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를 통한 신선함과 즐거움

-미라복장 1인 시위, 불쾌감 조성?

김00씨는 건설운송노조(레미콘노동조합) 조합원으로 2001년 4월 13일 광화문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이 국민의 정부 아래서 사망했다”는 상징으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미라복장을 한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김씨가 혐오감을 준다며 현장에서 연행해 경범죄 위반혐의로 즉결심판에 회부했고, 결국 정식재판에서 서울지방법원(신광렬 판사)은 경범죄처벌법(불안감 조성)을 적용, 벌금 3만원의 유죄를 선고했다. 사법감시센터는 논평을 내고 “이 판결이 시위의 방식과 표현방법에 제약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인 시위를 비롯한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제한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법원이 정치적 의사표현 양태의 시대적 조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연 김00씨의 “미라복장 침묵시위”가 불쾌감과 혐오감을 조성했는지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불안감이나 불쾌감의 정의

흔히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만족은 재현된 대상 자체가 주는 쾌, 불쾌가 아니라 대상의 재현 또는 표현의 “형식”이 주는 쾌, 불쾌에서 만족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가령 귀가 잘린 반 고흐의 <자화상>과 같은 그림에서 오는 쾌감은 귀가 잘린 반 고흐의 얼굴이 주는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붓의 터치와 색감, 공간구성의 구도 등을 포함하는 그 그림의 전체적인 표현형식에서 나온다. 그에 반해 대중은 일상생활에 뿌리박은 쾌·불쾌의 생활감정을 예술작품에 적용하며, 이를 통해서 예술에 관한 사항조차 생활세계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삐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라는 유명한 책에서 예술적·미학적 판단과 일상적인 판단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 그 차이는 정도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예술이 미학적 성향에 가장 커다란 무대를 마련해주는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 기본 욕구나 충동을 순화하고, 세련화시키며,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실천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삶의 양식화, 즉 기능보다는 형식을, 소재보다는 매너를 우선시 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삐에르 부르디외 지음 / 최종철 옮김, 나남출판사, 1995년, 27쪽).

말하자면 전문적인 예술영역에서의 미학적 판단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재료나 소재 그 자체보다는 재료나 소재를 다루는 ‘형식’을 중시하며, 그 형식의 상투성보다는 신선한 형식을, 낯익은 형식보다는 낯선 형식을 선호하며 그로부터 활기와 쾌감을 얻어내려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데, 일상생활에서 의상이나 실내장식, 광고의 유행이 급속히 바뀌는 경향이라든가, 다양한 형태의 ‘낯설게 하기’ 또는 ‘충격효과’를 주는 의상이나 광고가 주목을 받고 선호되는 사례(기아 상태에 처한 아프리카의 아동들을 광고의 소재로 등장시키는 베네통 광고 등)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불안감 조성은 필연적 근거 없는 것

경찰조서나 서울지방법원에서 내린 즉결심판조서에 따르면, 피고인 김순환은 ‘2001년 4월 13일 12:05경부터 30분 가량 서울 종로구 세종로동 1번지 광화문 누각 앞에서 레미콘 사용주들이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붕대를 감고, 해골을 그린 마스크와 검정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시위를 함으로써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불안감과 혐오감을 조성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로 경범죄처벌법 위반 규정에 따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를 보면 경찰이나 법원 측의 판단은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붕대를 감고 해골을 그린 마스크와 검정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시위를 했다’는 사실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불안감과 혐오감을 조성한 사실’을 아무런 근거 없이 등치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붕대를 감고 해골을 그린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는 것이 그 자체로 불안감과 혐오감을 조성한다고 단정짓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학적으로나 사회·문화적 필연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설령 피고인의 복장 자체가 난데없이 광화문 한복판에 미라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착각하게 하여 행인들에게 일시적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미학적으로나 사회·문화적 어떤 형상이 미라처럼 또는 미라와 똑같이 보인다고 해서 그와 같은 소재나 내용이 그 자체로 반드시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피고인은 서울 한복판의 광화문이라는 공간에서는 낯선 것이 분명한 인공적인 “미라”라는 ‘허구적 형식’을 이용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낯설게 하고’ ‘신선한 충격’을 부여함으로써 미학적인 쾌감을 자아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허구적이고 인공적인 미라가 아니라 해골을 드러낸 실제 미라가 광화문 한복판에 느닷없이 출현했다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분명히 상당한 혐오감과 불안감을 조성했을 수 있다. 그러나 피고인은 ‘합법노조 인정하라’는 내용의 글을 쓴 피켓과 천을 부착하고 있었으므로 눈 뜬 장님이 아닌 한 그가 실제 미라가 아니며, 다만 인공적으로 만든 미라 복장을 하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검찰이나 법원의 주장이 옳기 위해서는 경찰과 판사의 눈에는 피고인이 실제 걸어 다니는 미라로 보였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전제가 사실이라면 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순간적으로 허구적 미라를 실제의 미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전신에 부착한 “텍스트”로 인해 이런 착각은 즉시 해소될 수밖에 없으므로 “착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불안감이나 혐오감을 운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억지주장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불안감이나 불쾌감을 조성할 우려?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사회에서 광고의 기본 전략은 ‘낯설게 하기’이다. 따라서 시각적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광고의 전략은 시청자나 관객, 행인들에게 뭔가 특별하고 친숙하지 않은 시각적 형식을 도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정 광고물이나 도로 표지판 등이 무성하게 설치된 가운데 행인들의 통행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가로에서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고안된 광고 전략의 하나가 소위 ‘샌드위치 맨’을 이용한 퍼포먼스이다. ‘샌드위치 맨’은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하거나 그로테스크한 복장을 하고 기이한 장식물을 몸에 부착한 채 가로를 왔다갔다하며 광고를 한다. 이때 샌드위치 맨의 복장은 의상의 형식적 아름다움 자체에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패션쇼와는 달리 단지 행인의 주목을 끌기 위한 장치로서, 일단 기이한 복장으로 행인의 주목을 끌고 나서 실제로 행인의 시선을 유도하는 곳은 샌드위치 맨의 몸에 부착된 홍보 텍스트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광경은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사회적으로나 일상 문화적으로나 매우 친숙한 광경이다.

피고인이 1인 시위의 형식으로 채택한 홍보 전략이 바로 이런 ‘샌드위치 맨’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고인은 샌드위치 맨의 홍보전략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단 인공적인 미라 복장이라는 낯선 장치를 이용하여 행인의 시선을 끈 다음 행인의 시선을 몸에 부착된 텍스트의 내용(‘합법노조 인정하라’)으로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나 일상 문화적으로나 널리 용인되고 익숙해 있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행인들에게 불안감과 혐오감을 조성했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혀 근거가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경찰이 용가리 복장을 한 샌드위치 맨을 실제 용가리로 착각하여 행인들을 상해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총을 발포하거나 무력으로 체포했다면, 이 얼마나 천치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행위일까? 물론 그런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경찰이 샌드위치 맨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며, 또는 거리의 퍼포먼스나 가장행렬이나 심지어는 허구적인 행위인 연극이나 드라마조차 허용되지 않는 매우 특이하게 현대적인 문화를 결여하고 있는 폐쇄되고 고립된 사회에서 파견된 경찰이라고 가정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 자체가 오늘날과 같이 정보와 문화의 교류가 완전히 지구화 되어 있는 개방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가정인가?

현대사회 문화의 다양성과 일반인들의 다양한 의사표현 방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피고인은 몸에 부착한 홍보 텍스트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가 합법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사주에 대한 항의 시위임을 분명히 밝힌 가운데 “침묵시위”를 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행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 ‘샌드위치 맨’의 홍보전략과 동일한 방식으로 1인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만일 그가 명시된 어떤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행인들에게 불쾌감과 혐오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미라 복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하고자 했다면, ‘합법노조 인정하라’는 내용의 텍스트를 몸에 부착하지 않고, 행인들로 하여금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 채 통행을 방해했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누군가가 어두운(또는 대낮의 좁은) 골목에서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는 미라의 복장을 하고 튀어나와 ‘정당한 이유 없이’ 통행을 방해한다면 극도의 불안감과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이와 정반대로 광화문 앞 대로에서 대낮에 자신의 행위의 의도를 명백하게 밝히고 (‘정당한 이유를 갖고’), 통행을 방해하지 않은 채 샌드위치 맨의 홍보방식을 이용하여 침묵시위를 함으로써 사회 문화적인 관행 속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의사표현 행위를 수행하였다.

이런 방식 속에서 허구적인 형태의 미라 복장은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하기’의 표현형식을 통해서 오히려 행인들에게 일상을 넘어서는 신선함과 즐거움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다. 특히 ‘1인 시위’는 2-3인 이상의 다수인을 요건으로 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사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은 개성적인 표현형식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충분히 구가한 문화적인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도 불안감이나 혐오감을 조성하는 것도 아닌, 오히려 합법적으로 설립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사주의 불법적인 행위에 의해 마치 미라와 같은 상태에 처한 노동기본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허구적인 형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개인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경범죄나 여타의 죄로 처벌하는 것은 명백히 ‘위헌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심광현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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