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2-11   1631

페미니즘과 과학기술, 그 실천적 관계설정을 위해

마거릿 버트하임, 최애리 옮김, 『피타고라스의 바지』 (사이언스북스, 1997).

오조영란·홍성욱 엮음,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창작과비평사, 1999).

주디 와츠맨, 조주현 옮김, 『페미니즘과 기술』 (당대, 2001).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한국에서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라는 주제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이 주제를 다룬 두 편의 리뷰 논문1)이 처음 선을 보였던 1996년경이었다. 한국 여성기술과학자들의 현실에 대해 관심이 커지면서 이를 반영해 ‘여성과학기술인력 활용방안’을 다룬 일련의 정책연구들이 수행되었던 것 역시 그 때쯤이었다. 서구의 경우 여성의 과학계 참여 문제가 1960년대 초반부터 이미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졌고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에 관한 이론적 논의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활발해졌음을 감안한다면, 이 주제에 대한 한국에서의 이론과 실천은 상당히 뒤늦게 시작된 편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이 중에서 여성의 과학계 참여와 여성과학기술자에 대한 지원은 1990년대 말부터 일정한 제도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반면, 서구의 이론적 흐름의 소개나 독자적인 연구성과의 축적은 연구자 층이 워낙 엷은 탓에 이후에도 크게 진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난 7-8년 동안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 상당히 높아진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를 반영해 상당수의 논문과 단행본들이 새로 나왔다.2) 이 글에서는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를 국내에 알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권의 책들 ― 『피타고라스의 바지』,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페미니즘과 기술』 ― 에 대해 간략히 다루어 볼까 한다.

먼저 이 주제를 다룬 단행본들 중 국내에서 상당히 일찍 출간된 편에 속하는 『피타고라스의 바지』를 보자. 이 책은 기본적으로 물리과학 분야에 초점을 맞춘 과학사 서적의 외양을 띠고 있다. 저자인 버트하임은 300면이 채 안되는 지면 속에 고대부터 20세기까지의 물리과학사를 솜씨좋게 우겨넣으면서 그와 나란히 과학에서의 여성 배제(와 소수 여성들의 분투)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그녀의 서술은 과학사 쪽의 배경지식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고 흥미롭다(다소 고어체 투가 나긴 하지만 번역도 아주 매끄럽게 잘 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아인슈타인과 같은 ‘교과서적’ 인물들뿐 아니라, 히파티아, 마리아 빙켈만, 마거릿 캐번디시, 에밀리 뒤 샤틀레, 라우라 바시, 에미 뇌터, 리제 마이트너 등과 같이 일반적인 서양과학사 책에서 흔히 접해볼 수 없는 여성 과학자들까지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남성중심적 학문세계 내에서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분투했으나 자신의 기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최근까지 역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책에서, 중세에 나타난 성당 학교와 대학, 16-17세기 과학혁명기에 생겨난 과학협회 같은 제도적 형태들이 단지 학문 중흥에 기여하고 과학자들간의 토론의 장을 제공했던 곳이 아니라 학문 일반으로부터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었음도 알게 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바지』는 과학계의 여성차별을 폭로하고 그간 가려져 있었던 여성과학자들의 기여를 복원시키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물리과학에서의 여성 배제의 역사를 물리과학이 역사적으로 신성(神性) 혹은 초월성을 추구해 왔다는 점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책의 원래 부제는 ‘신, 물리학, 그리고 젠더 전쟁’이다). 버트하임은 이러한 물리학의 종교적 기원을 수학, 남성성, 영혼의 초월성을 서로 연결시켜 사고했던 피타고라스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중세 이후의 대학이나 과학혁명기의 과학협회에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는 그것이 남성중심적인 (유사)종교적 공동체였기 때문이며, 여기서 물리과학의 소명은 수학의 언어를 써서 ‘신에게 이르는’(혹은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리학자가 초월성을 추구하는 의사(擬似)사제로 자처하는 이런 경향은 19세기의 산업화와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다소 수그러들었다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부활했고, 이는 오늘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TOE)’을 통해 ‘신의 마음’을 읽어내고자 하는 고에너지물리학자들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버트하임이 지금껏 하늘만을 쳐다보며 달려온 물리학의 방향 선회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수십 수백억 달러가 드는 입자가속기의 건설 ― 단지 ‘신 입자(God particle)’를 발견하기 위한 ― 을 그만두고 물리학이 좀더 ‘실제적’인 목표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물리학 분야에 여성들이 대등하게 참여하는 것이 이런 방향 선회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데, 그 이유로 “여성들이 이런 종류의 초월을 추구하게끔 문화적으로 길들여져 있지 않”음을 들고 있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 그녀는 물리학에서의 여성 참여를 늘릴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마지막 장에서 다룬 후 책을 맺는다.

필자는 버트하임의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초월성, 기독교, 수학의 언어, 물리과학의 역사를 서로 엮으면서 논지를 실천적인 방향으로까지 확장시킨 그녀의 솜씨는 실로 교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리학의 발전 방향에 대한 그녀의 제언에 대해서도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러 평자들이 이미 잘 지적했듯이,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버트하임이 가진 생각은 지나치게 소박하고 낙관적인 듯하다. 어찌보면 지난 20여년 동안 ‘페미니즘과 과학기술’ 연구에서 줄곧 해왔던 얘기가 바로 ‘과학계에 단지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 아니었던가. 버트하임의 ‘용감무쌍한’ 견해는 분명 경청해 볼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좀더 정교한 이론적 논의와 실천 전략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버트하임의 책이 과학사를 통사적으로 다루면서 그 속에 자신의 주장을 녹여넣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반면, 이제 다룰 두 권의 책들은 관련 논의들을 종합해 이후의 논의와 실천을 위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리뷰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우선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는 여기 소개하는 책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국내 필진들이 집필해 엮은 편저서이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1, 2부는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의료의 관계에 대해 기존의 연구들을 정리하고 있다. 각각의 글들은 이론적 흐름을 제시한 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드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2부에 포함된 네 개의 글들(번역글 하나를 포함해서)은 다루는 범위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데, 기술과 의료에 관한 글이 포괄적인 리뷰에 해당한다면 과학에 관한 글들은 주로 ‘성 과학’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대안적인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빠져 있다. 이는 후자의 경우 이미 발표된 다른 글을 참조할 수 있고 새로운 필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는 점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3) 이어 3부와 4부는 여성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부분으로, 3부에서는 서양과학사 속의 여성과 한국 여성 과학기술자들의 현실과 과제에 대해 다루고 있고 4부는 부록으로 모두 14명의 여성과학자들에 대한 짧은 전기를 싣고 있다. 여러 필자들의 글을 엮은 책인만큼 책 전체로 보면 아무래도 짜임새가 다소 떨어지지만, 각각의 글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해당 주제에 대한 입문격의 글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반면 『페미니즘과 기술』은 호주의 STS학자인 주디 와츠맨이 쓴 책 Feminism Confronts Technology를 옮긴 번역서다. 이 책은 앞서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에서 ‘여성과 기술’을 다루고 있는 글을 훨씬 자세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해 놓은 책이라고 보면 딱 맞다. 와츠맨은 책의 1장에서 과학과 기술에서의 페미니스트 비판의 이론적 흐름을 개관한 후, 남은 장들을 세부 주제별로 나누어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정리해 나간다. 세부 주제들에는 생산기술, 재생산기술, 가사기술, 건축기술, 남성문화로서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각각은 197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과 기술 연구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자리잡은 것들이다. 상이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일관된 문제의식 하에 묶어 내는 와츠맨의 탁월한 솜씨가 드러난 이 책은 관련 교과목에서 교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실제로도 영미권 대학에서 교재로 많이 쓰이고 있다. 다만 원저가 1991년에 출간되어 한국어판 출간의 시점과 10년의 간극이 있기 때문에 그간의 연구성과는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데, 이는 와츠맨이 2000년에 발표한 보론격의 글을 같이 읽으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4)

이 두 권의 책은 대체로 보아 과학·기술·의료에 대한 구성주의적 입장을 근저에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책의 공통 관심사인 기술을 예로 들면, 저자들은 기술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여성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식의 낙관적 입장과 남성중심적인 기술체계 속에서 여성을 일방적인 희생자로 보는 비관적 입장을 모두 배격한다. 그들은 다양한 기술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은 그 ‘본성’에 있어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지도, 해방적이지도 않”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피임약이나 시험관아기와 같은 생식기술들이 여성들의 건강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남성 의사들의 ‘음모’라거나 하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며 이런 기술이 여성들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술이 젠더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실체라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성원들의 노력과 특정 시기의 사회경제적 역관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저자들은 기술-젠더 관계의 반대쪽 대립항인 젠더에 대해서도 구성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는데, 여성 모두(혹은 남성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본질적 속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흔히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들(보살핌, 공감, 사랑 등)에 방점을 두는 에코페미니즘적 접근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하겠다.

두 책이 공유한 이러한 기본 입장은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나 무차별적 반대를 넘어서 이를 좀더 여성친화적인 ― 그러나 반드시 ‘여성적’인 가치를 담는 것은 아닌 ― 방향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흔히 구성주의적 STS연구들이 종종 직면하곤 했던 비판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저자들도 곳곳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과학기술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단지 밝혀주는 것만으로는 앞으로의 과학기술이 어떠해야 하며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본성’을 부정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긍정 및 부정의 양 측면을 고루 조명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급박한 개입 ― 종종 전면적인 반대를 의미할 수도 있는 ― 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 대해 실천적으로 ‘한가한’ 태도를 견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5)

예컨대 시험관아기 기술에 대해 현재의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만약 당장 내가 불임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이라면 이 기술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해당 개개인의 몫일 뿐인가, 아니면 사회 구조적인 측면의 고려와 대응이 필요한 문제인가? 시험관아기 기술이 여성의 몸에 가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고 이를 좀더 여성친화적인 기술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시험관아기 기술을 그렇게 변모시키는 것이 대체 가능하긴 한 일인가?… 사람들이 정작 알고 싶어하는 문제는 이런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 두 권의 책 속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6) 하긴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이론과 실천이 태동한 지 얼마 안되는 상황에서 ― 더구나 한국에서는 아직 관련 실태파악조차 미비한 실정인데 ― 몇 가지 시론적 연구들을 놓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페미니스트 과학학자들, 여성단체, 소비자단체, 과학기술운동단체, 의사집단, 그리고 일반시민까지 포함하는 숙의의 장에서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것은 아직 요원해 보이니, 당장은 그런 의문들을 숙제로 남긴 채 실천지향적 연구와 시범적 실천의 조직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 권의 책들은 모두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에 관한 한국에서의 논의와 실천에 긴요하게 쓰일 수 있는 책들이다. 버트하임의 책은 과학사 관련과목의 보조교재로 쓰기에 손색이 없고, 특히 왜 여성의 과학참여가 증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과감한’ 주장을 펴고 있어 흥미롭다. 오조영란·홍성욱의 책과 와츠맨의 책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페미니즘과 과학기술 관련 연구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정리하고 추후의 연구와 실천을 위한 바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특히 전자는 한국의 현실에 천착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귀감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성과들, 그리고 최근 소개되고 있는 외국의 페미니스트 STS학자들의 저작들7)이 바탕이 되어 앞으로 논의와 실천의 전진이 가속화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각주

1) 조영란, 「서양 근대과학사에서의 ‘여성’」, ≪과학사상≫ 1996년 봄호, 111-120; 김미경, 「‘평등한’ 과학을 향한 페미니즘」, ≪창작과비평≫ 1996년 겨울호, 168-192

2) 한국여성연구회에서 발간하는 반연간(2000년까지는 연간이었음) ≪여성과사회≫에는 1997년 이후 거의 매 호마다 ‘페미니즘과 과학기술’ 관련 서적들에 대한 주제서평이나 시평이 실리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3) 김미경, 위의 글; 이영희, 「과학기술과 여성」, 『과학기술의 사회학』(한울, 2000), pp. 108-132를 보면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다양한 입장들이 개관되어 있다. 필자 선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p. 7을 볼 것.

4) 원래 Social Studies of Science 30:3 (July 2000)에 실렸던 이 글은 ≪시민과학≫에 번역 수록된 바 있다. 주디 와츠맨, 「젠더와 기술 연구에 대한 성찰」, ≪시민과학≫ 23호 (2000. 12), 21-35.

5) 이런 맥락에서 ≪시민과학≫에 수록되었던 엘렌 발카의 짧은 에세이에 주목해 볼 만하다. 이 글에서 그녀는 정보기술과 인터넷에 대한 페미니즘적 대응이 1980년대에 가졌던 비판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데 대해 개탄하고 있다. 엘렌 발카, 「페미니스트 기술 비평가는 도대체 모두 어디로 가고 없는가」, ≪시민과학≫ 23호 (2000. 12), 35-38.

6) 어떻게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버트하임류의 소박한 입장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얘기해 줄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는 가사기술에 대한 루쓰 코완의 입장을 들 수 있다. 루쓰 코완, 김성희 외 옮김, 『과학기술과 가사노동』(학지사, 1997). 아울러 서소영, 「여성과 과학기술의 역사」, ≪여성과사회≫ 9호(1998), 272-281도 참고하라.7) 샌드라 하딩, 이재경·박혜경 옮김, 『페미니즘과 과학』(이대출판부, 2002); 다나 해러웨이, 민경숙 옮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 그리고 조금 오래되었지만 이블린 폭스 켈러, 『과학과 젠더』(동문선, 1996)도 참고하라.

김명진 | 시민과학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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