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58] 법치주의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법치주의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윤석열은 법치주의를 지키고 있나

 

정태석 전북대 교수

 

지금 법치주의가 새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도나도 ‘법치주의’라는 말을 끌어들이고 있어서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수장으로 하는 검찰조직의 일련의 행위들이 놓여있다. 여기에서 쟁점은 소위 검찰의 ‘중립성’이다. 중립성은 어떤 정체세력의 영향으로부터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검찰의 잣대가 집권세력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중립성’은 ‘공정성’을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공정성이 없는 검찰의 독립성 주장은 공허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한국 사회 검찰의 모습에서 따져야 할 점은 ‘과연 검찰이 공정한가?’ 하는 것이다. 소위 장관후보자 검증을 명분으로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후보자 가족에 대한 마구잡이식 수사와 추미애 현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표적 수사를 진행하고, 또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명분으로 지극히 편파적인 수사를 벌여온 검찰총장과 검찰에게서, 과연 우리는 공정함을 느낄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법치주의’ 원칙을 내세워 정당화하려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

 

작금의 사태들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에서 확인된다.

 

1.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 지휘 하에 이루어진 검찰의 일련의 행위들에 대해 감찰을 시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판사 사찰’ 등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행위들을 이유로 검찰총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면서 직무배제를 하였다. 이에 맞서 윤석열은 직무집행정지 취소 소송을 하였고, 법원이 이를 인용함에 따라 직무에 복귀하였다. 검찰총장은 직무에 복귀하면서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월성1호기 원전폐쇄와 관련하여, 경제성 평가조작 고발 사건에 관련된 공무원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승인하였다.

 

2. 전국법관대표회의는 검찰의 ‘판사 사찰’ 의혹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채택하였다. 그런데 문건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이용’을 막기 위해 공식 대응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3. 검찰은 2019년 7월에 발생한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 김봉현의 술접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는데, 검사들의 술접대 제보 은폐 의혹이나 정관계 로비 진술 회유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으면서, 다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검사 1명, 변호사 1명, 김 전 회장 등을 기소하였다. 그런데 혐의자들 중에 현직검사 몇몇에 대해서는 불기소 처분을 내렸는데,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이 1인당 접대금액이 100만 원 미만이라는 점이었다.

 

첫 번째 사태를 보면, 장관의 감찰과 직무배제, 그리고 이에 대응한 검찰총장의 취소 소송과 법원의 인용은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직무에 복귀한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권의 원전 정책과 관련된 고발 사건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검찰이 정부의 정치적, 정책적 판단에도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검찰의 수사 과정을 보면,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을 흔들어놓으려는 감사원장의 의지를 검찰이 간접적으로 지원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두 번째 사태를 보면, 국민을 위해 공정한 법적 심판을 내려야 하는 사법부의 판사들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수사해야 할 검사들에 의해 위법한 사찰행위를 당하고도, 정치적 이용 가능성을 내세워 검찰의 위법행위에 대한 대응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검찰의 독단과 위법을 견제하며 법에 따라 심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법부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은 스스로 법치를 포기한 행위이다. 물론 판사들이 ‘판사 사찰’을 정치적 문제로 판단하거나 정치적 이용가능성을 염려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 이용가능성으로 따진다면 사실 숱한 사건들에 대해 판결을 포기했어야 했다. 사법부의 역할은 정치적 이용 가능성과 무관하게 공정한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런데 공공기관의 위법행위에 대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법적 심판을 포기한 것은, 결국 스스로 보수 세력을 편드는 정치적 선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고 사법기관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면서 검찰 편들기를 한 것은, 스스로 검찰과 동급이며 법조이익공동체로서 판검사동일체임을 선언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 사태를 보면, 검찰은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는 공공기관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동일체가 된 이권 집단이자 기득권 집단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의 잣대를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으로 지내왔다. 이들에게 독립성은 공정성이 아니라 독단성이며, 독단적으로 검찰권한을 사용할 자유를 의미했다. 다른 공직자들은 음료수 한 잔에도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처벌받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검사들은 100만 원 미만이어서 문제가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의식인가?

 

이런 행위들을 해온 검찰과 검찰총장이 임기보장을 무슨 대단한 원칙인양 내세우며 ‘법치’ 운운하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무슨 대단한 정의실현인양 떠들어대며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국민들이 어떻게 검찰을 공정성과 법치를 실현하는 공공기관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법치주의 논란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법치주의 사상을 피력했던 17세기 정치사상가 존 로크(J. Locke)의 얘기를 잠깐 해보자. 그는 자연상태의 인민들(people)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세우는 데 동의하는 이유는, 개인들의 재산권(생명, 자유, 자산)을 보호받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소수의 통치자에게 입법권을 위임하여 법을 만들도록 하고, 또 통치자(정부)가 이 법에 근거하여 시민들을 통치하면서 시민들 간의 다툼에 대해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로크의 사상에는 자유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 원리들이 다 녹아있다. 물론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와 갈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정치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

 

로크의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에 따른 공정한 심판, 즉 사법부의 통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입법과 행정을 통해 시민들의 재산권을 보호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민들은 저항하게 되는데, 로크가 시민들의 저항권을 인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법치가 법의 형식이나 절차에 의한 통치만이 아니라, 입법에 의한 내용과 실질을 통한 통치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치를 내용/실질로서 실현하려는 것이 ‘정치’라면, 법치를 형식/절차로서 실현하려는 것이 ‘사법’이다. 이것을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로 나누어보기도 한다. 법치로서의 정치는 입법과 행정을 통해 시민 다수가 추구하는 사회적 이익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치로서의 사법은 법적 절차에 따라 형식적 판결을 내림으로써 공정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권력 행사의 중심 주체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이다. 이 때 선출권력인 대통령이 중심이 된 행정부가 독재나 권위주의 통치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적 장치들을 통해 각각의 권한을 제한하면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법치주의는 민주주의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법으로 통치 방식을 규정해두고, 통치자는 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이념이자 원리이다. 민주적 법치주의는 주권자인 시민들의 합의나 위임에 기초하여 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이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시민들 간의 다양한 이익 및 가치 갈등을 공정하게 조정하기 위해 만든 규칙인 셈이다.

 

그렇다면 법치주의 실현 과정에서 검찰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검찰은 법에 따라 범죄행위를 밝혀 사회질서 유지를 돕는 행정기관이다. 시민들이 법을 어겼을 때 수사와 기소를 통해 범죄사실을 밝히고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여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행위를 심판하는 사법부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사법기관으로 불린다. 이런 점에서 검찰은 법치의 중심 주체라기보다는 행정부의 실질적 법치, 즉 ‘정치’를 도와 형식적 법치, 즉 ‘사법’의 역할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치권력이 법적인 정당성을 훼손했을 때 수사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검찰의 법치는 사법의 영역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사법적 권한의 독립성은 법적, 절차적 공정성에 기초하여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윤석열 검찰총장과 검찰의 일련의 행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검찰의 불공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 그저 독립성의 훼손만을 따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사실 윤석열 검찰이 집권당을 흔드는 모습을 지지하고 있는데, 보수든 진보든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나 가치를 잣대로 하여 집권당을 비판/비난하려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검찰이 마치 법치주의의 상징인 것처럼 추켜세우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전혀 공정한 태도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사법적 법치주의의 상징은 검찰이 아니라 검찰이 수사한 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이다.

 

결국 검찰총장이 내세우는 법치주의는 법적 형식에 따르는 사법적 법치이며, 그것도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제한된 법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수사의 공정성을 훼손하면서도 전혀 견제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해옴에 따라 ‘검찰권력’,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이익/가치들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하도록 하는데, 이러한 경쟁은 제도정치에서 정당들 간의 집권경쟁으로 나타난다. 이 때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정책결정에서 선택과 배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와 달리 ‘사법’에서는 선택과 배제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사법기관인 검찰은 법에 따라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하며, 자의적으로 선택과 배제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법에서는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공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검찰은 선택적 수사와 기소, 선택적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청구 등을 통해 권력을 행사해왔다. 이런 점에서도 검찰은 법치주의의 원칙과 거리가 먼 행태를 보여왔다. 검찰의 공정성 없는 독립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위험성은 검찰이 사법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그동안 검찰은 수사와 기소를 통해 행정부의 인사권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장관후보자들에 대해 검증을 명분으로 부당한 뒷조사를 하고 기소를 협박수단으로 이용해왔다. 이것은 ‘사법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는데, 수사나 기소 같은 사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책개입은 인사권 흔들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정책이나 가치의 실현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최근의 원전 정책 관련 검찰 수사를 보면, 사법의 정치화가 시민 다수가 지지한 정부 정책 자체를 뒤흔드는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사법의 정치화’는 사실 검찰에 의해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군사독재정권이나 보수정권의 오랜 관행이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처럼 정치적 탄압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하고 그 법을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덧씌워 이들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법부마저 통제하려고 해왔다. 집권세력에 의해 수행된 사법의 정치화는 법의 외양을 띠고 있어서 상대편의 반발을 ‘법적 정의’라는 명분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오랜 군사독재와 보수세력의 집권 속에서 보수 기득권세력과 결탁해온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의 독점에 기초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조직과 내부자를 보호하는 기득권 조직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주로 보수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사법에 의존한 정치는 검찰과 언론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통해 정치권력을 흔들 수 있는 기관이 되었고, 이제는 인사권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권력기관이 되기에 이르렀다.

 

지금 검찰은 공정성을 위해 검찰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개혁 정권에 대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법의 정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보수정치세력과 보수언론, 재벌을 비롯한 경제적 기득권 집단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다. 검찰이 보수기득권연합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 검찰의 독립성을 앞세운 ‘법치주의’ 주장은 바로 이들 보수기득권 집단의 자기보호와 자기정당화 논리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검찰이 사법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심지어 정치를 억누르려는 행위에 대해 법치주의라는 숭고한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과연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것일까?

 

불공정한 수사권과 기소권의 행사를 통해 정부의 인사권과 정책결정권을 흔들려는 검찰의 정치개입 행위는 법치주의 파괴를 넘어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법에 근거하여 공정하게 행사하여야 할 공공기관인 검찰과 검찰총장이, 국민들이 선택한 정부의 인사와 정책 결정을 뒤흔들려고 하는 것은 국민주권의 민주적 행사를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의회의 집권세력은 국민 다수의 뜻에 따라 검찰개혁을 위한 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실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을 정치권력에 독립적이면서도 공정하게 수사하는 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독립성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검찰을 인권위원회와 같은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기구로 만드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독립성이 독단성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려면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행사가 다양한 시민들의 견제와 감시 하에 놓일 수 있도록 시민참여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공수처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법치주의를 살리고 또 법치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은, 법을 집행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분수를 모르고 시민들을 협박하고 정치에 개입하며 권한을 남용해온 검찰, 조직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보수정치세력, 보수언론, 기득권층과 결탁해온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새로운 법을 통해 시민들의 공정한 감시와 통제 하에 두는 것이다. 나아가 보수정치세력이나 검찰과의 유착이 의심되고 있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개선하기 위해 법관 선거제도 도입을 비롯한 시민참여 확대 방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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