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56] 기본자산제, 그게 최선입니까?

기본자산제, 그게 최선입니까?

나눠주기보다 국가가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쓸 방법 강구해야

 

김공회 경상대학교 교수/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기본소득에 이어 기본자산이 최근 인기다. 프랑스 출신의 유명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최근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매년 25세가 되는 청년에게 성인 평균자산의 60%(서유럽 기준 12만 유로, 한화로 약 1억6000만 원)를 지급하자고 주장해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었고, 국내에서도 정의당이 지난 4월 총선 제1공약으로 청년기초자산제를 내놓은 데 이어 여권 일각에서도 기본자산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기본자산, 과연 필요한가?

 

먼저, 기본자산이란 무엇인가? 기본소득과 비교하면 쉽다. 둘 다 모든 시민에게 일정액의 돈을 조건 없이 지급하자는 제안이다. 다만 지급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정기적으로(예: 매월) 지급되는 정액의 소득이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면, 기본자산(basic capital)은 일정한 나이(예: 20세 또는 25세)에 도달한 모든 시민에게 한번 지급되는 목돈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만’ 보면 둘은 차이가 없다. 향후 정기적으로 지급될 기본소득의 현재가치만큼을 기본자산으로 지급한다면 말이다. 반대로, 그러한 기본자산을 금융기관에 신탁하고 매월 일정액(기본소득)을 받아쓸 수도 있다. 또한 20세에 도달한 모든 시민에게 기본자산을 지급하고 60세부터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식으로, 둘을 배합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 기본자산제가 주목받는 것은 자산불평등이 소득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부의 대물림(상속)이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산세와 상속세의 누진성을 강화해 모인 재원으로 모든 시민에게 일정액의 자산을 지급하자!’ 이런 성격 때문에 기본자산제는 ‘사회적 상속제’라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기본자산론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모순 하나를 정확히 짚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순의 해결을 기본자산에서 구하는 것, 과연 바람직한가?

 

먼저 생각해보자. 왜 개인이 자산을 필요로 할까? 통상적인 소득으로는 대처하기 힘든 예외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자녀가 대학에 가거나 집이나 차를 살 때,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아플 때 등등. 이럴 때 필요한 목돈은, 화장대에 꽁꽁 숨겨둔 금붙이를 팔거나 적금을 헐어 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금붙이나 적금이 ‘자산’이다.

 

하지만 자산의 이와 같은 필요성은 점점 줄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커졌고 금융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국가장학제도 덕분에 등록금을 못 내 대학을 못 가는 일이 크게 줄었고, 제도를 잘 활용하면 당장엔 ‘내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집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험도 나름대로 잘 작동중이다. 그밖에 개인은 사업을 벌이기 위해 자산을 보유하고자 할 수도 있는데, 역시 국가 기능과 금융제도의 발달 덕분에 요즘엔 사업의 수익성이 어느 정도 입증만 되면 그 초기자금을 개인이 온전히 부담하지는 않아도 된다. 물론 이상의 사항들과 관련된 제도가 부족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바람직한 정책방향이 뭘까? 개인에게 자산을 지급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도를 보완함으로써 개인들에게 자산의 필요성을 줄여주는 것인가?

 

이렇게 보면, 왜 1970년대에 도입되어 호평받았던 ‘근로자재산형성저축'(일명 ‘재형저축’) 정책이 2010년대 박근혜 정부에서 부활했을 때 처참하게 실패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재형저축이란 노동자가 월급 일부를 성실하게 저축하면 국가가 보통의 예금에 비해 이자도 더 주고 세금도 감면해주는, 그리하여 일정 기간 뒤 노동자가 목돈을 쥘 수 있게 해주는 제도였다. 이것이 성행한 1970-80년대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극심한 ‘각자도생’ 사회였다. 돈이 없으면 초등교육도 못 받고 병원도 언감생심이던 시절이니, 자산은 정상적인 소비행위를 위해서라도 누구에게나 필요했다. 2010년대의 한국은 어떤가? 적어도 교육·의료·주거 등의 이유로 자산을 보유해야 할 필요성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크게 줄었다. 그 대가로 개인은 장기간 금융회사의 ‘노예’가 될 가능성도 높아졌지만 말이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자산의 의의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을 통해 수입을 거둔다는 것 말이다. 2013년에 부활한 ‘박근혜 표 재형저축’이 부자들의 축재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그래서다. 가수 남진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노래를 부른 게 1972년이다. 지금은 어떤가? 초원 위의 집이 아무리 멋져도 그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실패한 ‘투자’로 간주되는 세상 아닌가?

 

자, 우리 청년들이 기본자산으로 한꺼번에 몇천만 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들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요즘 같은 경제 환경에선, 그들이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중개업소로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복권이나 도박은 어떤가? 많은 기본자산 옹호자들은 기본자산의 용처를 제한해 이를 방지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용도도 마찬가지다. 창업? 필요한 이들에게 몰아주는 게 낫지 않나? 유럽 배낭여행?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쨌든 이런 용도라면 국가의 다른 정책이나 금융제도를 통해서도 얼마든 지원할 수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왜 요즘 기본자산이 주목받나? 자산불평등 때문이다. 왜 자산불평등이 문제인가? 자산이 소득을 낳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소득불평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해법? 자산으로 거두는 소득에, 그리고 자산의 소유 자체에 과세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과세는 세수확보보다도 자산 소유에 대한 인센티브를 낮추는 게 목적이며, 그것이 효과를 내면 자산불평등도 얼마간은 완화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얼마간의 세수는 어떻게 쓸까? 굳이 청년을 위하겠다면, 교육·주거·고용 등에서 공공성을 높여 청년의 생활비를 줄이고 삶을 안정시키는 데 쓰는 게 어떨까?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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