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1)

[번역, 정리] 심용석 | 시민과학센터 회원

서론

산업 세계에서 진보된(advanced) 기술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에서의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문제는 제3세계로 도입된 기술의 적절함(appropriateness)을 명백히 의심하게 만

든다. 제3세계 지배층, 관료 그리고 엘리트들에게로의 부의 집중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계속된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빈곤, 실업, 불평등 그리고 생필품의 문제는 제3세계에서 말 그대로

삶 자체이다. 제3세계에서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는 성장과 기술적 단일문화(monoculture)를 강조하지 않는 발전 경로를 고안할 것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러한 발전 패러다임에 적합한 적정기술은 중간(intermediate), 점진적, 대안적, 자본-집약적이지 않는(light-capital), 노동-집약적, 토종적, 적정, 저-비용, 공동체, 부드러운, 급진적, 해방적 그리고 우호적 기술과 같은 용어 모두와 연결되는 관점을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문의 목적은 제3세계에서 사회적, 경제적 발전과 연루된 적정기술에 관해 토의하는 것이다.

몇 가지 쟁점들

산업 사회에서 제3세계로의 자본 축적과 기술 이전에 의한 산업화는 몇몇 계층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추구되었다. 즉, 수십년 동안 제3세계 국가에서는 진보된 기술과 대규모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생산 방식이 도입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러한 전략은 자본이 부족하고 노동이 풍부한 나라에서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체택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제3세계 국가는 증가하는 생산 수단에 비해 노동력은 거의 활용하지 못했고 이로써,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몇몇 일자리만을 창출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 높은 생산성을 지닌―즉, 경제가 더욱 과밀해진― 고립된 작은 섬들만이 주변부는 무시하거나 희생시키면서, 핵심적 도시의 중심부로 출현하였다. 그 결과 이중적 경제체계(번창하는 근대적 부문(sector)과 가난에 찌든 전통적인 부문으로 구성된)가 창조되었고, 실업률을 악화시켰으며 절망적인 가난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제3세계 주요도시만의 성장 패턴의 효과는 이중적 경제체계의 발전이다. 이는 무엇보다,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비난받아왔다. 농촌-도시 이주는 농촌 지역의 경제에 대한 위협이며 동시에, 폭발하는 도시의 인구에 대처해야 하는 근대적 영역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이에 대해, 슈마허(1973)는 이러한 기술이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 그가 ‘서로 파괴하는 과정(process of mutual poisoning)’이라고 부른 것을 발생시킨다고 비난했다. 즉,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진보된, 자본-집약적인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농촌과 도시의] 관계가 상호 파괴적인 관계로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발전 접근으로서의 적정기술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문제들 특히, 농촌과 도시의 영역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스튜어트(1985)는 아래의 구문에서 드러나는 관점으로 적정기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적정기술이 주장하는 바는 일자리를 생산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늘리면서도 생산을 제고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은 진보된 기술적 영역

외부에서 생산성과 소득을 높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발전의 혜택을 확장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다. (p. 28)

발전 경로

마오저뚱의 통치 기간 동안에 중국 공산주의자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 적정기술로 관심을 돌렸다. 문화 혁명 당시, 중국의 개발 정책은 ‘두 발로 걷기(walking on two legs)’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는 중국에서의 전국적인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대규모와 소규모의 일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적 이원주의(dualism)를 격려한 것이다(Pacey, 1990; Riskin, 1979). 즉, 도시 지역은 대규모 건설과 자본-집약적인 공장에 초점을 맞춘 반면, 농촌 지역은 적정기술에 기반한 소규모 산업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의 특이성은 생산의 탈중심화, 국가의 스스로의 주도, 자립성의 추구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두 발로 걷기’와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기'(Dunn, 1978, Jequier, 1976) 이전의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은 1930년대 이전부터 인도의 촌락 산업(village industry)에 오랫동안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도의 적정기술 선구자는 비폭력저항을 옹호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실제로, 적정기술에 관한 많은 저술가들은 간디 이후에 적정기술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에 관해 지적하면서, 그를 적정기술의 ‘아버지’로 혹은 ‘최초의 적정기술론자’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Betz, McGowan, & Wigand, 1984: Rybczynski, 1980). 리프진스키가(1980) 지적한대로, ‘중국의 마오저뚱 이전에, 농부가 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기초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간디다'(p. 37). 간디의 관점에서 볼 때, 상품에 중점을 두면 대량생산(mass production)이 필요하지만, 사람에 중점을 두면 대중에 의한 생산(production by the masses)이 필요하다.

하지만, 간디가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산업을 거부하는데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간디의 관점에서 근대적-부문의 산업 발전은 시골지방의 소규모 산업과 농경을 보충하고 강화해야만 했다. 간디는 인도 대륙에 적합한 발전 경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말로 전기, 조선술, 철강, 기계-제작 그리고 촌락의 수공업과 나란히 존재하는 것들을 염두하고 있다. 그러나 의존하는 질서가 바뀔 것이다. 지금까지 산업화는 촌락과 촌락의 기술을 파괴하는

식으로 설계되었다. 미래의 국가에서, 촌락과 그들의 기술은 유용하게 될 것이다…(Bhatt, 1980, p. 172)

간디의 철학을 공유한 비-인도인 중 저명한 사람으로는 후에 적정 기술을 세계에 대중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가 있다.

간디에서 슈마허에 이르기까지

적정기술 운동에 존경받는 선구자가 되기 이전에, 슈마허는 확고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20년 이상 영국 국립 석탄국(British National Coal Board, NCB)에서 선임 경제학자와 경제 자문가를 겸임하였고, 다양한 영국의 기관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Kaplinsky, 1990, Schumacher, 1974; Willoughby, 1990). 하지만, NCB의 피고용인으로서의 그의 경험은 대규모 조직에 대한 지지를 다시 고려하게끔 하였다.

진폐증에 대하여 탄광에서 기인한 자명한 질병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NCB는 완고하게 자신을 방어하면서 기술적인 세부사항들을 놓고 법정투쟁을 벌이는 길을 택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비교적 작은 양의 보상금(2~3백만 파운드)을 아끼기 위해 이런 대응마저 불사하 것을 보며, 슈마허는 NCB가 스스로 사람들의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조직이 되었다고 여겼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그러한 태도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 규모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Kaplinsky, 1990, p. 137)

슈마허의 새로운 철학은 UN의 후원아래에서 경제 자문가로써 일했던, 1955년 미얀마(Burma)로의 여행에서 더욱 발전하였다(Crittenden, 1975; Rybczynski, 1980; Schumacher, 1974; Willoughby, 1990). 슈마허는 미얀마인들이 서구적 관점에서는 빈곤이나 다름없는 매우 낮은 소득만으로 그들의 일상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영위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 놀랐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슈마허는 ‘경제학의 문제들은 고정된 해결책을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문제들이고 따라서, 오직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환경 내에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Cornish, 1974, pp. 276-277)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슈마허가 미얀마에 있을 때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후에 그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라고 칭송한, 간디의 사상을 접한 것이다(Crittenden, 1975).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의 탄생

대규모 조직에 대한 각성과 미얀마와 인도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슈마허는 1973년에 출간된 『작은 것은 아름답다: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Small Is Beautiful: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에서 중간기술이라는 개념 뒤에 녹아있는 생각들을 발전시켰다. 슈마허(1973)가 묘사한 것처럼, ‘그러한 중간기술은 토착 기술보다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의 복잡한, 자본-집약적 기술보다는 매우 쌀 것이다'(p. 180).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유용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제안들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작업장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에 만들어져야만 하고 절대로 사람들을 이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주요도시에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작업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달성할 수 없는 정도의 자본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즉,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싸야한다;

● 사용된 생산 방식은 생산 과정 자체뿐만 아니라 조직, 재료의 공급, 재원조달, 마케팅 그리고 기타 등등에 있어서 높은 기술에 대한 요구가 극소화될 정도로 반드시 간단해야한다;

● 생산은 주로 지역의 자원으로 이루어지고 지역의 사용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Schumacher, 1973, pp. 175~176)

이러한 생각들을 이행하기 위해서, 슈마허와 그의 동료들은 중간기술 개발 그룹(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 ITDG)을 1965년에 런던에 설립했다(Schumacher, 1974). 지금까지, ITDG는 많은 활동을 벌여왔는데 196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열린 회의에서 중간기술이라는 이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중간기술은 열등하거나 2등급인 기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

고(Kaplinsky, 1990; Willoughby, 1990) 혁신의 경제적이고 공학적인 측면만을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 용어는 더욱이 ‘개입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요인들과 분리되어 발전 문제가 기술적으로 고정된 것을 암시한다고 비난받았다'(Hollick, 1982, p. 214). 적정기술이라는 용어가 부분적으로 혁신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차원을 포함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고(Pellegrini, 1979), 중간기술과는 다르게 열등함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었다. 논리적 근거는 적정기술은 의도한 대로의 수용의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는 것이다. 비록 중간기술이 여전히 사용되지만, 적정기술이 대중적이고 좀더 광범위하게 호소력을 지니는 것이 되었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적정기술은 일군의 지식, 기술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발전에 관한 한 가지 접근 방식이다. 실제로, 듄(1978)은 적정기술을 스스로-진화하고 역동적인, 발전에 관한 완벽한 시스템 접근 방식이라고 불렀고, 그것의 사용자들이 점점 풍족해지고 능숙해지기 때문에, 그들은 좀더 비싼 기술적 도구를 수용할 수도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즉, 적정기술이 공동체의 생산성을 개선하는 것처럼, 공동체 또한 기술의 수준에 영향을 미치며 개선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적정기술은 일자리 창출과 존재하는 기술과 자원의 최적의 사용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기술과 자원을 만들어내는 식의 발전에 관한 것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적정기술의 특징

기술의 적합성은 일자리 창출, 지역적 자원의 사용 그리고 재생가능한 에너지 자원의 활용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또한, 수용가능한 것, 지속하기 쉬운 것, 존재하는 기반과 양립 가능한 것, 부족한 천연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 환경적으로 유리한 것 그리고 소규모를 선호하는 것과도 연결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은 적정기술이 항상 작고, 단순하고, 싸고, 노동-집약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슈마허는 다른 이들 이상으로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에 공헌했다. 하지만, 앤더슨(1985)은 ‘규

모, 복잡성 그리고 비용이 항상 정비례 관계인 것은 아니다. 커다란 기계가 단순하고 쌀 수도 있고 작은 것이 매우 복잡하고 비쌀 수도 있음을'(p. 68) 지적했다.

기술 선택의 다양성

위에서 논의된 적정기술의 특징 혹은 기준이 단숨에 제3세계의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기술 혹은 만병통치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제3세계 사회의 환경은 매우 다양하며, 어떤 국가 혹은 사회적 조건에 맞는 적절함은 다른 곳에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명백하다. 윌러비(1990)가 지적한 것처럼,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의도 혹은 상황에 맞는 상대적 적합성에 따라 기술들을 식별해내기 위한 시도이다'(p. 6). 적정기술은 기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동질적인 현상으로 보지 말고 사회적·기술적 선택지들의 잡종적 총체로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에서, 최상의 선택은 획득된 목표와 인간과 환경에 대한 가능한 효과들에 기반하여 만들어진다.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은 모든 대안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지(best fit)’ 연구되어야함을 제안한다. 따라서, 진보된 기술이 제3세계에서 무조건 부적절하다는 것은 적정기술의

취지에 관한 잘못된 해석이다. 다만, 적정기술에 대한 우선적인 초점은 제3세계의 농촌 그리고 비공식적 영역에 맞춰져있음을 고려해야만 한다. 즉, 제3세계의 엘리트들은 ‘도시에 있든, 농촌

에 있든 생존 기반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가난에 찌든 대다수가’ 아니며(Schumacher, 1973, P. 181) 따라서, 제3세계에서 활용가능한 기술의 시설 내에 다양성이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더

욱이, 제3세계의 발전에 대한 기술적 다양성 접근(technological diversity approach)은 제3세계의 부자와 빈자 모두의 필요를 만족할 수 있고 개발 과정에 있어 가난한 이들의 참여를 촉진할 수도 있다. 브룩스(1980)는 ‘적정기술과 현재의 기술은 상호 배제적이라기 보다는 보완적이고 양자의 잠재적 혜택은 공존할 때 고양될 수 있다고'(p. 54) 제안했다. 그러나 적정기술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적정기술에 대한 비판들

비판들 중 일반적인 것은 적정기술은 비효울적이고 성장에 적합하지 않고 평균적 삶을 개선해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에 기반한 실패한 계획들이 종종 이러한 비판을 지지해주는 증거로 사용된다. 리프진스키(1980)는 불충분한 메탄 생산 혹은 소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인도와 남한에서의 생물가스를 이요한 조리기구가 포기되었던 사례를 비효율적인 적정기술의 증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설명은 일부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즉, 인도 남부의 마을인, 푸라(Pura)에서 생물가스는 거주민 485명이 필요로 하는 펌프, 전등, 조리, 거름을 가져다주었다. 샘팻(1995)에 따르면, 2백만개의 생물가스 조리기구가 1981년 이래로 인도에서 설치되었고 ‘비록, 그 프로그램이 문제도 있었지만, 상당한 진전도 가져다주었다'(p. 21).

이와 연관된 비판은 작업장 생산성이 적정기술로 인해 손상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적정기술은 생산성과 생활 수준이 중요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즉, 도시 지역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전통적이고 비공식적인 영역의 실업자와 비정규직들에게 직업 기회를 극대화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추구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생산성 혹은 일자리 창출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촉진시키고 발전의 혜택이 모두에게 미칠 수 있는 분배를 확립시킬 수 있는 기능의 좋은 조합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더욱이, 비판자들은 만약, 적정기술이 그것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효율적이라면, 지배적인,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대체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어느 시점에 우선시되는 기술이 그 시점에 가장 효율적이다는 주장을 발전시킨다(Brooks, 1980; Kaplinsky, 1990; Rosenbrock, 1979). 이는 아마도, ‘자유 시장’의 가정과 여타의 조건이 같다는 단서조항에 기반한 주장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 제도적 관성, 개입된 이해관계 그룹의 행동들, 다년간의 거대한 투자 그리고 확립된 기술의 지위를 통해 낭비적인 기술이 지속될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로젠브록(1979)은 ‘가장 나쁜 해결책이 이러한 식으로 끝도 없이 영속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추측했다(p. 9).

적정기술에 대한 마지막 비판은 적정기술은 열등한 기술이고 제3세계에 대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기술적 지배에서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서구 산업국가들의 의한 음모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Kaplinsky, 1990; Thormann, 1980; Willoughby, 1990;). 이러한 주장이 믿을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관점의 차이이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다음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단순한 기술로 출발한 국가는 좀더 복잡한 기술로 이동해갈 수 없다는 증거는 없고, 단순한 기술로 출발한 국가의 산업화로의 이행이 직접 복잡한 경우로 나아간 국가의 경우보다 쉽다는 증거는 훨씬 많다. (Hazeltine & Bull, 1999, p. 277)

적정기술 지지자들이 정의하는 적정기술은 주어진 지역 혹은 공동체의 특정한 필요에 맞추어진 기술임을 염두해야만 한다. 이는 지역 혹은 공동체에 특정한 환경의 총체에 들어맞는 ‘최선의’ 대안을 확보하기 위한 근면한 노력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따라서, ‘만약, 주어진 환경에 맞는 최선의 기술을 원한다면, 논리적으로, 열등한 기술이 최선의 대안이 아닐 때, 그것[열등한 기술]을 지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적합하다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Willoughby, 1990, p.237).

결론

적정기술을 잘못된 이유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의도와 초점을 고려하지 않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저술가들은 적정기술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그것에 반대되는 경험적 증거들이 있음에도 제기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Kaplinsky, 1990; Willoughby, 1990). 또한, 몇몇 적정기술 옹호자들이 적정기술의 역할과 효율성을 과장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은 언급되어야만 한

다. Jequier(1979)는 정말로 이러한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적정 기술은 차선의 해결책으로 보아서도, 볼 수도 없다. 거꾸로, 그것의 역할은 과장되어서도 안 된다: 적정기술은 전통적인 근대 기술에 관한 보편적인 대안은 아니다. 적정기술과 근대 기술

은 모순적이기보다는 보완적이고, 전자[적정기술]에 대한 강조는 특히, 지역적 조건에 잘 적용되는 곳에서 후자의 사용을 배제해서도 안되고 하지도 않는다. (p.3)

최근의 몇몇 적정기술 조직의 설립은 적정기술의 채택과 확산을 향한 필요한 접근이지만, 유일한 전략일 필요는 없다. 적정기술의 대중적 확산에 관한 자주 인용되는 장애는 진보한 자본-집약적 기술을 선호하는 현존하는 권력 관계이다. 대규모 기술을 촉진시키는 현재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뜯어고쳐 평평한 활동의 장을 만들지 않는다면, 적정기술의 일반화와 확산은 기껏해야 부분적 최적화로 남을 것이다. 이는 대부분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선호하는 현재의 상황을 제거할 수 있는 정치적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딕슨(1974)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면서 견해를 제시했다:

기술 변화는 정치적 과정, 지배적인 계층의 이해관계를 재강화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는 또한, 아무도-배제하지-않는, 아무도-착취하지-않는 기술의 발전은, 현재 가지고 있는 기계의 소유권 내의 단순한 명목상의 변화 이상의 것을 요구함을 암시한다. 즉, 사회에서 기술의 기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재형성해야한다. 바꿔말해, 정치적 의식과 기술적 의식 모두에서 동시

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p. 95)

앤소니 애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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