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호] 권두언_다중적 시민정치와 시민국가의 전망 : 시민의 민족적 지평, 세계시민주의, 그리고 공공영역의 중첩적 진화

2004년 2월 14일 우리 공동편집인들이 이번 5호를 특징지을 선도 개념을 한참 찾고 있을 때 인터넷으로 한 통의 부고가 왔다. 청정(靑丁) 김진균 선생께서 지병인 대장암을 끝내 견디지 못하시고 당신이 든든히 버티어주시던 그 수많은 삶들을 고이 내려놓고는 이제 쉬어야지 하고 허위허위 떠나셨다. 남의 아픔을 아파하시다 병마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인지 남의 아픔인지 구별도 못하셨을까. 아픔이면 다 당신의 아픔인 줄 알고 그 수많은 짐들을 묵묵히 감수해 오셨던 분이었기에 우리의 할 말을 잊게 만든, 짙은 슬픔에 싸인 부고였다.

우리 공동편집인으로서는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지난 『시민과세계』 4호를 위해 우리는 당신께서 병석에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도 가끔은 여상하게 외출을 하신다는 그 정황만 믿고 선생께 조르다시피 옥고를 받았다. ‘민중이 감수하는 과제’라는 무거운 부제가 붙은 『자본과 전쟁 그리고 반전평화운동』은 그래서 당신께서 이 세상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쓰신 유고가 되었다. 생애 마지막 기간에 보시고 이 논고에 적어놓은 것은 선생께서 『군신과 현대 사회』(1996)에서 우려했던 그 군신의 그림자가 이제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라 우리 일상을 옥죄는 족쇄가 되어가고 있다는 아주 음울한 광경이다. 즉 전쟁은 긴 평화 사이에 오는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패권 국가가 자신의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투자를 확대,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전쟁을 체질화시킨 이상 이 지구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비극적 전쟁은 있어야 하고, 그것도 늘상 있어줘야 한다.

“전쟁의 전지구적 일상화”는 그 배후에 자본 투자의 지속적 확대와 언제나 맞물린다. 이렇게 자본 투자와 전쟁을 양손에 쥔 미국이라는 군신에 대해 선생은 민중의 분발을 촉구한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비극적이다. 군신에게 가장 처참하게 삶을 짓밟힐 무리는 우리 사회의 민중일 터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의 만만한 무기구매자 역할을 강요받고, 남한 민중이 피땀흘려 일구어내고 있는 경제적 잉여가 이에 의해 빨려 들어가고 있다. … 동시에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릴 정도로 남한 노동자 민중의 삶은 불안정을 강요받고 있다. …이 모든 희생의 감수를 강요받고 있는 남한 민중과 불안전 노동자는 반전평화운동의 진지이다.” 그렇지만 만년의 선생의 통찰력은 지배 체제의 어둠에만 가있지 않으며, 동시에 이에 맞서 힘차게 성장하는 시민사회운동의 밝은 활력과 가능성에 주목한다. “80년대 이후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남한 민중의 민주화 운동은 다면적인 국가 위기와 민족 위기에 대하여 정면으로 돌파하는 추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다.―한국의 반전 평화 운동은 세기적 사명을 띠고 있다.”

이렇게 선생의 유지에 호응할 ‘민중’이 누구인가? 파행적인 현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파상적으로 밀려오던 제국주의와 분단체제 그리고 개발독재의 억압을 도리어 자기 생성의 토양으로 삼아 시민을 탄생시킨, 이 시대 시민의 모태가 아니었던가? 어느 나라 민주주의든 진정 건실한 민주주의로서 사회적으로 내실화되려면 ‘노동시민’이 국민의 핵심으로 구실했던 것이 아닌가? 노동시민이 민주주의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출발점이자 핵심 세력을 이루면서 분화하는 사회 각 분야에서 대거 시민으로 전화할 인간군이 창출되고 시장과 국가, 그리고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삶을 위한 ‘공공의 연대’가 각종 모양새로 분출한다. 그리고 이 민중을 모태로 하여 ‘일국적 시민사회’를 가꾸고 있는 시민세력이 이제 세계시민을 전망할 수 있는 위치까지 이르렀다.

올 2004년 3월 20일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그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쟁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의 반전 평화운동 단체들은 이 날을 국제 공동 행동의 날로 잡고 동시 다발적으로 대규모 반전 평화시위를 전개한다. 2002년 9ㆍ11 테러를 빌미로 삼아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이 감행한 이라크 침략 전쟁이 탈냉전 시대 미국 일극 패권의 군사주의와 지구적 신자유주의가 결합된 이른바 ‘무장한 세계화’, 위로부터의 권력적 세계화의 추세를 보여 주는 현단계의 집중점이라면, 이에 맞서는 반전 평화 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은 국경을 넘어 성장하는 지구촌 시민 정치와 세계시민 연대, ‘아래로부터의 시민적 세계화’의 집중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국적 범위를 뚫고나온 지구적 규모의 시민정치는 2차 대전이후 최대 규모였던 2003년 2ㆍ15 시위, 시애틀에 이은 칸쿤 WTO총회의 분쇄를 통해 반세계화 세계시민 연대의 뚜렷한 성장과 강인한 투쟁력을 입증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반세계화 운동과 제국의 신질서에 저항하는 반패권 평화운동이 합류하면서 이제 ‘세계시민사회’는 결코 허구만은 아닌 분명한 현장이 되었다. 시대는 영토적 국민 국가의 국경을 넘어 ‘지구적 공공성’, 다시 말해 ‘지구 차원의 공적 업무’(res publica globus) 을 이끌어 내고 이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의 수립과 방법론을 모색할 것을, 그리하여 국경을 넘어선 시민적 진보이념로서 세계시민주의를 모색하라는 강한 압박을 제기한다. 어떤가? 1980년대 전두환 군부파쇼 밑에서 노동대중을 규합하여 민중적 연대를 결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선도했던 선도 세력이 이제 시민적 자각을 더해 뭄바이에 가서 세계사회의 이름으로 미합중국 대통령의 교체를 요구하는 패기가 단순한 치기인가?(조희연)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결코 미합중국을 국가로서 증오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야만으로 퇴행하는 것을 막는 데 절실한 만큼이나 미합중국이 권력만능주의로 타락하지 않도록 돌볼 의무감을 느낀다.

국민의 이름 아래 실은 억압받는 민중으로 살다가 시장과 국가 사이에 형성된 사회를 기반으로 자신의 국민적 정체성을 반성적으로 새롭게 하고, 나아가 그 수많은 장벽으로 갈라진 국민국가들로 이루어진 현재의 세계체제를 관통하여 이렇게 세계사회를 그 이름으로 창출하려고 하는 이 ‘시민’의 실존이 이번 주제기획의 초점이다. 그 의제는 명확하다. 국민 국가와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직시하면서 고수와 해체의 안이한 단순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은 없는가. 민족과 국가의 터전에 굳건히 발을 디디면서 그 폐쇄적 경계를 뚫고 세계시민주의로 전진하는, 다중적(多重的)ㆍ중첩적 시민정치의 길은 없는가. 국민들 사이에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유로 반목과 갈등을 부추기다가 끝내 전쟁으로 서로를 살상하게까지 만드는 이 국민국가들 안에서 시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국민국가(nation-state)의 시민화, 즉 풀뿌리 자치와 공공 영역에 기반을 두는 시민국가(civic state) 및 시민 공화국으로의 전환과 동시에 개별적 다양성과 보편적 연대성의 조화를 지향하는 비판적 세계 시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희망이 다중적인 만큼이나 다중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21세기 제 3의 시민정치의 역사적 기획을 어떻게 모색해야 할 것인가.(이병천)

국경을 넘는 세계시장과 세계시민사회가 출현했다고 해서 국민국가와 국민사회가 종언을 고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세계시장과 세계시민사회가 국민국가, 국민적 자본주의, 국민적 공공영역과 병존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상호의존하며 상호침투하고 있는 것이 현단계의 역사이다. 이런 경합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국민국가를 가르는 안과 밖의 경계는 현저하게 유동화 되었지만 엄연히 실존한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조건 아래서 그 어떤 시민의식이 바로 국가의 범위를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공허할뿐더러 자신의 성장을 채워온 의식의 실체적 내용, 그 삶의 기반과 자양분을 일거에 폐기하는 결과가 되어 무엇보다 취약하다. 도리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민족의 틀 안에서 가꾸어온 주체성을 서로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고, 또 너의 주체성에서 나의 주체성을 풍부하게 할 것을 배워오는 열린 “서로주체성”의 주체의식이 시민적 삶과 시민공동체의 긴 장정에서 일단은 학습해야 할 기본 화두이다.(김상봉)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사이에서 자신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 조상의 나라로부터도,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나라로부터도,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고 비극적 체류자로서 항상 부유(浮遊)하는 삶을 사는 이른바 “재일”(조선인 또는 한국인)의 운명은 이른바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가볍게 배제하고 주변화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경고해 준다.(윤건차)

민족에 대한 요구와 세계시민사회로의 요구가 바로 이 ‘국가’에서 조우하면서 아직은 서로 순탄하게 융화하지 않은 채 서로 별개의 요구들인 양 중첩되는 와중에서, 중국 국가가 추진하는 ‘동북공정’은 우리 시민의식의 성숙함과 강인함을 시험하는 ‘역사’의 문제를 제기한다. 대륙 중국의 영토적 패권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거국적 학술 연구 프로젝트는 그 일차적 공세로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변방사로서 중국사의 일부라는 아주 무지한 성명을 발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주장은 19세기 말 이전 한국 역사 전체가 중국의 속국사라고 하는 대전제를 깔고 있어 이제 극복해 가려는 영토적 정체성 의식의 진전을 한 순간에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비록 경박하다 해도 국사를 해체하자는 포스트모던적 주장까지 나와 국수주의를 이완시키는 판국에, 중국의 ‘국사 공략’은 영토적 한계를 넘어가려는 우리의 시민의식을 여지없이 국가, 그것도 가장 대면하기 싫은 영토와 폐쇄적 주권 문제로 되돌려 세운다. 동시에 그것은 역사와 국경의 제약 없이 미래적으로 동아시아연대를 추구하는 일련의 시도에 패쇄적이고 결국 서로를 죽이게 되는 국민국가적 주권 논리의 장애물을 발목에 거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탈민족 담론의 연장선 위에서 중국이나 일본이 제기하는 동아시아공동체론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문제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발본적 안목을 갖고 이 두 강국의 국가주의적 패권주의에 맞설 새 방도를 창안해야 할 것인가? 국익과 국사의 폐쇄성을 뚫으면서도 그 민족적 정체성을 세계시민적 요구와 조화시킬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의 사상적 내용을 찾기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 과업이다.(정용욱)

이것은 한국 사회가 그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필연적 귀결로서 그 성장 엔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우리보다 산업화 수준이 낮은 국가로부터 저임 노동력을 대량 수입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야 할 압박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고민의 주름살을 더 깊게 만든다. 그것은 흔히 시민권(citizenship)으로 불리는 ‘시민의 시민다움’ 또는 ‘시민성(市民性)’의 여건과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대한민국으로 담보되는 이 시민다움의 조건 속에서 자기 삶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체제상의 포용성과 연관되는데, 이런 점에서 건국 이래 우리 국가는 별로 높은 시민성의 정도를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최현) 이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권 또는 시민다음의 조건 안에서 계급적 이익이라든가 여성의 관심 나아가 심지어는 우리 국가 자체의 이익까지도 얼마나 온당하게 관철되어 나왔던가.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안쓰럽게 들릴 정도로 국민이나 시민의 관심에서 배제된, 그야말로 “계급”이기를 강요당하는 인간군이 ‘국민의 그늘’ 아래 웅숭그리고 있다.(김윤철) 그 그늘에서 아직도 신음하는 대표적인 인간상이 한국 국가의 여성이다. 그 참상은 여전히 이렇게 고발된다. “농촌의 노년여성이 오늘날에도 불완전한 피임시술의 후유증으로 고통 당하는 현실은 여성의 몸이 근대 기획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복지의 상당 부분이 수백만 전업주부의 중노동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정현백) 그리고 나아가 현질서에서는 시민적 자유와 평화가 억압받음은 물론 우리 국가 그 자체도 배제되는 이상한 현실이 벌어진다. 한국은 여전히 제국의 한계선에 갇혀 있는 신민국이다. “현대전쟁은 전쟁터에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전방, 후방을 가리지 않는다.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인의 희생도 뒤따르며 일단 참전하면 후방에 대한 테러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전쟁은 국민의 안위나 국가이익과 직결되므로 국민 모두의 관심사”로서 “정치인과 위정자들끼리만 전쟁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라크전에서 유일하게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 자신은 정작 국익이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익을 취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한국이 오히려 국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최연구)

만약 시민의 맹아가 일국적 범위 안에서 커 나온 민중이고, 그 모태는 국가 안의 사회였다고 한다면, 이제 막 국경선을 넘어설 단계에 있는 각국의 시민들이 얼마나 튼실한 실천적 활동력을 지녔는가 하는 것은 투쟁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반성력과 조직력은 물론, 그 모태 안에서 받은 태교에도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큰 물줄기 안에 단결한 “만국의 자본가들”이 하루 1조 5천억 달러의 자본 교환으로 세계시장을 휩쓰는 상황 아래서 “인간은 사라지고 경쟁력만 남아 있다. 경쟁력은 이 시대의 새로운 신화이다. 이 새로운 신화가 마법의 주술처럼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어떠한 저항도 용납하고 있지 않다. 노동의 요구가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하는 순간 너무나도 쉽게 자본은 그들의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거나 값싼 이민 노동자로 자국 노동자를 대체해버린다. 그리고 세계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자들은 개인주의와 현실 타협의 길을 걷고 있고, 주변부 국가들의 지배 엘리트들은 부패의 길을 걷는다.” 이때 “국가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이자 노동의 보호막”으로 남는다.(이정옥)

따라서 세계 무대의 정치, 세계시민주의가 중요한 만큼이나 국민국가 무대의 정치, 국민적 시민정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시민적 진보의 눈과 행동은 국경의 안과 밖 양쪽 모두에 두어져야 하며, 시민은 민족의 지평을 시야에 두고 세계시민주의로 비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은 그 근본 바탕에서 튼튼한 공공 영역과 풀뿌리 지역 자치, ‘공화국속의 작은 공화국들’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야 한다. 이 모든 의미에서 시민정치의 사고는 ‘지역→국가/민족→지구세계’로 겹겹이 중첩된 경계선이자 시민정치의 다양한 실현 현장들과 투시하고 관통할 수 있도록 “경계관통적인” 입체적 통찰력을 구사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다양한 삶의 현장 안에서 ‘나’-정체성을 실현하면서 경계의 장벽을 돌파하여 민족과 인류를 매개함으로써 국민국가를 시민국가로 전화시키고 나의 조국이 문명에서 야만으로 후퇴하지 않도록 이 ‘나’에게 주어진 국가의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국민국가적 부정성과 투쟁하는 바로 그 앙가주망[投身性]을 통해 시민으로서 ‘나’는 이 국가에 애국한다.(홍윤기)

이렇게 국민국가를 시민국가로 전화시키면서 세계사회를 전망하는 ‘시민’의 입각점을 갖고 과연 현재 이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건강 상태를 자문해 보면 미래 전망의 낙관스러움 만큼이나 현실 비관의 강도도 높아진다. 1997 년 IMF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코드는 크게 변화하였다. 이는 국내외 학계와 시민사회운동권 전반에 걸쳐 위기, 전환기 경제의 구조와 성격, 그리고 대안 등과 관련하여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정식화된 논의와 중간 교통 정리는 한참 뒤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 개혁논쟁’이라는 새 세션을 설정하여 김상조, 장하준 두 분께 특별히 원고를 청탁해 받았다. 이 세션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며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린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개발독재 시대의 강력한 유산이면서 국민총생산의 압도적 부분을 담당하는 재벌에 대해 확정된 태도를 갖지 못한다. 재벌에게 과연 “민족경제의 담당자” 역할을 여전히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재벌의 도덕적 해이와 엄청난 비리를 외면하는 퇴행적 처사가 되지 않을까.(김상조) 아니면 재벌 체제를 국민적 성과물로 인식하면서 그 기반에 의거하여 우리 국가와 사회가 세계화 시대의 민족경제를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야 할 것인가?(장하준) 앞의 견해가 공정 경쟁 시장 규칙의 정립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면서 재벌 개혁을 추구하는 하나의 관점을 보여 준다면, 나중 견해는 금융 자유화와 자유금융시장의 파괴적 충격을 우려하면서 재벌을 기반으로 국민 경제 성장 모델의 재구축을 추구하는 하나의 관점을 보여 준다.

나아가 우리 국가는 합법적으로 독점한 공적 권력과 및 공무원 조직과 아울러 국가 권력의 가장 안정된 기반이 되어 있는 재정을 통해 국민에게 얼마나 그 삶의 안정과 발전을 보장해 주고 있는가? ‘돈으로 읽는 국가의지’에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 국가가 시민적 방향으로 돈을 걷고 쓰는 데 여전히 낙후한, 마치 조공조(租貢調) 시기와 다름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적 원칙은 정치권력의 민주적 견제 및 발휘와 아울러 재정 민주주의를 통해 비로소 내실화된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재정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그 편성과 용도에 관여하는 권리를 재정권이라고 부르며 이는 민주화의 역사적 과정에 의해 확립된다. 재정개혁은 재정권의 확립에서 출발한다. 그 요체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내용을 국민이 알기 쉽게 작성하여 공개하는 것이다.”(이재은) 재정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참여권에 상응하는 재정 예산 및 집행에의 참여권을 보장하는 것이다.(오관영) 그런데 재정 문제까지 그 의식이 성숙한 시민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완전포괄주의 도입과 보유세 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법인세 인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현재의 조세체계는 정치권력을 제약받긴 하지만 “조세의 대원칙을 엉클어뜨리는 이해당사자들”로 이루어진 기득권 세력들이 사실상의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계급ㆍ계층 지형도이자, 불평등 지형도”이기도 하다.(이문영)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민의 자기 비전이다. 국가영역을 개혁하려는 시민적 의지가 약간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민 사회영역에서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들을 작아 보이지만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을 늘 주시한다. “단순히 시설물 건립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생활 속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평화운동으로서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을 제안한다. 그것은 학교, 도서관, 지역시민단체, 동사무소, 카페 등 생활 공간에서부터 평화의 기록과 기억들을 소중하게 보관ㆍ전시하며 소통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작은 평화박물관’을 추진하고 이런 생활 속의 평화박물관들을 네트워킹 하는 일이다.”(이수효) 그리고 “지난 10여년간 안티조선운동으로부터 시작한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언론개혁운동은 주류보수언론의 입지에 균열을 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주류보수 신문사가 시장의 75% 안팎을 점유”한 상태에서 “다수 국민은 언론개혁이 필요하다고 동의하는 ‘기묘한 모순’”은 “기술혁신과 인터넷의 빠른 확산이 약속하고 있는” 사이버공간을 통해 “논쟁적 이슈에 대한 대안적 목소리를 내면서 일반 공중의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킴으로써 한국의 미디어지형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고, 보수 신문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유선영) 그리고 국가기관을 포함해 국내에서는 누구도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그리고 최근에는 주주 총회에서 소액 주주에 폭행까지 감행한―삼성재벌을 상대로 하여, “참여연대는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일정한 가능성으로 존재한 정치적ㆍ법률적ㆍ담론적 기회구조 내에서, 새롭고 다양한 전략과 전술들을 구사하면서 ‘역동적 다툼’을 지속”한 결과, 약 1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수백억원대의 증여세 과세결정이라는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곧 사회운동이 자신이 목표한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기회구조’와 그것을 충분히 활용할 적절한 역량만 확보하면 대중적 지지와 성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술적 원칙을 입증한다.(홍일표) 이런 상태에서 어느 면에서 한국 국가만큼이나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시민운동이 지역권력을 상대로 전개될 때 지역 토호들의 기득권 앞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드러내면서도 “지역사회 개혁세력의 창고 역할”을 해 온 지역 현장 시민운동의 역사는 ‘이른바 중앙’에 있는 우리들의 안이함을 질타하는 듯해 절로 머리를 숙이게 만든다.(금홍섭) 지역 문제 못지않게 시민의 생활에서 남다른 눈길을 주어야 하는 것은 현대 생활에서 그 영향력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과학기술 분야이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특정 전문가의 영역이며 국가경쟁력을 기반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보기술이나 유전자공학 등과 같은 분야는 과거 공장제 산업체제에서 공학이 했던 이상의 압박을 우리 생활에 가하고 있다. 그 연구와 개발을 위한 재원조달부터 그 결과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 문제는 이제 특정 전문가나 기업체가 단독으로 수행할 수 없는 공공성을 띠게 되었다. 이제 과학기술을 “민주적 공치, 즉 거버넌스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해하며, 또한 그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는 것”이 단순한 예언자적 경고는 아니게 되었다. 특히 기술혁신류의 과학기술정책만에만 편중되어 있는 과학기술(정책)계에는 그렇다고 생각되며 시민사회 역시, 과학기술의 문제를 예외적 영역으로 제쳐두어서는 안 된다.(한재각)

반년의 역사를 중기 단위로 조망한다는 우리 잡지의 취지가 얼마나 제대로 살려지는지 항상 불안한 가운데 우리 사회의 숨가쁜 행보를 조금은 초월적인 이론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아주 고전적인 두 논의를 초청하였다. 사회철학에서 시민사회 담론을 가장 먼저 의식적으로 전개했던 이론가가 헤겔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의 시민사회 논의는 실은 “연대적 개인의 육성과 조직화”를 “시민사회와는 분리된 정치적 국가에 위임”했다는 것이 간파된다. 바로 이렇게 국가에 양도되었던 그 업무들이 다시 “시민사회 내로, 그것도 그 경제적 차원으로까지 끌어내려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시민사회는 “이기성과 제한성을 탈피해 보편적 공공성을 자율적으로 형성”할 수 있었다는 통찰은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김준수)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시민사회 안에 “여성은 아직도 시민권자가 아니다”라는 원론적 차원의 항의가 제기되는 것은 충격적이다. 여성은 남성에 의존하는 존재로서 독립된 인격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사회적인 공적 지위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가족계획 등을 통한 국가적 통제 때문에 출산과 재생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계속 조명을 받아야 할 의제이다.(오장미경) 유교적ㆍ가부장적 억압의 유제, 종법 인륜의 사슬이 유별나게 드센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우리가 이렇게 안에서 이 사회와 국가의 문명화를 위해 진력하는데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 국경을 넘어 시장의 세계화를 도모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제 국가 전체를 통째로 신자유주의 구도에 맞는 국체로 개조하겠다는 이른바 ‘규율적 신자유주의’와 ‘신입헌주의’의 정치적 구상이 국제자본의 중심부에서 기획되고 있다는 보고(스티븐 길)는 세계시민사회를 기반으로 다중심적 ‘지구공화국’을 열망하는 시민이 대결할 또 다른 전선을 보게 한다. 그렇지만 냉전 이후 오늘의 세계는 현실뿐만 아니라 이론 또한 도전이다. 탈제국주의, 탈국민국가 탈중심적인 제국주권의 신시대가 도래했다는 네그리ㆍ하트의 화살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제국’론 이후 우리 시대 ‘역사적 제국주의’론을 구성하는 수고로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된 중차대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론적 과제는 제국주의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막상 이 잡지의 본령이기도 한 시민사회론의 비판적 재구성 또한 큰 과제로 제기된다. 우선 먼저 시민사회 연구는 흔히 보는 NGO의 현상 기술을 넘어서 시민사회 담론의 정치과정 분석으로 가야 한다.(정태석)

이같이 어둠과 밝음이 다중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나라 안팎의 정황 속에서, 우리 국가와 시민은 어디를 언덕으로 삼아 앞으로의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인가? ‘차떼기’ 방식의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탄로난 제도 정치권의 부패 비리상은 국민들의 격심한 분노와 지탄과 분노를 일으켰고, 비리혐의 의원에 대한 국회의 체포동의안 부결 처리를 보면서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치권을 ‘도둑놈 소굴’과 다름없는 곳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부패비리 정치인들의 실상이 폭로되고 단죄되는 과정에 궁극적으로는 국가정치와 아울러 시민정치에도 결코 달갑지 않을 권력행태가 다음 검증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다음 시기 우리 사회의 역사적 진행을 염두에 두고 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제도정치판의 개조 작업은 정치적 대안세력과 시민의 능동적 이니셔티브보다는 ‘검찰권력’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런 광경은 우리 정치사회가 아직도 자신들이 입법해 놓은 실정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퇴행집단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검찰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실정법 테두리를 넘지 못하며, 대한민국 현행 실정법 체계는 그 자체가 탈분단, 탈권위, 개혁 시민국가를 지향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어떤 법체계에서도 검찰은 정치를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검찰은 정치개혁을 촉발시키는 법적 단서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결코 정치개혁의 주체는 아니다. 검찰권에 극도로 의존해 기존 부패 정치인들을 대거 추방하고서도 정치개혁을 하지 못해 결국 금권정치인에게 국가 통치권이 넘어가 있는 이탈리아의 상황은 우리가 지금부터 아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반면교사의 거울이 된다.

지금은 제도정치 개혁과 관련하여 높은 지지를 받지만 우리는 불과 석달 전만 해도 우리의 검찰 권력이 얼마나 시대 착오적인 냉전적 행태와 사고의 포로가 되어 있는지를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잊었는가? 송두율 선생 사건 말이다. 선생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땅의 검찰 공안부는 고향이라고 지친 노구를 이끌고 그 긴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자 이 땅에 돌아온 송두율 선생을, 단지 보안법으로만 가둔 것이 아니라, 그가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 국가가 막 떠나고 있는 바로 그 반헌법적 반공이데올로기로 “전향”하라고, 철저하게 정신파괴를 기도한 그런 야만을 자행하였다. 여전히 오늘 우리는 궁핍한 냉전 반공 안보국가에 살고 있으며, 탈냉전적 개혁 시민 평화국가로의 전환은 국민적 시민 정치가 떠맡아야 할 시대적 책무다.

이병천, 홍윤기 /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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