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5] ‘망국’의 4대강 사업, 사법적 책임 물어야

 

[시민정치시평 205] 

 

‘망국’의 4대강 사업, 사법적 책임 물어야

: 국감 이후,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남는 과제

 

이양수 한양대학교 강의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시민과 세계》 편집주간 

 

 

으레 봐오던 풍경이다. 고함치고 호통 치는 모습, 비아냥거리는 언론. 과거와 다를 바 없는, 그 나물에 그 밥인 국정감사 기간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면 익숙한 것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새 정부 들어 첫 번째 국정감사로, 더욱이 지난 정권의 과실을 심판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물론 국정원 사건, 수사외압 시비 같은 현안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앞길을 가늠하기 힘들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인신공격성 설전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4대강 국정감사는 어떤가. 칼날 무뎌진 무사를 압박해오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었으나, 사실 그 이상이다. 못된 사람이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우리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4대강 사업이 부실로 결론 날 것임은 충분히 예측한 바다. 이명박 정부는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운하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바꾸는 꼼수를 부렸다. 정치권력을 무한정 부리고 싶었을 것이다. 청계천에서처럼, 4대강 곳곳에 이름을 새기고 싶은 야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 결과가 대재앙일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민 위에 군림한 권력은 저항을 구실삼아 더욱 커진다.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에 취하면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운다. 이런 상황이 비단 과거형이라 할 수 없다. 어느 정권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4대강 사업 국정감사에 걸었던 기대는 간단하다. 사태의 책임자를 물색하고 책임을 묻고 싶은 것이다. 이 기대는 합당한 방식으로 달성돼야만 하는 과제이다. 어쩌면 시민은 영리한지도 모른다. 권력자가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만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보다 무서운 게 망각이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할 문제는 이 같은 반복을 끝내는 방식이다. 피해자의 아픔을 잊으면 언제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은 대개 사법 책임 내에서 다루어진다. 사법 책임은 주로 위법사항이나 범법행위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물론 사법 정의는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는 첫 번째 통로이자 정의구현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사법 책임은 늘 반쪽의 성공일 뿐이다. 통치행위에 대한 포괄적인 책임보다 특정 행위나 정책의 위법성 여부에 초점이 집중된다. 사법적 책임은 기본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이미 일어난 행위에만 위법여부를 묻는다. 사법 책임은 통념상의 도덕적 책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특정 개인, 특히 가해자의 고의성을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통치 행위에서는 고의성 입증이 어렵다. 그런 까닭에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은 몇몇 가신들의 감옥행으로 끝나거나, 최고 책임자의 사과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회 전체가 입은 피해는 고스란히 남게 된다. 사법적 책임은 특정인 면책을 위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이 제기된 바 있다. 12.12 사태 책임자 처벌,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책임자 처벌 문제로 사법적 책임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 논쟁은 우리 역사에서 정치행위에 대한 책임 공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경우 모두 우리의 정의감과 거리가 먼 판결로 끝이 났다. 쿠데타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지로 ‘공소권 없음’ 판결을 내렸고, 외환위기 사태 책임자 처벌은 ‘고의성 없음’으로 판정하면서 책임자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결국 두 소송은 과거 통치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준 꼴이 되고 말았다. 다수의 피해자를 보고도 가해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논리, 일자리와 집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지만 고의성이 없으니 무죄라는 것이다. 장황한 예고편에 미치지 못하는 본편방송처럼 요란만 떨고 김빠진 재판이 되고 말았다.

 

통상 정치행위도 도덕적 책임의 범주 안에서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정치행위는 독특하다. 정치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에 벌어질 행위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예측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다. 피해는 예상하지만, 구체적인 피해양상은 현 시점에서 알 수 없다. 정치의 기술은 불확실성의 통제다. 그래서 정치행위는 미래의 결과를 두고 약속하는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약속, 약속을 지키는 행동으로 정치 지도자와 국민의 신뢰 관계가 성립한다. 문제는 이 같은 약속이 사법 책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약속일 뿐 법적으로 제약을 가할 수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곧바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통치행위로 용인될 경우 면책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럴까? 정치인은 허황된 약속으로 국민을 현혹시킨다. 아니면 말고, 낚시에 걸리면 좋고 식이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설사 문제가 생겨도 비싼 변호사의 도움으로 사법의 망을 피해간다. 이런 식으로 정치행위에 대한 무책임이 반복된다.

 

사법적 책임을 피해간 이들은 종종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는 수사로 우리 마음속에 남은 무거움을 덜어내려 한다. 사실 너무도 익숙한 행태들이다. 사재를 털어 재단을 만들겠다거나 주식이나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식이다. 어쩌면 이 자체가 우리를 기만하는 고도의 정치행위이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의향이 전혀 없거나, 허울 뿐인 보여주기 식 약속으로 사태를 모면하려는 것이다. 4대강 책임 공방에서도 다시 반복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겪고 있기에 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바로 우리들 모두라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존의 방식과 다른 관점, 즉 개인의 관점이 아닌 시민의 관점으로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시민의 권리 차원에서 정치적 책임이 제기돼야 한다. 정치적 책임은 정치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 현대 정치는 권한 위임을 통해 이뤄진다. 권한위임은 신뢰를 바탕으로만 가능하다. 신뢰는 관심과 대답의 주고받음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한 친구의 얼굴이 어두울 때, 왜 그런지 묻지 않는가. 관심 표명은 이미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정치적 책임에 깔려 있는 신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뢰 이상이다. 정치인은 시민의 관심에 대답할 책무가 있다. 정치적 책임은 이 같은 책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더욱 권한의 위탁은 공공성, 사회적 위험 감소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공공성을 해치거나 사회적 위험을 키운다면 사회성원으로서 우리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고, 그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행위는 묻고 대답하는 관계에서 제기되는 책임의 범위에 있다. 따라서 대답할 책무를 사법적 책임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소명이다. 물론 이 물음은 이론적인 어려움을 낳는다. 무한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의 한계를 긋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공공의 위협에 대한 제제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가령 환경문제와 그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서구 유럽도 이제야 시민의 관점에서 정책의 책임을 물으며 사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고전적인 책임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은가. 더더욱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한탄하는 이 시점에서 시민의 권리를 되찾는 일이 급선무다. 하나의 방법은 잘못된 정치행위의 책임을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통치행위로 가장한 폭력에 당당하게 대항하는 것이다.

 

국정감사는 끝났고, 우리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책임공방에서부터 과거를 반복하지 말자. 새로운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 부정의는 근절돼야 한다. 법이 없다면 법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시민의 권리로 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목청 높여 부르는 순간, 주권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모두에게 던져진 책임인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소시민의 냉소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지금 중요한 건 단순히 특정 개인에 책임을 지우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 행위의 책임이 그저 사후처리에 그치지 않는 제도를 모색할 시점에 와있다. 지금 이 순간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수많은 정치 행위들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책임을 바로 잡는 것은 바로 시민의 몫이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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