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이달의 사이언스 필름>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 천국의 문

나노기술(nanotechnology)은 생명공학, 인터넷, 로봇공학 등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으로 전망되곤 하는 첨단기술 분야 중 하나이다. 나노기술은 원자나 분자의 크기에 해당하는 나노미터(10-9m) 수준에서 대상을 관찰하거나 조작하는 기술을 일컫는데, 이는 화장품에 쓰이는 극미 나노입자나 최근 전자공학에서 각광받고 있는 탄소 나노튜브의 형태로 이미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고 있다. 아울러 에릭 드렉슬러와 같은 나노기술의 전도사들은 ‘어셈블러’라고 불리는 미세한 나노로봇이 원자나 분자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저렴하게 만들어내는 미래가 머지않아 도래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기도 하다. (주1 : 에릭 드렉슬러, 『나노 테크노피아』(세종서적, 1995).)

그러나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가 늘고 그에 따라 나노기술이 점차 SF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 속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궁극적 위험을 경고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나노기술에 대한 대중적 토론에 불을 붙인 것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립자이자 수석 과학자인 빌 조이가 2000년 4월에 인터넷잡지 ≪와이어드≫에 기고한 “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이었다.(주2 : 빌 조이,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 『녹색평론』 55호(2000년 11/12월호), pp. 83-120.)

그는 이 글에서 드렉슬러가 제기한 바 있는 묵시록적 전망에 기대어, 이른바 ‘GNR 기술'(유전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발전이 가져올지 모를 파국적 결과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예컨대 자기복제하는 ‘나노봇’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마치 꽃가루처럼 바람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위 환경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지구 생태계가 절단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grey goo problem’). 또한 나노기술이 군사적으로(혹은 테러 행위를 위해) 사용되어, 특정 지역에 살거나 특정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인간집단에게만 선택적으로 상해를 가하는 파괴적 장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 1998년에 방영되었던 인기 TV 시리즈인 <카우보이 비밥>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바로 후자와 같은 설정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졌다.

화성의 한 고속도로에서 의문의 탱크차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으로 죽거나 혼수상태에 빠진다.(주3: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은 기본적으로 TV판 <카우보이 비밥>의 설정에 근거한 외전(外傳)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TV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을 위해 간단한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카우보이 비밥>의 배경은 서기 2070년 전후의 미래로, 인류는 ‘위상차 게이트’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로 이주해 살고 있다. 이곳의 치안은 태양계경찰(ISSP)이 맡고 있으나 들끓는 범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연방정부는 범죄자들에 대해 현상금을 내걸게 되고 이는 현상금을 노리고 범죄자들을 뒤쫓는 신종 직업인 ‘현상금 사냥꾼’을 탄생시킨다. <카우보이 비밥>은 우연한 계기로 우주선 비밥 호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현상금 사냥꾼 스파이크, 제트, 페이, 에드(그리고 아인)의 얘기다.)

치안당국은 생물무기를 이용한 테러의 가능성을 의심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현상금 사냥꾼인 스파이크 일행은 이 범죄의 배후를 캐다가 군사연구를 수행하는 제약회사에서 비밀리에 만들어낸 나노머신 무기가 테러에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무기는 평상시에는 림프구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체에 들어가면 수만 개의 자기복제하는 나노머신으로 분해되어 뇌를 공격해 사람을 죽게 만든다. 스파이크 일행은 나노머신 인체실험을 받고 기억을 잃은 전직 특수부대원이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화성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려는 그의 음모에 맞선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을 보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미쳐 날뛰는 기술’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의 영역이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쥬라기 공원>(1993), <미믹>(1997), <딥 블루 씨>(1999) 등에서 볼 수 있듯 지난 10여년 동안 그러한 ‘프랑켄슈타인 기술’의 상징은 단연 유전자조작 생물체(GMO)였는데, 이제는 그것이 나노기술로 이전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자기복제하는 나노머신의 파괴적 속성을 소재로 다룬 마이클 크라이튼의 신작소설 『먹이』(주4: Michael Crichton, Prey (New York: HarperCollins, 2002).)가 작년에 출간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현재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SF 장르 내에서의 유행 변화로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해당 기술에 대한 사회적 우려의 증가를 반영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좀더 적절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GMO에 대한 사회적 우려는 1970년대 후반에 DNA 재조합 기법을 둘러싼 논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실험용 GM 동물에 대한 특허가 출원되고 GM 작물에 대한 안전성 평가가 시작된 1980년대 후반에 재점화되었고 GMO의 환경 방출이 본격화된 1990년대 후반에 정점에 달했다. 이는 생명공학을 소재로 한 대중적 텍스트의 부침(浮沈)과 대략 일치한다. 마찬가지의 경향을 나노기술에 대해서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사 터널링 현미경(STM)의 발명으로 나노 수준에서의 조작가능성이 열린 것이 1982년이고, 나노기술에 대한 유토피아-디스토피아적 비전을 뒤섞은 드렉스러의 책 『창조의 엔진』이 나온 것이 1986년이었다. 이를 계기로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었던 대중적 상상력이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연구성과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에 분출되었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추측일 터이다.

그렇다면 나노기술에 대한 빌 조이류의 암울한 전망 ―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이 기대고 있는 ― 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나노기술의 지지자들은 ‘자기복제하는 나노머신’ 같은 것이 기술적으로 아예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거나, 설사 그것이 만들어진다 해도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할 거라고 보고 있다.(주5 : Robert F. Service, “Is Nanotechnology Dangerous?” Science 290 (November 24, 2000), 1526-27.) 그들은 대중작가, 언론, 환경단체 등이 인기를 목적으로 영합해서 나노기술에 대한 전망을 (낙관적·비관적 양 방향 모두로) 과장해 그리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노기술의 파멸적 영향을 우려하는 이들은 그것이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 조만간 도래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조속한 시일 내에 연구의 일시중지(moratorium)나 전지구적 나노안전성의정서와 같은 규제장치의 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주6: 영국에서 발간하는 환경잡지 The Ecologist 2003년 5월호의 나노기술 특집에 실린 글들이 대체로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양 진영간의 시각차를 단시간내에 줄이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나노기술에 관해 책임있는 발언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노기술에 대한 과장된 기대를 추방하고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위험들 ― 최근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나노입자의 인체위해성(주7: 나노입자의 인체위해 가능성을 보여준 최근의 연구성과에 대한 리뷰는 Geoff Brumfiel, “A Little Knowledge…,” Nature 424 (July 17, 2003), 246-248를 참조하라.)이나 나노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 ― 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데 의견의 접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GM 식품이 이미 밟았던 전철, 즉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채 기술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다가 이후 대중의 불신을 사 전면 거부되는 식의 노선을 나노기술이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주8 : “Don’t Believe the Hype,” Nature 424 (July 17, 2003), 237; Sue Mayer, “From Genetic Modification to Nanotechnology: The Dangers of ‘Sound Science’,” Tony Gilland (ed.), Science: Can We Trust the Experts? (London: Hodder and Stoughton, 2003), pp. 1-15.)

이를 위해서는 나노기술에 대한 대중적 토론의 장이 마련됨과 아울러, 나노과학기술자들이 토론에 참여해 대중의 우려에 답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급선무일 터이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과 같은 영화들은 당장 나노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에 기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반대중이 나노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함과 동시에 그들이 갖고 있는 우려를 드러내는 구실을 할 수는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러한 토론에 간접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명진(<시민과학>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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