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3-05-29   2209

[기고] 종북에 대한 극단적 적대주의가 뿌리… 무차별적 혐오·독설 민주사회 괴물로

 

 

[이슈논쟁] ‘일베’의 일탈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일탈’이 도를 넘어서고있다. ‘민주화’라는 말을 ‘왕따’라는 뜻으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5ㆍ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을 훼손하거나 ‘북한 특수부대와 연계된 폭동’ 등으로 왜곡하는 글을 일베 회원들이 잇따라 게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는 양상이다. 가학적 언어폭력 수준을 넘어선 내용도 적지 않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닭과 합성한 사진을 올렸고,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미시USA’사이트를 해킹했으며, 북한 대남 선전용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회원을 ‘죄수번호’를 매겨 공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일베현상이 공존 소통 등 민주사회의 가치를 짓밟고 있다고 힐난한다. 표현의 자유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베가 낳고 있는 폐해를 감안하면 단견이라는 비판이 우세하다. 

 

이원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일베는 무질서하게 쪼개진 비체계적 집단”이라며 “언론이 진보ㆍ보수의 균형을 맞출 때 일베를 인용해 대표적 보수성향 집단으로 키운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일베 논란 때문에 우리 사회는 소통역량을 더욱 제고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됐다”고 말했다. 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익 지배집단의 적대주의 종북 담론이 낳을 수밖에 없었던 괴물이 바로 일베”라며 “일베현상을 계기로 우익 집단은 누구라도 자신들을 비판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소양을 갖출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종북에 대한 극단적 적대주의가 뿌리… 무차별적 혐오·독설 민주사회 괴물로”

 

● 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뉴라이트 운동 10년의 연장선

보수언론·정치판 곳곳에 만연

역사왜곡·지역주의 조장까지

 

지난해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시애틀 근교 숲길을 걷고 있었는데, 멀리 뒤쪽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우리 가까이에서 느려지기 시작했고, 바로 뒤에서는 걸음 소리로 바뀌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우리와 나란히 몇 발자국 걷던 그 백인 남성은 갑자기 길바닥에 침을 뱉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불쾌감과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서구에서 침 뱉는 행동은 수치스러운 풍습이 되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의 종아리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무뢰한이든 네오나치든 그런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라며 경계심은 씁쓸한 미소로 묻어버렸다.

 

‘여자를 합법적으로 강간하는 법’을 베스트 게시물로 올리고, 전두환 군부에 저항하다 쓰러져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혹한 주검 사진을 놓고 ‘배달된 홍어들 포장완료’라고 희롱하는 ‘일베충’도 세상 어디에든 있기 마련인 그런 족속들이라고 그냥 외면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들의 말과 행동이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패륜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베의 극단적 성향이 그들의 ‘종북세력’에 대한 깊은 증오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고, 그래서 그들이 어떤 점에서는 지난 10여년 사이 꾸준히 진화해온 한국 우익의 최신 버전을 표상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라는 말을 ‘왕따’라는 말로 둔갑시킨 일베는 이제 ‘5ㆍ18 왜곡훼손 신고센터’까지 찾아가 ‘5ㆍ18은 폭동이야, 홍어들아’라는 글을 버젓이 남겨 놓는다. 광주항쟁은 북한군과 북한 추종세력의 난동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무차별 비하와 조롱도 두 대통령이 종북이었다는 맹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아가, 호남에 대한 기존의 지역주의 공격에 덧붙여, 이제 일베는 호남이 오랜 세월 종북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했다는 종북주의 허깨비까지 덧씌우고 있다.

 

이런 행태는 가까이는 일부 대형 개신교회 목사들과 멀리는 뉴라이트 활동가들이 지난 10여 년 간 주도해온 ‘종북’ 공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일부 ‘전향한 운동권’과 대형 교회 목사들이 주축이 된 뉴라이트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며 친일을 옹호한 반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주사파 혹은 종북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친일과 독재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의 우익 지배세력이 일정한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만드는데 적잖이 기여했다. 

 

종북 공세는 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최근 십 수 년 사이 보수 신문간부들치고 종북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 기사를 쓴 기자는 아마 드물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중 종북이라는 말을 담지 않고 정치적 주장을 펼친 사람도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종북’이란 무엇인가? 종북은 ‘친미’나 ‘친일’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오늘날 남한 대다수 시민들에게, 친미나 친일은 ‘적’이라는 관념을 내포하지 않지만, 종북은 그렇지 않다. 북한은 동족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세력은 북한과 똑같은 적이거나 언제든 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그러니 적은 아예 싹부터 자르고 박멸해야 한다. ‘종북’이라는 말이 이러한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어, ‘종북’ 담론에 토대를 둔 모든 정치 행위는 근본적으로 매우 적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일베는 우익 지배집단의 적대주의 종북담론이 낳을 수밖에 없었던 괴물일 뿐이다.

 

한국의 우익 지배집단은 이제 북한만이 혹은 종북세력만이 자신들을 비판한다는 무지와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사회민주주의자도, 탈근대론자도 자신들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소양을 갖출 때도 되었다. 그래야만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 간의 서로 존중하고 경합하는 민주적 대결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29일 한국일보 기사에서 부분발췌했습니다. (원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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