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09-01   1082

<안수찬의 여의도 파일> 대구 이야기

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 ahn@hani.co.kr

고향을 아끼지 않는 사람 없겠지만, 나고 자란 곳에 대한 내 심정은 애정보다는 ‘애증’에 가깝다.

지금도 대구 동성로와 경북대 계명대 앞, 대구 YMCA 뒷골목 등을 떠올리면 가슴부터 아프다. 곳곳에 애잔한 추억이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는 몸서리치며 밀어내고 싶다. 대부분 이 지역의 정치적 보수성과 잇닿아 있는 기억들이다.

이른바 ‘참교육 세대’였던 나는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대학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은밀한 낙으로 삼았다. 그때는 ‘국민대회’라 해서 전노협·전교조·전농·전대협이 각각의 깃발을 들고 연합집회를 여는 게 보통이었다.

전경의 장벽을 뚫고 대학 담벽을 넘어 힘들게 집회장소를 찾아 들어가면, 곧이어 경찰이 학교 안으로 ‘침탈’해왔다. 두어시간 동안 대학 안팎에서 짱돌과 화염병으로 ‘교투’를 벌이다, 대학생 형·누나들의 뒤를 따라 시내로 가서 이번엔 ‘가투’를 했다.

나는 그 거리집회가 언제나 두려웠다. 대학과는 달리, 그곳엔 온통 적대적 시선뿐이었다. 전경은 물론 시내버스의 승객들까지 우리한테 욕을 퍼부었다. 경찰에 쫓겨간 어느 시장통에서 우리를 막아선(숨겨준게 아니라!) 한 노점 아주머니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너거뜰이 뭘 안다꼬 지랄이고 지랄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너거때문에 우리가 죽고 몬살겠구마”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있던 나는 그 말에 거의 울 뻔했는데, 곁에 있던 내 친구가 냉큼 아주머니를 밀치며 외쳤다. “좋은 세상 오믄, 그때 공부할끼구만” 그 친구 덕에 나는 전경에게 붙잡히지 않았고, 좋은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지 그 친구는 줄곧 공부는 않고 기름밥만 먹고 있다.

3년전인가, 뜨거운 여름날 그 시내를 다시 찾았다. 예의 폭염이 거리를 녹이고 있는데, 동성로 한켠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어느 냉면집 앞이다. 맛이 꽤 괜찮은가 보다 하고 간판을 봤더니, 식당이름이 ‘박통 냉면’이다. 설마 했는데 진짜 그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간판 밑에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지던 해, 무슨 국정연설인가에서 박통이 했다는 내 조국 어쩌고 하는 말이 플랭카드에 적혀 있었다. 체인점도 있는 눈치였다.

내 다리는 다시 힘이 풀려버렸다. 이런 식당이 서울에 있었으면 여러 번 수난을 겪다 일찌감치 문닫았을 터인데, 이 동네에선 불티나게 장사가 되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를 거쳐 정권교체까지 이뤄진 당시에, 그 풍경은 차라리 을씨년스러웠다. 더운 여름날,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술자리에 끼여 혹시라도 고향 이야기를 할라치면, 내가 가장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동양의 모스크바’. 일제 이후 해방 정국까지, 혁명적 지식분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어 붙였다는 그 별칭으로 대구를 소개한다. 그리고 한국전쟁때 엄청난 학살로 그 씨앗이 모조리 압살당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 지역지배의 공고화만으로도 부의 축적이 가능했던 호남과 달리, 산출이 변변치 않은 영남 특히 경북의 특성상 중앙권력에 대한 지식계급의 애착이 남다르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권력지향성에서 개혁적 씨앗을 없애버리니, 남은 것은 권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뿐이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그래도 뒷맛이 개운찮은 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유신정권 출범의 ‘파시즘적 열기’의 시침에 멈춰있는 대구에서 지난 30년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적어도 지하철 참사 같은 대형 사고를 제외하면, 대구는 더이상 종합일간지에 뉴스를 제공하는 도시가 아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지난 한주일 동안, 그 대구가 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북한 선수단이나 응원단이 불과 10여일 머물고 간 것만으로 그 지역의 공고했던 정치·사회적 토양이 바뀔 것이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애써 긍정적인 측면만 들추어내고, 가능하면 호의적으로 해석하려 하는 나에게도, 북한 응원단이 김대중-김정일 플래카드를 뜯어낸 일은 참 황당하고 당혹스럽다.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른바 여성 응원단의 존재도 참 불쾌하다. 그들을 집중 조명하는 언론의 상업성도 문제겠지만, 그런 응원단을 내려보내는 북한 위정자들의 발상이 참 한심스럽다.

그런 일들이 더욱 도드라져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반감이 깊어지고, ‘색깔론’에 익숙한 보수문법에 따라 이땅의 개혁세력을 그들과 한묶음 해버리는 발상이 강화될 여지도 있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 북한 선수단·응원단의 대구 방문으로부터 ‘대구의 해빙’을 곧바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한겨레>도 그 중에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대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따라서 대구 시민들을 북한 응원단과 대당·대비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대구시민이 극우가 아니고, 북한 응원단이 극좌는 아니지만, 그 양자에 내포돼 있는 극단적 지향이 오히려 상호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높다. 그런 식으로는 30년을 버텨온 대구의 진정한 해빙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이해하는 대구 정서의 핵심은 ‘주인공 컴플렉스’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주인공 노릇을 했다는 (허구적) 자부심이 문민정부 이후 배반당했다는 분노와 상실감이다. 이 자부심과 배반감이 허구적인 이유는 실제 정권을 쥐고 온갖 독점적 이익을 취했던 이들은 대구 시민 일반이 아니라 대구 출신으로 서울에서 잘나갔던 소수 기득권자였기 때문이다. 지역 경제가 파탄에 이른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 때문이 아니라, 전두환과 노태우가 제 잇속 챙기는 데만 신경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사람들은 그런 지배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익숙해 져버렸다. 부산 사람들이 ‘부마 항쟁’을 이야기할 때, 대구 사람들은 “우리는 마, 데모같은 거 안한다”며 잘라 말한다. 실력을 길러 높은 자리에 가서 힘을 발휘한다는 게, 이들의 기본 철학이다. 이른바 입신양명이 지상과제다.

그러나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이미 광범위한 사회적 실체로 자리잡은 이상, 그것이 허구라고 돌팔매질 하기보다는 이 컴플렉스를 현명하게 극복시켜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봤다. “광주는 비엔날레도 하고, 부산은 영화제도 하는데, 대구는 뭐가 있노.” 지난 30년간 대구보다 더한 소외를 겪었던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듣기엔 영낙없는 투정으로 들리지만, 이런 상실감이 정치적·사회적 정체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회는 지역출신 권력자의 안정적 표밭으로 인지되는 일 말고도, 대구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관련해 주목받고 기여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증명해줬다. 적어도 97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군사정권 시절과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대한민국 전체와 대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북한 선수단·응원단은 그 촉매제 역할을 해줬다. 그들의 존재는 그만한 의미다.

이런 실험을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도 이뤄야 한다.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말할 때, 광주와 부산을 주목하는 것과 비슷한 비중으로 대구를 주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알고 있는 정치문법이라곤, 지역 출신의 정치인을 권력자로 앉히기 위해 ‘확실하게’ 밀어주는 것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치문법을 경험시켜야 한다.

대구의 변화가 곧 전국의 변화로 읽힐 수 있음을 절감할 때, 지난 30년간 데모 한번 변변히 못했던 대구 시민들도 새로운 정치적 역동성에 눈을 뜰 수 있다. 그들이 퇴락한 노장이 아니라 여전히 중요한 ‘주인공’임을 일깨워 주는 게, 권력에 대한 향수에 묻혀 끝없이 수구의 나락으로 빨려들어가는 대구를 오늘에 불러앉혀 생기를 불어넣을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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