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정당(법) 2003-12-02   939

<안수찬의 여의도파일> 최병렬 대표의 단식

고등학교 시절,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다.

89년 겨울, 재가 수행자단체의 수행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예불, 공양, 그리고 참선, 운력. 점심공양, 108배, 참선, 저녁예불과 공양, 108배, 그리고 참선. 그런 식이었다.

그때 나는 묵언수행을 자청했다. 20여명의 일행중에 나는 유일한 고등학생이었고 또한 유일한 묵언수행자였다. 어린 불자를 기특해 하는 주변의 시선이 싫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용맹정진했다. 그 일주일동안 나는 예불과 독경시간을 포함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화엄사 대웅전에서 3천배를 했다. 할머니들은 2박3일씩 걸린다는 그 3천배를 나는 딱 12시간만에 마쳤다. 해질 무렵에 대웅전에 들어가, 화장실도 안가고 동틀녘에 나왔다.

퉁퉁 부은 허벅지를 손으로 끌며 당기며 차가운 법당마루를 엉금엉금 기어나오는데, 멀리 지리산 끝자락에서 동이 텄다. 들어갈 때 메말랐던 절 마당에 밤새 거짓말처럼 소복히 눈이 내렸다. 아직 누구도 발길을 남기지 않은 백색산사가 아침해를 받아 빛났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눈물이 흐르는데, 깨달음이란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스님이 내 팔뚝에 향을 올리고 수계식을 했다. 스님은 우담이라는 법명을 주셨다. 정법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우담발화가 핀다. 너도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꽃이 되라 하셨다. 입안에서 울리는 그 이름과 뜻이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나는 끝내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지리산을 내려오는 길에 한 스님과 마주쳤다. 동행한 처사님이 토굴에서 1년을 면벽 참선한 스님이라고 귀엣말을 했다. 합장하고 돌아서는데 그 스님의 눈빛이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평온한 얼굴 가운데 유독 그 눈빛만큼은 한사코 나를 삼키려 달려드는 것 같았다.

불교도 잊고 수행도 잊고 깨달음의 언저리에 다가간 것 같은 느낌마저 잃었지만, 요즘 나는 자꾸만 그 때 생각이 난다. 꿈이라면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공들여 나 자신을 비우는 느낌. 청정해진 나를 온 세상에 번지게 할 수있을 것 같은 느낌. 그게 그립나 보다.

처음 최병렬 대표의 단식이 시작됐을 때, 나는 헛방귀 냄새를 맡았다. 모두가 알 듯이 단식이란 약자의 마지막 수단이다. 더 이상 무엇에 호소하거나 동원하거나 기댈 곳이 없을 때,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바치는 일이다. 최 대표가 정치적 사회적 약자라고 믿을 사람, 누구인가.

그 스스로 말한대로,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는 행정부보다 더 강력한 권위와 권능을 갖고 있고, 그런 국회를 절대적으로 장악한 한나라당에서 그는 최고책임자이자 지휘자다. 법·제도적으로 대통령의 거부권 따위 간단히 뭉갤 수 있는 길이 열려있고, 필요하다면 예의 그 정치력을 발휘해 얼마든지 재의결 할 수 있다.

재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것 같아 동원한 수단이었다면, 그것 참 째째한 일이다. 천하의 최병렬이 모기잡는 데 칼을 꺼내들다니. 최 대표가 나서서 김종필 총재만 만났어도 손쉽게 해결 할 수 있었다. 잔뜩 배에 힘을 주더니 피시식, 헛웃음만 웃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나는 최 대표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향기를 맡았다. 단식은 그러니까 특검 재의결 정도가 아니라 정치판 전체를 겨냥한 액션이었다. 여론을 반 노무현쪽에 세우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야3당의 공조를 더욱 튼튼히 해, 노 대 통령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비장의 카드였다.

에스케이 비자금 정국이 한나라당의 기반을 흔들자, 아예 대반전을 시도해 역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지지도의 하락과 국정 혼란을 재신임 투표 하나로 정면돌파하려는 노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이 최 대표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그 모토만큼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닮았는지.

사흘, 나흘 지나자 그에게서 퀘퀘한 냄새가 났다. 단식을 하면 몸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면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어느 당직자가 귀띔해줬다. 그러나 그 냄새는 최 대표의 몸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는 것 같았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특검 재의결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재신임 국민투표 철회 가능성이 여권내에서 거론되자 한나라당은 국회 등원과 단식 중단의 수순에 들어갔다. 당직자들은 아예 “상황 끝났다”며 이를 기정 사실화했다. 단식에 들어간 최 대표의 얼굴은 근엄하고 비장한데, 그 바로 뒤에서 측근들은 실실 웃고 다녔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그 냄새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최 대표는 정치 하수의 셈법으로 정치 고단수의 수법을 동원했다. 김영삼과김대중 전 대통령의 단식을 거기에 비교하는 건, 그래서 온당치 않다. 적어도 그 때 그들은 들판에 있었다.

닷새, 엿새가 지나자 최 대표는 피냄새를 풍겼다. 기력이 쇠잔했지만 노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적의는 여전했다. 오히려 그 적의가 더욱 돋보였다. 제1당 지도자의 전투력은 단식과 더불어 더욱 강건해지는 듯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저 나이에 단식을 저렇게 하면 70이 돼서 골병이 든다”는 말을 남겼지만, 5, 6년 뒤의 일은 몰라도 앞으로 1년 동안은 골병이 아니라 홧병이 남지 않을까 걱정됐다. 홧병이 생기면 그 한풀이를 받아야 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내가 알기로 단식은 원래, 생명을 몸 안에 밀어넣느라 오장육부에 차곡차곡 쌓인 독기를 말끔히 청소하고, 섭생을 중단하는 것과 동시에 육신이 지은 업보를 함께 끊어내고, 내 안에 갇힌 나와 외롭게 철저하게 상대하는 수행의 한 방식이다.

나는 단식 수행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지만, 절식 수행의 흉내를 잠깐 내본 탓에 그 평화로움과 감미로운 맛을 안다. 그 때, 나의 적은 바로 나다. 나와 싸워 나를 얻는다. 싸움이 끝나면 내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주위의 모든 만물에게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진다.

단식하고 있는 최 대표의 적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몸을 비워가고 있는 중에도 괴롭고, 그걸 끝내고 난 다음에도 괴로울 것이다. 그에겐 평화 대신 적의가 남을 테고, 그 적의를 주변에 전파시키려 할 것이다. 아아, 나는 최 대표의 단식이 너무도 끔찍하다. 지금도 어느 산 골 깊은 토굴을 파고 면벽참선하고 있을 어떤 스님들에게 최 대표의 단식은 수치다. 그의 단식은 자신을 깎아내는 수행이 아니라 상대를 타격하는 선동이다. 그나마도 약자의 호소가 아니라 최강자의 강압이다.

자꾸만 눈 쌓인 지리산 화엄사가 생각난다. 거기에 들어가 내 귀와 눈을 씻고 한나라당의 정치에 대한 혐오를 끊어내고, 내 안의 평정과 평화를 되찾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안수찬 한겨레신문 기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