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05] ‘태극기’와 ‘촛불’은 함께 존재하고 있다

‘태극기’와 ‘촛불’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촛불-시민과 태극기-시민이라는 거울쌍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간사

 

손가락 끝을 스크린에 대고 몇 번 긋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3줄 요약’으로 세태를 이해할 수 있다. 유튜브는 우리 시대 지식의 보고로 여겨진다. 하루 5분으로도 세상사를 지루하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슈의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빠르다. 그만큼 이해하고 따라가기 버겁지만, ‘전문가’에게 판단을 위임하면 어떻게든 촌평할 수준은 될 수 있다. 긴 호흡은 불필요하다. 세태를 이해하기 위해 거대담론이나 구조, 이론 따위는 그다지 쓸모없다. 몇 년 전 “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야”라는 말이 비아냥 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물론 구체적 분석 없이 신자유주의만 주야장천 외친다는 것은 아무 말도 안 한 것에 다름 아니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정치는 정세라는 시간대를 바라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건들의 선형적인 나열이 유일한 정치의 시간대다. 이렇게 지식의 자리는 정보가 차지한다. 그리고 지식과 정보의 모호해진 경계와 함께 정치의 자리는 정치공학이 대신한다. 장구하고 지난한 과정 그 자체인 정치는 지루하고 피로하지만, 정치공학적 해석은 모종의 쾌감과 효능감을 선사한다. 전문가라는 이들은 정치행위자들 이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관계, 힘 그리고 욕망이나 심리까지도 고려하여 ‘표준’해석을 제공한다. 나아가 해석에만 그치지 않고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의 진리’로 꿰어지는 명쾌함이 주는 아늑함에서 많은 이들은 ‘깨어있는 자로서의 시민’으로 거듭난다.

 

‘깨어있는 시민’은 누구인가?

 

진보와 보수라는 이항대립만큼이나 시민은 ‘촛불-시민’과 ‘태극기-시민’으로 양분된 것처럼 보인다. 두 집단 모두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거칠게 풀어놓은 앞선 내용은 두 집단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은 상대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깨우쳤다는 내용은 서로 다를 테지만, 깨어있다고 여기는 것은 동일하고, 깨어가는 과정 또한 유사하다. 

 

그중 촛불-시민은 스스로 모던한 것 또는 진보적인 것을 선취한 이들이라 여긴다. 적폐라는 전근대적인 것을 청산하거나 ‘진보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이다. 요소론적으로 부정의한 것을 지워나가는 데 열중한다. 무오류의 세계를 지향하듯 낡은 것을 제거하면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 여긴다. 그 대상은 주로 어떤 정당, 어떤 정치인, 어떤 시민들로 향한다. 이들에게 태극기-시민은 화해불가능한 제거 대상이다. 이들만 없으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이룰 테니까 말이다. 

 

정치가 포기된 자리에는 청산과 제거가 자리 잡는다. 깨어있다는 인식은 타자를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다. 스스로 옳은 만큼 상대는 틀리다. 하지만 계몽이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상대는 제거 또는 배제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더욱이 정치에 대한 정치공학이 우위를 점한 조건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를 계몽된 자로 여기고, 타자를 계몽의 대상 또는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전쟁정치’ 하에서 오랜 ‘내전’을 주도해온 태극기-시민의 반공주의와 닮아있다. 태극기-시민 또한, 촛불-시민을 부정한다. 과거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스스로 근대적이거나 선진적인 가치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산업화, 근대화, 성장과 경제발전으로 표상되는 가치들이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을 교화시키거나 가둬서 전향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말 그대로 ‘제거’하기도 한다. 적과 오래 싸우면 닮아간다는 말처럼 각각의 정치는 거울쌍인 것처럼 닮아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것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근대를 세계체계의 시대적 규정으로 해석했다. 즉, 모던한 것과 덜 모던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던한 것을 선취했다고 일컬어지는 서구국가들과 아직 저발전 상태인 비서구 국가 모두를 근대의 시간대에 위치 지은 것이다. 서구적 모던이라는 것은 식민지국이라는 타자를 전제해야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근대라는 것은 처음부터 콜로니얼한 것을 관계적으로 내장한 체계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인식은 전근대를 제거함으로써 근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근대와 근대는 서로를 조건으로 하는 관계라는 것을 말한다. 근대와 전근대를 동시에 보는 인식을 통해 근대라고 불리는 것과 전근대라고 불리는 것의 사태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근대’를 선취한 태극기-시민이 그동안 억압하고 제거해왔으나 결코 ‘전근대'(민주주의)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촛불-시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태극기-시민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성취할 ‘근대'(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는다. 태극기-시민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집단은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재/생산되는(된), 구성되는(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은 대체로 과정과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를 제거한다고 원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태극기-시민과 촛불-시민 사이에 반복되어온 청산과 제거의 정치는 우리 정치의 다른 이름이었다. 양자는 각각 믿음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 형식은 거울쌍인듯 같다. 이러한 일종의 반복되는 원한의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서로를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포용하자는 식의 선비연이 아니다. 되려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되새기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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