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13] 관제 민족주의? 반일 종족주의?

관제 민족주의? 반일 종족주의?

‘반아베 운동’의 지향점은 민주공화주의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한일 간의 갈등이 연일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일본이 왜 저런 무모한 도발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 어떠해야 마땅한지에 이르기까지 온통 이 문제가 공론장을 달구고 있다. 마침 광복절도 맞았다. 이 와중에 너무 감성에만 치우쳐 문제를 그르치지 말고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아는 이성의 회복을 주문하는 제법 근엄한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놀랍게도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가리지 않는다. 모두 한 가지, 곧 민족주의가 문제란다. 누구는 ‘관제 민족주의'(홍세화)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반일 종족주의'(이영훈)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족주의적 지향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일본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고, 그래서 결국 이 사달이 났단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진 상황에서도 ‘친일파 척결’이니 ‘극일’이니 어쩌니 하며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여 실정을 덮고 다가오는 총선에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포퓰리즘을 획책하고 있단다. 

 

내가 생각해도 일부 정치인들이 무슨 정치적 이득을 노린 것인지 어설픈 선동을 하고 나서는 모습은 참으로 어리석고 추해 보인다. 누구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반일 배너를 내걸겠다고 하질 않나 또 누구는 오히려 장려해야 할 민간의 한일 교류마저 아예 막겠다고 하질 않나,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고 부화뇌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민들은 정치인들의 그 ‘전도된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훨씬 냉철하고 이성적이다. 초점은 ‘반(反)아베’이지 맹목적인 ‘반일’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아베가 보이는 부당한 ‘갑질’에 분노하기는 해도, 일본과 일본인을 도매금으로 악마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일본의 시민사회와 협력해서 아베와 맞서자는 목소리도 드높다. 이건 어떤 민족주의적 감성이 아니라, 가령 좋아하는 일본 상품의 소비나 일본 문화 즐기기를 중단하더라도 아베의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소소하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겠다는 ‘민주적 시민성’의 발로일 뿐이다. 가끔 지나친 ‘혐일’ 경향도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이지 지금 형성된 대중적 반아베 운동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여기서도 문제가 단순히 민족주의가 아님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보다 더 저급하다는 무슨 종족주의는 더 더욱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베의 도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된 이 싸움의 초점을 충분히 분명히 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종족으로서의 민족과 시민으로서의 민족

 

확실히 민족주의가 낡고 위험한 이데올로기인 것은 맞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다양성을 억누를 수 있는 위험한 불쏘시개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방어적 민족주의’라고 해서 그 본질적 위험성이 제거될 리가 없다. 종족적 동질성에서 출발하는 집합적 주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식으로든 전체주의로 가는 문을 열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강력한 염원이나 반아베 투쟁을 이런 민족주의라는 코드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때문에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말하자면 ‘종족으로서의 민족’과 ‘시민으로서의 민족’이 착종된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서는 다른 중요한 역사적 초점이 함께 있었음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그런 식의 접근은 서구적 민족주의 개념을 우리의 경험에 무비판적으로 투영하려는 서구중심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나치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에서 보았던 민족주의는 확실히 근대 국가가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가운데 관 주도로 만들어 냈던 국가의 발명품이었다. 그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였다. 그러나 우리 민주주의의 결정적 기원인 3.1 운동에서 출현했던 민족은 정반대로 기존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국가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국가를 만드는 주체로 규정했던 아래로부터의 운동, 즉 혁명적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곧 우리에게 민족의 형성 과정은 한 편으로는 조선 왕조와 단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거부하는 혁명적 민주주의”(같은 곳)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록 임시정부의 모습이긴 했으나,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적 민족주의의 참된 핵심은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였다. 또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민족의 형성과정은 또한 동시에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의 형성과정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우리 민족 형성의 근거였고 독립의 정당성의 토대였으며, 민족주의 현상의 참된 초점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무엇보다도 한반도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집단적-민주적 주권성을 부정했기에 극복해야 할 구조적 악이었다. 조야한 실증주의와 천박한 경제주의에 빠진 이영훈 류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설사 식민 지배가 이 땅에 경제 성장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더라도,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거대한 역사적 범죄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싸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 우리는 그냥 무슨 알량한 민족적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식민주의에 맞서 우리의 존엄과 자유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토대인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건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주공화주의다. 아베의 식민주의에 맞서 다시 한 번 헌법 제1조를 외치는 또 하나의 촛불이다. 

 

촛불혁명으로 위기에 빠졌던 민주주의를 구해 낸 우리 시민들과 정부는 이제, 좀 더 성숙한 민주공화국의 건설로 저 무도한 아베의 식민주의적 도발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특히 민주당과 정부는 조심해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의 유불리나 따지면서 현 상황을 촛불 시민들의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외면할 핑계거리로만 삼는다면, 우리는 이 싸움을 결코 승리로 이끌 수 없을 터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야말로 우리의 진짜 무기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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