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12-10-25   2359

[칼럼] 법의 품격

“이제야 법정이 학술세미나와 구분될 수 있다!”

박경신 교수 < 검열자 일기>  2심 무죄판결에 대한 소고

 

홍성수 숙명여대 법과대학 교수

도대체 음란물을 왜 국가가 규제하는 걸까? 대법원 판례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먼저 음란의 개념이다.

“‘음란’이라 함은 사회통념상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 (대법원 2008.6.12. 선고 2007도3815 판결)

음란에 대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 일단 이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의 음란물이라면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기준에 대한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그 전체적인 내용을 관찰하여 건전한 사회통념에 따라 객관적이고 규범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구체적인 판단에 있어서는 사회통념상 일반 보통인의 정서를 그 판단의 규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이는 일정한 가치판단에 기초하여 정립할 수 있는 규범적인 개념이므로, ‘음란’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물론, 구체적인 표현물의 음란성 여부도 종국적으로는 법원이 이를 판단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법원 2008.6.12. 선고 2007도3815 판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사회평균인, 일반 보통인, 사회통념 등의 가치중립적인 척 하는 표현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법원이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객관적 사법판단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법철학적 논쟁을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상 생략하고 일단 그동안의 판례 몇 가지만 상기해보자. 법원은 마광수와 장정일의 소설, 김인규와 최경태의 미술작품을 ‘사회평균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법원이 말하는 ‘객관성’, ‘사회평균인’, ‘사회통념’이 불확실하고 자의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해 왔던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대법원 판례에서는 음란물을 형사법정에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음란성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형성·발전되어 온 사회 일반의 성적 도덕관념이나 윤리관념 및 문화적 사조와 직결되고 아울러 개인의 사생활이나 행복추구권 및 다양성과도 깊이 연관되는 문제로서 국가 형벌권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에 적절한 분야가 아니라는 점” (대법원 2008.6.12. 선고 2007도3815 판결)

“형사법이 도덕이나 윤리 문제에 함부로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특히 개인의 사생활 영역에 속하는 내밀한 성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로 제한함으로써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또는 행복추구권이 부당하게 제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대법원 2008.3.13. 선고 2006도3558 판결)

국가공권력을 동원해서 어떤 표현물을 규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법원 스스로도 이렇게 잘 인식하고 있기에, 법원은 비교적 상세한 음란물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단어, “음란한”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법원이 동원된 기준이 이렇게 자세하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음란표현물이라고 하기 위하여는 그 표현물이 단순히 성적인 흥미에 관련되어 저속하다거나 문란한 느낌을 준다는 정도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통념에 비추어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하등의 문학적·예술적·사상적·과학적·의학적·교육적 가치를 지니지 아니한 것으로서, 과도하고도 노골적인 방법에 의하여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묘사함으로써 존중·보호되어야 할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왜곡한다고 볼 정도로 평가되는 것을 뜻한다고 할 것이고, 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표현물 제작자의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그 전체적인 내용을 관찰하여 건전한 사회통념에 따라 객관적이고 규범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대법원 2008.6.12. 선고 2007도3815 판결)

자 어떠한가? 이 상세한 기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음란물’ 판정을 받을 수 있는 표현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배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하등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지 아니하여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그림을 일부러 그리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판단기준에 따라 박경신 교수가 올린 문제의 게시물을 한번 검토해 보자. ‘성기 사진’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그의 게시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발기된 남성 성기 사진 7장과 벌거벗은 남성 뒷모습 사진 1장이 담긴 블로그 (캡처) 화면 – (직접 봅시다!: http://blog.naver.com/kyungsinpark/110142661368)

② 정보통신 심의규정 제8조 (15줄 분량)

③ 심의가 적절했는지를 묻는 본인의 의견 (12줄 분량)

실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①의 성기 사진이었지만, 그는 성기 사진을 그냥 게시한것이 아니라, ②와 ③을 덧붙임으로써, 스스로 설정한 맥락에 위치시켰다. 그는 평소 방심위의 심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점을 이미 여러 지면과 블로그, 그리고 학술논문을 통해 항의한 바 있다. 문제의 게시물 역시 방심위 심의를 비평하는 블로그 시리즈물인 “검열자의 일기” 제4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방심위의 심의가 적절한지를 묻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하등의 가치’가 없다거나,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왜곡’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방심위 심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심의 대상물’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불가피했다. 심의대상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 ‘이것이 적절한 심의 맞나요?’라고 물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의외였다. (판결문: http://blog.naver.com/kyungsinpark/110143022128) 1심 재판부는 박 교수가 성기사진을 이렇게 ‘맥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란물이 맞다고 판단했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기는 성별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는 제1차 성징으로서, 노출될 경우 성적 수치심이나 성적 흥분을 야기할 가능성이 가장 큰 신체부위로 받아들여지는데,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게시물에는 발기된 남성 성기만을 부각하여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촬영한 사진들이 본문의 맨 앞 부분에 상당한 양을 차지하면서 게시되어 있고, 그 중에는 제목을 통해서까지 성적 흥분 상태를 암시하거나 공개된 장소에서 발기된 성기를 드러낸 것을 암시하는 맥락을 보이기도 하는 점, 피고인이 이 사건 게시물 말미에 관련 정보통신 심의규정과 함께 위 사진들을 음란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는 피고인의 의견을 기재하고 있기는 하나, 그 주된 취지는 성행위에 관한 서사가 없는 성기 사진 자체를 음란물로 보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적 의견만을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을 뿐이고, 나아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적 논증이나 그밖에 발기된 남성 성기의 사진에 의해 야기되는 성적 자극을 완화시킬 만한 문학적·예술적·사상적·과학적·의학적·교육적 가치 등을 지닌 내용상의 맥락이 존재한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하면, 우리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건 게시물은 지배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호색적 흥미에 치우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별다른, 사상적·학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니지 아니하며, 이를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음란물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서울서부지방법원 2012.7.13 판결 2012고합151)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기 노출은 음란성이 매우 큰데, 겨우 12줄에 불과한 논평으로는 학술적·사상적·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결과적으로 박 교수의 게시물은 성적 수치심이나 호색적 흥미를 자극하는 음란물이라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이런 “간단”한 논평을 덧붙인다고 해서 음란함이 완화되기 어렵다면서 좀 더 “구체적인 학술적인 논증”이 없었다고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박 교수의 불성실함을 질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자세하고 학술적인 맥락에 놓아야 성기 사진의 음란성이 제거될 수 있다는 말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사자인 박 교수는 판결문 후기에서 “앞으로 성기 사진 그대로 한번 보여주려면 논문 1편 정도는 써야 한다는 뜻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다행히,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판결문: http://blog.naver.com/kyungsinpark/110149843171) 2심 재판부는 일단, 성기 사진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판단해야 하다는 입장을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개진한다.

 

“위 ① 부분은 ②, ③ 부분과 달리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사건 게시물 내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②, ③ 부분보다 시각적으로 돋보이긴 하나, 위 ①, ② 부분은 타인의 블로그에 올려져있던 사진 및 정보통신심의규정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반하여, ③ 부분은 피고인의 주관적 견해를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게시물을 전체적으로 본 일반 보통인이라면, 게시자가 표현하고자 한 핵심 내용은 ① 부분이 아니라 ③ 부분에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 ③ 부분은 총 13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완결된 논리 및 체계를 갖춘 학술적 논문 또는 보고서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성행위에 진입하지 않고 성행위에 관한 서사가 포함되지 않은 성기 이미지 자체를 청소년 유해물이 아닌 음란물로 보는 것은, 사회적 적합성 여부를 기준으로 표현물을 걸러내게 되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데, 표현물은 사회질서를 해한다거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위와 같은 표현물을 음란물로 보는 것은 정보통신심의규정에도 반한다’는 취지로서 표현의 자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회적 이슈에 관하여 자신의 학술적 의견 및 정책적 입장을 인터넷 공간에 적합한 용어 및 논리로 집약하여 표현한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사상적 또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울고등법원 2012. 10. 18. 판결 2012노2340)

 

2심 재판부는 박 교수가 올린 성기 사진을 ‘전체적인 맥락’속에서 평가한다. 그러니까, 일반 보통인도 성기 사진을 박 교수가 설정한 맥락 속에서 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성기 사진이 게시되었다는 이유로 음란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박 교수의 게시물이 완결된 체계와 논리를 갖춘 논문이나 보고서는 아니더라도 인터넷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표현한 의견이므로, 최소한 ‘하등의 사상적·학술적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혹시나 누군가가, “그렇다면 사법부는 박 교수의 행위가 잘했다는 겁니까?”라고 항의할까봐 (그것도 소심하게 괄호 안에 넣어)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이고 있다.

 

“(다만, 문제 제기 방법 또는 판단의 대상을 소개하는 방법으로서 음란 여부가 논란이 되었던 위 사진들을 그대로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이었는지에 관하여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법원이 판단하는 것은 그 표현물의 ‘훌륭함’의 여부가 결코 아니다. 사법부는 박 교수가 얼마나 뛰어난 학자이고, 얼마나 훌륭한 방심위원인지를 평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 법정은 학술세미나도 아니고, 예술평론회도 아니다. 이 형사법정에서 다뤄야할 논점은 오로지, ‘박 교수의 게시물을 형벌로서 제재할 것인지’의 여부이다. 대법원이 판단기준으로 제시했듯이 이 게시물이 ‘하등의 사상적·학술적 가치’가 없는지만 소극적으로 판단하면 족할 뿐, 그것이 얼마나 사상적·학술적으로 훌륭한 것인지는 판단할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심의대상물을 직접 보여주고 그것을 논평한 박 교수의 문제제기 방법이 불가피했는지 여부 역시 판단의 대상일 필요가 없다. 2심 재판부가 괄호 안에 넣어 굳이 설명했듯이, 그 ‘불가피함’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형벌권을 발동할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판결 덕분에 이제, ‘법정’이 학술세미나나 예술평론회와 구분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Niklas Luhmann)은 사회체계가 각각 분화되어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법체계, 학문체계, 예술체계는 각각 고유한 코드에 따라 독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법체계는 ‘합법/불법’이라는 독자적인 코드에 따라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사회의 기대구조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평가하지 않고 합법과 불법이라는 이원코드를 적용한다는 것은, 법이 법답게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만약 법이 예술체계의 고유한 일에 주제넘게 미주알 고주알 간섭하려고 하거나, 학문체계가 담당하고 있는 일까지 관여하려고 든다면, 법체계는 고유의 기능을 상실하고 다른 체계의 기능까지 마비시킨다. 예컨대, 만약 법원이 불명확한 기준으로 예술체계에 간섭한다면 예술체계는 법체계의 무분별한 간섭이 두려워 제대로 예술활동을 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일례로, 김인규 교사의 나체사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결문에서는 “꼭 본인 부부의 나신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얼굴이나 성기 부분을 적당히 가리지도 않은 채) 드러내 보여야 할 논리적 필요나 제작기법상의 필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삼는다. 어떤 생각을 어떤 ‘기법’으로 풀어내는가가 바로 예술의 본질이며, 그 적절성 여부를 법원이 판단하게 된다면 예술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될 것이 자명하다. 어떤 경우에 법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극도로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음란물로 판정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김인규 교사는 이렇게 항변했다.

 

“저와 같은 작가들이 다음에 또 다시 작품을 하여 전시한다면 누구에게 사전에 위법 여부를 물어야 할까요? 그래서 작가들이 다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반면, 2심 재판부의 판결처럼, 법원이 ‘하등의 가치’가 없는지만을 소극적으로 판단하고, 웬만해 가지고는 이 판단기준에 따라 음란물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판례가 축적된다면, 이제 예술가들은 더욱 자유롭게 예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다. 법이 합법/불법이라는 자신의 양가적 코드에 충실할 때, 법은 법다울 수 있고 예술은 예술다울 수 있는 것이다. ‘바람직함’이나, ‘훌륭함’이라는 잣대는 법이 합법/불법의 코드로 환원하기에 지극히 부적절한 것이지만, ‘가치있음/가치없음’이라는 잣대는 합법/불법의 이원코드를 작동시키기에 훨씬 용이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심 재판부의 판결은 ‘법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한계짓고, 그 이외의 판단을 다른 체계에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법은 고유의 기능이 회복되었고, 다른 체계는 법의 소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하등의 학술적 가치가 없는 학술활동을 하거나, 하등의 예술적 가치가 없는 예술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법의 한계가 이렇게 설정되고 나니, 우리는 비로소 음란물과 예술에 대한 또 다른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불행히도 법정에서의 이 무익한 논란 때문에 잊혀진 논점이지만, 박 교수가 원래 그 게시물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논점은 “아무런 성적 서사가 없는 성기사진이 음란물이 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다. 흥미로운 주제다. 박 교수의 게시물이 학술적·사상적 ‘맥락’이 있었기에 음란물이 아니라면, 아무런 맥락을 부여하지 않은 채 (사실 맥락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단순히 성기 사진만을 게시한 것은 음란물일까? 한 발 더 나아가, 성기를 성욕을 자극하는 맥락에 위치시켰다면 그것은 무조건 하등의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음란물일 뿐일까? 법원이 또 다른 판단기준으로 제시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왜곡”이라는 기준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까? 2심 판결문은 한편으로 법의 한계를 분명히 했지만, 다른 한편 이렇게 또 다른 논의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검찰이 상고할 방침이라고 하니, 이제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대법원이 간신히 열리게 된 이 지평을 다시 봉쇄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이글은 10월 2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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