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87] 일베, ‘규제’ 보다는 ‘더 많은 표현’을

 

[시민정치시평 187] 

 

일베, ‘규제’ 보다는 ‘더 많은 표현’을

: 차별적 혐오 표현은 공적 개입 필요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진보가 표현의 규제를 주장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소비자 불매 운동을 한 사람들, 정부 정책을 비판한 사람들, 심지어 국가홍보물에 낙서를 한 사람까지 법정에 서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표현의 자유의 위기’가 화두로 떠올랐고 시민사회의 저항이 시작됐다. 참여연대는 <국민입막음 소송 남발 실태와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는 ‘표현의 자유 옹호 및 증진을 위한 공익변론기금’으로 법률지원에 나섰다.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http://표현의자유.kr)를 결성해 전면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정치권도 이에 화답해 모욕죄, 위력업무방해죄, 명예훼손죄 등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온 조항들을 손질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일간베스트(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및 폄하, 지역혐오, 여성혐오, 전직 대통령 모욕 등이 공공연히 퍼져나가면서, 이러한 ‘표현’을 법으로 제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행정심의, 사이트 폐쇄 가처분 신청, 모욕죄/명예훼손죄 고발 등의 법적 조치들이 검토됐고, 국회에서는 ‘반인륜 범죄 및 민주화운동을 부인하는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안’과 ‘혐오죄 법안’이 발의됐다. 문제는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에 섰던 시민사회와 정치인들이 이러한 강경 대응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관된 논리가 필요하다

 

물론 모든 표현이 무제약적으로 허용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관된 논리 없이 ‘표현’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수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겨우 얻어낸 표현의 자유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베를 둘러싼 논의 구도가 딱 그렇다. 일베의 몇몇 게시물의 반인륜성과 폭력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나쁜 표현’과 ‘법으로 금지돼야 할 표현’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표현의 자유에 ‘좋다’ 혹은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순간 문제가 꼬인다. 이념적 지향에 따라 무엇이 나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이념적 대립이 극심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5.18을 왜곡하는 표현을 처벌한다면 KAL기 사건, 한국전쟁,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도 처벌하자고 할 것이며, ‘종북세력’ 운운하는 것을 처벌한다면, 한미 FTA협상 관계자를 ‘매국노’라고 부르는 것도 처벌하자고 맞불을 놓을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쁜 표현을 규제하기 위한 기제들을 작동시키면 진보와 보수 모두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쪽으로 전개돼, 표현의 자유가 전반적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에서 이념적 지향과 무관하게 모욕죄, 명예훼손죄, 인터넷 행정심의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은 권력의 자의적인 개입에 대한 반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쁜 표현에 대한 인터넷 행정심의는 괜찮다’고 나서는 건 자기모순이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공정한 룰에 대한 대승적 합의를

 

표현의 자유 문제는 더 이상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베 사건을 계기로 보수도 표현의 자유를 운운한다. 이러한 현상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모욕을 왜 국가가 금지하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위축됐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 5.18을 폭동이라고 말할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논리에서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의 폐지에도 합의하자고 제안해볼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기제들을 서로 포기하고 공정한 룰을 마련하는 것에 대승적 합의를 이뤄낼 길이 열린 것이다.

 

‘더 많은 표현’이 원칙적 해법이 돼야

 

표현에 대한 공적 개입에 반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표현들을 내버려두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브랜다이즈 미국 대법관의 말처럼, 나쁜 표현에 대해서는 ‘더 많은 표현(more speech)’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에서 ‘나쁜 표현’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했던 민주시민교육, 인권교육, 역사교육의 강화, 그리고 시민사회에서의 담론투쟁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강경대응책에 골몰하는 것보다 담론공간에서의 싸움에 힘을 쏟아야 한다.

 

‘더 많은 표현’으로 해결될 수 없는 ‘혐오 표현’

 

그럼에도 ‘더 많은 표현’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소수자를 차별하는 ‘혐오 표현'(hate speech)이다. 이미 1966년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에 의하여 금지된다’고 규정한 바 있으며,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러한 혐오표현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이는 불과 십 수 년 전 600만 명의 사람이 학살되는 것을 목도했던 유럽의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나치가 했던 것처럼 어떤 소수집단을 적대하고 배제하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소산이다. 그래서 몇몇 유럽 국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인뿐 아니라, 인종적·종교적 증오의 고취, 심지어 소수자를 차별하는 단순한 의견개진까지 국가형벌권을 행사한다.

 

한국사회에도 외국인, 이주자,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출신지역 등에 대한 혐오표현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법적 규제가 검토돼야 할 만큼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단순한 ‘의견’과 ‘취향’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표현 자체가 소수자에 대한 심리적 해악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배제, 심지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집단학살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적대와 차별의 현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경쟁을 하려면, 누구나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증오와 적의가 공공연하게 표현되고,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고립을 초래하여 소수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것은 더 이상 ‘자유 시장’이 아니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위해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을 규제하듯이, 사상의 자유 시장의 불공정한 현실에 대해서도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혐오 표현을 규제할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국가가 개입한다면 가장 좋은 선택지는 차별금지법에 의한 차별시정조치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차별적 혐오표현이 ‘불법’임을 명확히 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차별시정을 위해서는 조정, 법률구조요청, 소송지원, 시정권고(차별행위 중지, 피해 원상회복, 재발방지 조치 등), 시정명령, 이행강제금, 법원 임시조치, 손해배상 등의 조치들이 순차적·병행적으로 활용된다. 형사처벌과 같은 강제력은 없지만, 다양한 문제유형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범죄화할 만한 해악적 표현의 내용과 범위에 합의하기 어려운 한국의 이념적 지형을 고려한다면, 차별시정조치는 현재 수준에서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존의 차별금지법안은 ‘광고’와 ‘괴롭힘’에 해당하는 차별적 혐오표현만을 규제대상으로 삼고 있어 법안을 적절히 손질할 필요가 있고, 특정인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반인륜적인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별도의 형사입법의 필요성이 검토돼야 할 것이다.

 

반인륜적이고 반민주적인 표현까지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나쁜 표현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한국과 같이 대립적인 이념 지형에서는 더더욱 위험한 일이다. 당장의 화끈한 효과가 없어 답답하더라도, ‘더 많은 표현’이 원칙적인 해법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혐오표현에 대한 공적 개입은 불가피하다. 소수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더 많이 표현’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옹호론에 내재된 또 하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표현의 자유 논쟁 구도에서 새로운 논제로 부각돼야 한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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