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57] 밀의 ‘자유론’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밀의 ‘자유론’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공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나

 

송경호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자유론>의 때 아닌 유행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1859)이 때 아닌 유행을 맞고 있다. 밀의 대표 저작이자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보니,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3개월간 우리 언론에서 <자유론>이 총 10번 등장한데 반해, 11월에 72건으로 급격하게 증가한 건 분명 이례적 현상이다.

 

이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알릴레오 시즌3’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얘기만 하겠다”고 시작한 ‘알릴레오 북’s’인데, 유 이사장의 유튜브 복귀가 곧 정치비평 복귀라는 해석이 일찍부터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에피소드가 공개되자 유시민 이사장의 발언들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다수 여론이 찬성하는 쪽과 다른 견해를 내놓은 사람을 핍박한다”는 유 이사장의 지적에 대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내로남불’이라고 되받아치면서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집회 방치는 타인의 자유와 복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집회를 막지 않으면 정부가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유 이사장의 해석에 대해서도 진 전 교수는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자유론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문제”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작금의 논쟁은 <자유론>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 진짜 자유주의자와 가짜 자유주의자, 보수와 진보, 반문과 친문이라는 대립구도를 따라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정치 담론지형, 유 이사장과 진 전 교수 간의 대립구도 탓도 있겠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자유론>에 담겨있는 밀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의 옹호자로서 밀

 

책 제목이 <자유론>인 만큼, 이 책에서 밀이 자유를 옹호한다는 점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밀은 <자유론> 2장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온 인류가 같은 견해이고 한 명만 반대 의견을 가졌다 해서 인류가 그 한 명을 침묵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다 해서 인류를 침묵시키는 게 옳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이 문장의 바로 앞부분에서, 밀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정부의 강제력이 대중의 공공 여론에 반대해서 행사될 때도 문제지만, “그것에 편승해서 행사될 때 더욱 유해”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강제력 그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최선의 정부도 강제력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최악의 정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보면, 밀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에 근본적인 가치를 두고 이것의 절대적 불가침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 전 교수가 그의 칼럼에서 인용한 마이클 샌델처럼, 밀이 “공리주의적 도덕이라는 한계를 넘어” “도덕적 이상인 인격과 인간의 번영이라는 이상에 호소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로서 밀

 

하지만 공리주의자인 밀이 인간의 생득적 권리로서가 아니라, 공리의 맥락에서 자유를 정당화한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점 때문에 밀이 다른 자유의 옹호자들과 구별되고, 그의 <자유론>이 고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밀은 그가 “인간 자유의 고유한 영역”으로 규정했던 언론과 사상, 출판, 그리고 결사의 자유 등은 모두 공리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여기서 공리는 지배자나 정책 결정자, 소수의 엘리트의 이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밀이 단순히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밀이 말하는 공리는 인류 전체의 공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밀은 <자유론>의 1장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모든 윤리적 문제가 궁극적으로 공리에 호소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적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 이익에 기초한 광의의 공리이어야 한다.”

 

결국 <자유론>에서 밀은 인류 전체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일련의 자유를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탄압에 희생되었던 소크라테스나 피히테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탄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적 노예 상태가 일반적인 분위기일 때도 위대한 사상가는 있어 왔고, 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적으로 활동적인 사람은 과거에도 결코 없었고, 미래에도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자유는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발달을 획득하도록”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광의의 공리’이자 ‘인간의 항구적 이익’의 맥락에서 긍정되었던 것이다.

 

자유냐 공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처럼 공리의 이름으로 자유가 정당화되는 것이라면, 공리를 저해하는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 밀은 “개인의 행위가 타인의 이익에 연관되는 한, 그 항구적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자발성이 외부의 통제에 구속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밀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그가 <자유론>을 집필한 이유였다: “이 책의 목적은 강제와 통제의 방법으로써 […] 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방도를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 대단히 간단한 한 원칙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 원칙은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느 한 개인의 자유에 정당하게 간섭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방어라는 것이다.”

 

공리(utility)가 곧 공익(public interest)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크 강제 착용, ‘재인산성’, (핸드폰 비번 강제 해제와 관련된) 사법방해죄 등 2020년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넓은 의미에서 “공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밀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그러나 <자유론>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이 책이 백년도 넘은 과거의 유산이자 서구인의 저작이어서가 아니라, 밀 스스로도 딜레마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밀은 강제와 통제는 허용될 수 없다며 자유의 옹호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류 전체의 공리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며 공리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밀의 이러한 양면성은 결국 ‘자유와 공리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밀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샌델의 경우처럼 자유의 옹호자로 볼 수도 있고, 데이비드 브링크(David O. Brink)처럼 자유를 공리주의의 부차적 원칙으로 간주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론>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에서, ‘공리’가 무엇인지, 이를 위해 누구의 ‘자유’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제한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할 필요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유 이사장과 진 전 교수가 촉발시킨 <자유론> 논쟁은 우리가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거나, 현실 정치의 대립구도에 따라 직관적으로 판단해왔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론>의 유행은 때 아닌 유행이 아니라 매우 시의 적절한 유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론>을 손에 움켜쥐고 햄릿처럼 ‘자유냐 공리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밀은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라는 질문은 사실 학자들의 관심사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해 ‘우리사회는 어떤 원칙을 마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원칙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밀은 아마도 ‘공리를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모든 의견은 자유로운 토론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유론>은 개별적 사안에 대해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해답서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지침서로 다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조건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가 <자유론>을 다시 소환하며 기억해야 할 것은 ‘공리냐 자유냐’의 문제라기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모든 의견의 자유로운 발표는 그 발표 태도가 온화하고 공평한 토론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허용되어야”하며, “욕설, 냉소, 인신공격 등등과 같은 것”은 “양편 모두에게 금지되도록 동일하게 제안”되어야 한다. “논쟁 당사자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공격 중에서 가장 험악한 것은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을 악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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