이다. 정부의 고위 직업관료들은 실제 권력이 자신들의 손에 있지 국회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국정감사 때 머리를 숙이고 많은 관료들이 국회 안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지만 그들은 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당해낼 전문성, 시간, 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법안과 정책의 상당수는 충분한 검토를 받지 못하고 국민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 정부 관료들의 의도대로 통과된다. 삼권분립이 미약하여 여당이 대통령에 지배당하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법부가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인원, 예산 등 물리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내 권력이 있는 의원들 보다는, 몇몇 일 잘하는 의원들이 이런 어려움을 더 겪는다. 입법 활동을 돕는 입법조사처와 국회사무처 등이 있지만 정부 조직에 비하면 아직 규모도 작고 야당의 경우에는 이런 도움을 활용하기에는 유형무형의 어려움이 많다.

 

국회의원이 관료들보다 더 많이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그나마 국민의 직접적 통제 하에 있고 책임의 추궁의 대상으로 명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국회의원은 어떤 공직보다 제도적 제한을 많이 받는다. 사회적인 그 어떤 엘리트들보다 감시의 눈길을 받고, 4년에 한 번 검증을 받음은 물론 심지어 낙선 뒤에도 다음 선거를 염두에 둔다면 상당한 자기 통제의 노력을 수반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회가 대접하는 검사, 판사, 교수, 기업가 그 어떤 직종보다 민주주의를 강력한 원칙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내면화 했다. 이런 평가가 사회적 통념과 다르더라도 할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나는 의원들 개개인이 알고 보면 괜찮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따위의 편들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의원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과는 별도로 헌법기관이자 국민의 대표들인 그들의 힘을 제도적으로 약화시키는 시도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의원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과 의원들이 제 일을 제대로 하게끔 유무형의 자원을 보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결부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정치학자들이 주장하지만 공론화하지 못하고 정치인들도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것 문제 중 하나가 의원정수의 확대이다. 정치학에서는 한 국가의 국회의원의 수는 전체 국민의 세제곱근이 적당하다고 본다. 이를 적용하면 18대 총선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약 368~369석이고, 유권자의 세제곱근으로 제한해서 봐도 335~336석 정도 된다. 현재보다 36석에서 70석 정도 늘어난 숫자가 우리나라에 적절한 의회 규모라 할 수 있다. 의석수의 확대는 행정부와 맞서는 입법부의 역량을 물리적으로 확대하는데 가장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의석수의 유지는 필수적이다. 이론과는 별도로 의석수가 늘어나야 하는 가장 현실적 이유는 비례대표제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비례대표제를 늘리는 방법은 의석수의 확대 밖에는 없다. 지금처럼 299석을 넘지 않는다면 지난 몇 번의 선거법 협상에서 보았듯이 선거구획정의 거래를 통해 비례의석은 계속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의석 정수 확대는 독일식 혼합선거제를 포함한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매우 현실적인 타협안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를 확대하자는 시민사회나 독일식에 집착하는 진보정당들도 이 제안이 매우 현실적 타협안이라는 사실을 끝내 외면한다.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민심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공론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론은 최근 일본이 의석수 감소를 고려하는 것을 예로 들며 의석수가 더 줄어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지지한다. 가장 즉각적인 이유는 싸움만 하는 국회의원에게 내 세금을 쓰기 싫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싸우는지에 관심을 갖거나 방법이 어찌되었건 싸우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론이 원하는 바대로 만약 의석수가 줄어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행정부가 입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기는 더 쉬울 것이다. 동시에 좋든 싫든 의원 개개인의 권위는 더 커질 것이다. 노동자, 소수, 약자의 대표가 원내에 진출할 가능성은 더 줄어들며 그러면 삼성과 같은 사회적 강자가 의회를 장악하기는 더 쉬워진다. 우리는 한진중공업에, 쌍용자동차에, 용산재개발 현장, 4대강 사업장에 나타나서 정치적 개입을 일삼는 더 많은 입법기관(의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필요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진보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도 이런 역설적 반정치, 반입법부 성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개인적으로 학계와 시민운동 사이에서 의석수 확대에 대한 논의를 할 때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의원 수를 확대해도 의원 보좌관 수를 줄여 추가되는 예산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의원직은 정말 허울 좋은 명예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일 수록 현재 국회의원보다 자신이 더 잘할 것이라고 믿는 시기심과 당선되고자 하는 권력 욕구가 많다.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발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우수하고 뛰어난 의원들도 많다. 물론 일반적인 인식처럼 저질에,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혹은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의원들도 상당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민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권위를 즐기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어떤 대책을 가져야 할 것인가? 대의기관을 철폐하고 직접민주주의나 심의민주주의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형태의 혁명을 한다해도 대표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힘들다. 현대국가의 거대하고 복잡한 관료제는 시민의 직접 참여는 물론 대의제의 본질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따라서 마땅치 않아도 현실적 대안은 의회를 최대한 강화하는 것이다. (비례제) 의석수도 늘리고 의원 보좌기능과 입법 및 대 정부감시 전문성 강화를 위한 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 의회의 힘을 키우는 일과 의회에 대한 국민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일어나야 하고 연관되어 있다. 결국 어떤 대표를 뽑을 것인가는 국민의 선택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부여하는 대신 국민은 더 많이 참여하고 더 많이 간섭하고 무엇보다 국민의 뜻을 아는 자들을 의회로 더 많이 보내야 한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한다.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는 공동체의 결정 과정이 정치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가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원초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과정의 방법, 양상, 수준은 모두 사회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이익, 관습과 제도, 갈등과 투쟁, 타협과 계약의 내용과 방법을 그대로 반영한다. 특히 대의제 정치는 자칫 한 사회의 가장 노골적이고 추한 욕망의 양상을 본받아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을 방지하고 치유하기 위해 대의제를, 민주주의를, 정치를 약화시키는 악수를 둘 수는 없다. 더 강한 의회, 더 강한 민주주의, 더 강한 인민의 정치를 만드는 길을 고민해야 한다.

 

 

홍재우 인제대 교수,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이 글은 2월 21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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