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2002-08-01   636

유전자 읽기

환원, 직관, 그리고 구성

<편집자 주>

아번 호 기획서평은 최근 번역·출간된 이블린 폭스 켈러의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에 대한 평을 중심으로 관련 서적들(『생명의 느낌』과 『3중나선』)에 대해 소개하면서 유전자결정론에 대한 대안적 과학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초반의 가장 두드러진 과학적 성과가 인간유전체 연구 사업의 완성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부 성급한 언론의 표현을 빌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모든 정보(인간을 만드는 설계도)를 가지게 된 셈이다. 나를 만드는 설계도가 단 하나의 세포에, 그것도 그 세포의 일부인 핵 속의 염색체에, 그 중에서도 이중나선형으로 꼬여있는 DNA라는 분자에 네 가지 염기가 배열된 순서를 따라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이 기막힌 가설은, 이제 사실로 굳어져가고 있다. 1997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복제양 돌리와 그 뒤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복제소 영롱이는 이러한 가설에 더욱 굳건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몸 속의 수많은 세포 중 하나에서 채취한 핵을 난자의 핵과 바꿔치기 함으로써 핵을 제공한 개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돌리와 영롱이)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가져왔던 생명의 지위에 대한 믿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인 이상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할 뿐 아니라, 유전적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원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믿게 되었다. 유전자가 바로 생명이거나 적어도 그 비밀을 풀어낼 열쇠일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인간유전체의 모든 염기서열이 밝혀지고, 유전자형이 서로 같은 복제동물이 다수 탄생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생명의 비밀이 완전히 밝혀졌거나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생명의 차원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중 한 차원을 담당했던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이 지나치게 미시적이고 환원적이었던 반면 우리의 일상적 사유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연구나 체세포핵이식을 이용한 복제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들은 모두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의 미시적이고 환원적인 성격과 일상적 상식의 충돌이 빚어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

은 사실지향적인 과학계를 한 축으로 하고, 가치지향적인 종교계와 시민단체를 다른 축으로 하는 양자구도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윤리적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과학 (사실)이 사회 일반 (가치)과 긴밀한 상호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된다. 배아연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활동했던 생명윤리자문회의나 시민합의회의와 같은 노력들은 과학과 사회 일반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었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오해와 대립이 과학자 사회와 시민사회 사이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연구의 방향과 연구결과의 해석을 놓고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한 학문의 출발점이 된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합의하지 못한 채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유전자”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블린 폭스 켈러의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이한음 옮김, 지호, 2002)는, 비판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과학적 사실과 용어들을, 종교나 관념이 아닌 과학의 논리로 비판하고 반성한 흔치않은 과학비평서다. 이 책은, 유전체연구와 배아연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은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던 과학적 발견과 사실들의 “과학적” 맥락을 찾아 의

미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유기체의 발생과 유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과학적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위에 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담고 있는 만큼 그렇게 쉽게 읽고 넘길 책은 결코 아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유전자를 둘러싼 과학 연구의 역사와 최신 경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지금 유행하고 있는 유전자를 둘러싼 담론의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켈러는 먼저 유전현상의 발견이라는 사건과 “유전자”라는 말의 탄생, 그리고 유전자지도의 완성이라는 사건이 갖는 의미를 과학사적으로 조명한다. 유전형질의 분리에 대한 수학적 발견 (멘델

유전법칙의 재발견), 유전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유전자”라는 말의 위력, 유전물질이 DNA라는 사실의 발견, 1유전자-1효소 가설의 확립, DNA 구조의 규명, 재조합 DNA

기술의 도입, 그리고 인간유전체 지도의 완성이라는 야심에 찬 계획에 이르는 유전학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생명과 유전에 관한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를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한 개념적 장치가 바로 “유전자”이었으며 이 개념의 환원적이고 결정론적인 성격으로 인해 인간유전체 연구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이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그 출발선이었던 유전자 결정론의 근거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 1장에서는, 안정과 변화라는 역설적 현상이 공존하는 유전과 진화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DNA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제오류, 자발적 파손, 손상의 예방과 수선 등 비정형적 현상들이 오히려 그 물질의 안정성에 기여한다는 기막힌 역설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비활성의 유전물질이 수동적으로 전달됨으로써 형질이 결정되며 그 형질의 적합성에 따라 자연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신다윈주의의 주장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제 2장은 DNA의 구조가 기능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DNA는 RNA를 만들고, RNA는 단백질을 만들며, 단백질은 우리를 만든다’는 중심원리의 오류와 단순성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DNA가 전사되고 번역되는 과정에 발생하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한 과학적 현상이 규명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유전자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단지 지난 수십년 동안 상당한 역사적 부담을 떠맡아 온 개념일 뿐이다’라는 분자유전학자 윌리엄 젤버트의 주장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게 된다.

제 2장이 D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를 다룬 것이었다면 제 3장에서는 좀 더 범위가 넓어져서 형질의 발현과정을 논한다. 유전체에 염기의 서열이란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소위 “유전프로그램”이란 것은 결코 모든 형질을 결정할 수 없으며 수정란 전체에 퍼져있는 “발생프로그램”이 그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전자 네트워크의 구조, 즉 상호 작용 속에서 특정한 유전자가 언제 어디서 발현될 것인지 결정하는 복잡한 조절 메커니즘이 세포 전체에 걸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조절 메커니즘이 유전체 안에 존재한다는 오페론 가설의 환원주의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비환원적이고 개방적이며 역동적인 시스템이다.

제 4장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유전자만을 가지고 유전과 발생, 진화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생물개체는 이기적으로 자신을 증식하려는 유전자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계에 불과하므로, 개체가 아닌 유전자가 선택의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생물학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켈러는, 선택의 단위를 유전자에서 전체 생물의 단위로, 다시 말해 생물 생활사로 확대해야 한다는 타우츠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독립된 별개의 실체들을 다루는 고전 유전학에서 벗어나 그 실체들의 상호작용과 그 상호작용의 결과인 목표지향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이러한 새로운 생물학적 사유가 인공지능과 컴퓨터프로그래밍에서 사용되는 비정형 연산 amorphous computing의 사유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비정형적이고 역동적인 생물학적 행동을 세포연산 cellular computing 이라 부른다. 기계적 공학의 은유를 근거로 출발한 생물학이 이제는 공학적 은유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공학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책에서 켈러는 유전자결정론의 오류를 과학적 맥락에서 규명해 내고 생물학적 사유를 기계적 환원론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물학적 담론 공간을 확보하려고 했으며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가 너무 전문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느낀 독자라면 곧바로 같은 저자의 『생명의 느낌』(김재희 옮김, 양문, 2001)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평생 옥수수밭을 떠나지 않았던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인 이 책에서 우리는 분자생물학이 도입되기 이전 유전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가 극단적인 환원적 분석의 끝에서 발견한 생물학의 새로운 전망을 담은 책이라면, 『생명의 느낌』은 연구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열정으로 일궈낸 따뜻한 과학의 옴살스런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과학연구의 방향 뿐 아니라 그 결과마저도 그 연구가 행해지던 시기의 사회적 맥락과 연구자의 직관에 크게 좌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유전과학연구는 대규모의 시설과 자금이 투여되고 많은 수의 과학자가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일하는 체제이므로 연구자 개인의 인간적 면모가 과학연구에 반영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연구의 방향은 이미 조직적으로 결정이 된 상태에서 연구자는 전체 프로젝트의 일부만을 수행할 뿐, 연구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상태에서 연구대상과의 교감으로 얻어진 “느낌”을 연구에 활용한다는 건 미신이며 신화일 뿐이다.

매클린톡이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였던 1930년대의 상황은 오늘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거대한 연구조직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일 수는 있었을 것이며 갖가지 연구성과를 기존의 틀에 꿰어 맞추기보다는 새로운 틀을 창조하는데 열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연구자의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직관의 능력이 더해졌을 때, 과학은 이미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연구대상인 옥수수에 쏟아 붓는 정성과, 마침내 옥수수의 삶에 동화되면서 그 비밀을 풀어가는 유전학자 매클린톡의 모습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이러한 감동은, 생애주기가 짧아서 형질의 변화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초파리나 박테리아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과학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의 이상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지식인의 모습이 매클린톡에게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구대상과의 교감으로 얻어진 직관적 통찰이 과학적 관찰에서 얻어진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과학적 사실이란 자연을 고문하여 받아낸 자백이며 과학은 변덕스런 감성이나 믿기 어려운 직관 등으로 오염되지 말아야 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이라는 근대과학의 뿌리

깊은 믿음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근대과학 일반의 개념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 뉴턴의 물리학과 데카르트의 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면, 근대 생물학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단연코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뉴턴과 데카르트가 정신계와 물질계를 분리함으로써 근대의 과학적 세계를 열었다면, 다윈은 생명체 내부의 사건(유전적 변이)과 외부의 사건(환경에의 적응)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생명체와 환경의 대립구도를 명확히 했다.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형질의 변이는 오직 외부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 다윈에게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의 냉혹한 투쟁인 자연선택(적자생존)이 생명의 본질이었다.

켈러의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는 생명체 내부의 사건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매클린톡의 유전학은 이렇게 복잡한 내부적 사건을 파악하는 비환원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리처드 르원틴의 『3중나선』(김병수 옮김, 잉걸, 2001)은 내부적 사건과 외부적 사건이 사실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심지어는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윈주의자와 사회생물학자들에 의해 별개의 실체로 분리되었던 유전자, 생명체, 환경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루면서 함께 진화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관계망이 된다. 그에 따르면 ‘생명체는 단지 유전자에 지배되고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고 새롭게 구성하면서 능동적인 형태로 진화하는 존재’이다.

인간유전체연구사업의 완성은 분명 인류가 이룬 커다란 과학적 성과임에 틀림없다. 생식의학의 발전이 수많은 불임부부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배아복제를 통한 연구로 많은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가 지나친 단순화에 근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명윤리의 문제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 변화무쌍한 인간사회의 가치와 충돌할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명윤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과학적 사실은 환원, 직관, 구성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생산되고 해석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주로 사태를 가장 작은 단위로 나누어 보는 환원적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인간의 미래를 DNA라는 분자의 염기서열만으로 점칠 수 있다거나, 또다른 나를 복제하여

고장난 장기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생명을 그 최소구성단위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켈러와 르원틴이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DNA는 전사되고 번역되어 그 형질을 발현하는 과정에서 염색체와 세포와 생물체 그리고 생물체 외부의 환경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을 환원적 과학의 언어로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이제 과학은 환원의 방법론을 넘고 상상력에 기반한 직관을 아우르며 실존과 맥락을 고려하여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신익 |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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