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44] 박근혜 손에 든 비장의 카드 세 장은…

 

[시민정치시평 144]

 

박근혜 손에 든 비장의 카드 세 장은…

: 박근혜, 한국의 바이체커가 돼라

 

홍윤기 동국대 교수

 

 


불확실함에서 모호함으로…

 

작년 12월 19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면서 박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해지던 순간 필자에게 확 밀어닥친 것은 멘붕이 아니라 짜증이었다. 왜?

 

오직 대통령이 되겠다는 집념 빼놓고, 박 당선자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아니 박 당선자가 도무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선거 기간 중 나에게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상당수 유권자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몇 년에 걸친 최고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선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고 예상했던 터라,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중앙선관위가 전국에 배포한 후보 홍보지 첫 머리에 DJ가 자신을 국민통합의 적격자로 지목한 말을 내세운 걸 보고, 그가 정말 대통령이 되고 싶기는 되고 싶은 모양이라고 안쓰러움만 느꼈던 터였다. 그런 사람이 당선돼? 그에 대해서 세삼 공부하고 그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할 일이 정말 짜증스러웠다. 과연 박근혜는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시계가 40년 뒤로 돌려진 듯한 느낌이 싫어 아예 인수위가 정책제안서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MB의 불통(不通)이 당선자의 무통(無通)으로 바뀐 것이 눈에 영 거슬려도, 저 밀봉의 침묵 속에서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분에다, 내가 반대한 이가 최고권자가 되었다는 데 따르는 상당한 공포심도 갖고, 그러면서도 내놓는 인사 카드마다 막장을 치는 걸 보면서도, 그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그리고 33일이 지난 2월 21일 인수위가 드디어 140개의 「박근혜 정부 국정 과제」를 제안서 형식으로 내놓았다. 앞으로 5년 ‘박근혜 시대’를 살아야 할 이 나라 시민의 도리로서 나름 바쁜 시간을 쪼개 총 222쪽의 이 제안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느낌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선자에 대한 애초의 불확실함(不確實, uncertainty)이 이제는 그의 자기 정체성과 미래 행보에 대한 모호함(模糊, vagueness)으로 바뀌었다. 난감할 일이다.

 

‘조국 근대화’, ‘국민성공시대’에서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로?

 

이 제안서는 “국민 행복을 국정의 최고 가치로 삼고, 한반도 평화와 지구촌 발전에 기여하는 희망의 새 시대”, 즉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고, 이 구호는 인수위 누리집 오른쪽에 즉각 큰 배너로 걸리면서 ‘5대 국정과제’의 머리를 장식했다. 그런데 이 구호를 접하는 순간 두 가지 표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내가 어린 시절 자라던 평창의 군청 입구에 서 있던 홍보탑의 구호였다. “조국의 근대화”, “증산ㆍ수출ㆍ건설”! 바로 당선자의 선친이 전국 방방곡곡 행정기관 출입처에 모두 세웠던 홍보탑에 파란 고딕체 글씨체로 위압적으로 쓰여졌던 정책구호였다. 그 때는 ‘행복’이라든가 ‘희망’이라는, 조금은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단어들이 관청 용어에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 ‘큰따님’이 대통령이 된 지금, 이런 돌격적 용어보다 훨씬 감성적인 단어가 강렬하게 빨간 새누리당 당색 위에 하얗고도 부드러운 이미지로 흘려져 있다. 그 구호는 5년전 MB가 상품 광고 냄새가 물씬 나게 내걸었던 “국민 성공 시대”라는 말보다도 훨씬 감성적이다. 이젠 근대화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행복”이다! 아, 변하긴 변했다. 이제야 국가가 국민에게, 그것도 국민의 피부에 바로 닿는 점까지, 다가왔다.

 

날 행복하게 해줄 이들의 얼굴들이라곤…

 

그런데 33일 동안 당선자가 내어놓은 얼굴들과 이 낱말들이 겹치자 당장 드는 두 번째 생각 ― 누굴 보고 나더러 행복하라는 거지? 인수위대변인서부터 헌법재판소장 후보, 총리 후보, 국방장관 후보, 그리고 갑자기 국적을 바꾼 새 부서의 검은 머리 미국인까지. 그리고 지명된 내각 구성원 상당수가 자신이나 자식의 병역 태만으로 얼룩진 이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은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기쁨으로 가장 커지는 법인데,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오는 이들이 나와는 별종 같다는 이질감만 깊게 해 왔다. 당선자가 날 행복하게 해줄 이들이라고 소개하는 이들이, 몇몇만 제외하고는, 한 마디로, 징그럽고 군시럽다. 뭔가 불행한 결말이 예정되었으면서도 떨칠 수 없는 혼약을 해야 하는 심정이 이런 것 아닌가? 차라리 행복이란 말이나 안 했으면… 성공시켜 주겠다는 약속에 속은 것이 아직 엊그제이다.

 

희망을 가지라고?

 

그래, 억지로 행복이라 치고,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 일들은 또 뭔가? 새누리당 이름으로 나온 18대 대선 공약집 9쪽에서 “모든 국민들이 100% 행복한 나라를 위한 첫 걸음”이라고 모든 공약들에 앞서 첫 머리에 박았던 “경제민주화”는 그 내용들이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질서”라는 말 아래로 분산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대기업집단” 즉 재벌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던 모든 표현들이 완화되었다. 본래의 새누리당 공약집에서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재벌들의 이탈행위를 적시하던 규정들이 두리뭉술하게 물개지면서, 하겠다는 것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인지, 진정성이 심하게 흔들린다.

 

가장 중요한 약화현상은, 재벌들을 상시적으로 동반하며 그 일탈을 규제하는 임무를 공약집에서 적시받았던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이 인수위 제안서에서는 단지 관련된 법과 제도의 정비 정도로 굴절되면서 그 위원회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것이다. 대선 공약집에서는 “공정거래 관련 법집행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독점되어 있음으로 해서 법집행의 견제경로가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단을 내리긴 했지만, 재벌 견제의 중심을 공정거래위원회에 두어 “공정성을 강화”하면서 다양한 견제통로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은 명시적으로 적혀 있었다.(공약집, 149쪽) 그러나 인수위 제안서의 시장경제 질서 항목에는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언급이 아예 빠져 있다. 재벌에 대해 위협을 줄 수 있는 각종 정책 수단들은 콘트롤타워 없이 분산된 채 재벌 구조에 대한 근본적 혁신을 기대할 근거는 없어진 셈이다. 도대체 무얼 갖고 희망을 가지라는 것인가?

 

누굴 데리고 6개월 안에 하지?

 

이러면서 당선인은 2월 18일 인수위 국정과제 토론회에서 “핵심 공약을 6개월 안에 실천할 각오로 역량을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누가 실천하는가? 33일간의 인수위 활동에서 행복이든 희망이든 다 좋지만, 가장 큰 문제로 드러난 것은 대선 기간 중 진보 진영에서 과감하게 차용하고, DJ-빙의까지 하면서 그 신뢰성을 높인 진보적 정책들을 추진할 실천 동력이 당선인의 차기 정부에서 눈에 띠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여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제 권력을 잡았으니 공약은 잊어버리라고 아우성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데려온 하수인들은 이 대한민국의 역동적 정치과정과는 거리가 먼 교수와 관료, 그리고 유신 후예들이다. 당선자는 국민들의 역량을 의회와 행정 양 전선에 투입할 능력과 의지를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무통(無通)의 행보 속에서 밀봉(密封)하다시피 꽁꽁 챙긴 인사들의 면면이 공개될 때마다, 그 어떤 비장의 무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소통(疏通)보다는 밀통(密通)의 암울함만 더해 왔다. 이 밀통의 인사들 안에서 밀통에 값할 비책이 나올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당선자에게는 아직 최후의 무기가 남아 있다. 그것은 당선자 자신이다. 즉 당선자 자신이 손수, 능력도, 사명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하찮은 하수인들을 자극하고 힘을 가할 결정적 카드가 세 장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반대자를 자기 총의 격발창에 장전하여 국민 머리 위로 쏘아올려 권력의 용단을 보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서 오직 박 당선자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당선자 비장의 카드 : 보수 정치인의 담대함을 보여주는 것 

 

내 생각에 당선자는 우선, 대법원의 엉터리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전 의원을 취임 즉시 사면하여 그가 다시 의회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노 의원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이 해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용산 참사의 마지막 수감자서부터 언론사 해직자에 이르기까지 MB 정권이 자행한 폭정의 억울한 피해자들을 가능하면 3ㆍ1절 특사나 그에 상응하는 조처로 원상회복시키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당선인이 진정 위대한 대통령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의 귀감이 되고자 한다면, 선친의 공과에 대해, 특히 그의 반헌법적이고 반인륜적인 과오에 대해, 단지 사적인 차원에서 그의 딸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공인으로서,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질서를 반석에 올려놓는다는 의지로, 철저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는 도덕적 강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독일의 통일기 대통령으로서 동서독 시민의 내적 통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의 행적을 상기시키고 싶다. 보수적 귀족 집안이었던 그의 선친은 히틀러 시절 외무차관으로서 전후 전범 재판을 받았다. 자식인 바이체커 대통령은 이런 선친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 패망의 날을 “독일이 해방된 날”이라고 한 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는 도덕적 감동과 자신감을, 과거 적대국들에게는 독일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심어 주었다. 독일 통일기에 그는 정치적 약자였던 동쪽 국민들과 모든 면에서 함께 함으로써 통일의 정신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나는 박 당선인이 바이체커 같은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우리에게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사감을 과감히 떨칠 줄 아는 ‘성공한, 위대한 보수주의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선인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런 정치적 자산을 갖고 있는 유일한 권력자다. 어느 누구도 대통령을 아버지로 두지 못했으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기 결심을 실천에 옮길 실권을 갖고 있지 못 하다. 우리 대한민국 시민은 이제 그런 보수 정치가를 가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가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출범도 하기 전에 자신의 대선 득표율을 이미 한참 깎아먹은 지지율로 주저앉은 차에,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조기 레임덕에 들어간 MB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통치불능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한 세대를 건너 부녀가 똑같이 시민항쟁에 부딪치는 광경을 봐야 할까?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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