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48] 한국판 뉴딜에서 ‘한국판’을 빼자

한국판 뉴딜에서 ‘한국판’을 빼자

뉴딜에는 ‘담대한 복지 확대’가 담겨야 한다

 

윤홍식 인하대학교 교수

 

오래 전부터 ‘한국판’, ‘한국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헛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외국(구체적으로 서양)의 것을 높이 쳐주는 사대주의 근성이 정신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반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을 찬양하는 뉴스가 넘쳐나고, G7을 대신할 새로운 리더 그룹에 초대를 받으며 명실상부하게 선도국 대열에 동참한 사회에 살면서 아직도 이런 구시대적인 사대주의를 품고 있다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판’, ‘한국적’이라는 것이 더 나은 무엇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항상 본래의 것과 비교해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아니, 본질을 놓치는 것을 넘어, 본질을 왜곡해 본래 하고자 했던 것에 반하는 것으로 나타난 경우도 다반사였다.

 

한국판 뉴딜과 비교하기에는 한참 나아간 것 같지만, 박정희는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포했지만,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한 유신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살시키고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체제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적’을 이야기한 북한의 주체사상도 이런 점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복지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면서 박근혜 정부가 주창한 ‘한국형 복지국가’라는 것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고 가족, 민간, 시장이 복지의 1차적 책임을 지게 하는 비용 절감을 위한 ‘잔여적’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정이 이러니 ‘한국판’, ‘한국적’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은 내 잘못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판 뉴딜이 이전 정부의 ‘한국적’이라는 경로를 뒤따를까 걱정하는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에서 뉴딜의 가치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한국판 뉴딜’의 목적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성장 동력에 발 빠르게 투자해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정부가 신성장동력을 발굴해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산업정책이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판 뉴딜’로 재탄생한 것이다. 필요한 산업정책을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산업정책의 묶음을 ‘한국판 뉴딜’로 포장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히는 것과 같다.

 

1929년 대공황 이후 1930년대를 함께한 루스벨트의 뉴딜은 적어도 세 가지 핵심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추구했다. 1930년대 뉴딜을 시작하기 전 세계는 자유방임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뉴딜은 고삐 풀린 시장을 국가가 나서서 규제하는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판 뉴딜’에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성장이었나. 그래서 더 성장을 하자는 것인가. 명확하다. 우리를 어렵게 한 것은 성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장의 결과를 공정하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판 뉴딜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담아야 하는 이유이다. IMF, OECD, 세계은행, 유럽연합 등도 이미 2010년 초부터 정책기조의 중심을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재정균형을 유지하는 통화정책에서 고용을 보장하고, 소득을 높이는 재정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패러다임 전환이 뉴딜의 핵심이라면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정부가 선언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뉴딜의 두 번째 핵심은 뉴딜이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지할 광범위한 조직된 정치세력과 정치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판 뉴딜’ 어디에도 정치적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내용은 없다. 나를 따르라만 있을 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과 불안정 고용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한국판 뉴딜을 지지하는 정치적 연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한국판 뉴딜에는 그 고민이 없다.

 

마지막으로 위기에 빠진 시민에게 안정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의 보편적 확대가 한국판 뉴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고용안전망 강화’라는 꼭지가 있지만, 누가 보아도 산업정책에 매달려 있는 ‘코사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위기가 단기적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진 지금 시민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 공적 복지의 전면적 확대를 추진해야 하지만, 한국판 뉴딜에는 그런 고민이 담겨있지 않다. 9000억 원으로 ‘전 국민 대상 고용안전망 구축’을 한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역시 ‘한국판 뉴딜’이다.

 

한국판 뉴딜에서 ‘한국판’을 빼자. 그리고 다시 21세기 뉴딜을 계획하자. 이번에는 선성장 후분배라는 패러다임을 제대로 전환하고, 인플레이션 통제와 재정건전성에 목을 매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고용을 창출·유지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이를 지지할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만들어,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한 담대한 복지 확대를 담은 그런 뉴딜을 기획해보자. 역사가 20세기를 ‘루스벨트의 뉴딜’의 시대라고 기록했다면, 21세기는 ‘문재인의 뉴딜’의 시대로 기록하게 하자. 과도한 기대인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국가를 꿈꾸지 않았던가.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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