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2002-04-29   688

“이공계 위기”에 이공대생은 없다.

‘이제 이쪽 분야도 뜨려나 봐요..’

옆에서 실험을 하던 후배가 느닷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왜?’

‘요즘 이공계위기론 때문에 언론에서 장난이 아니던데요. 방송타면 뜨는 거 아니예요?’

설마하면서도 뭔가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실소만 지었다. 비단 우리 실험실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이공계 위기론이 뭔지도 모를 것이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하며 남의 일 얘기하듯 할 것이다. 연구만이 최고의 덕목인 이 곳 분위기도 분위기이지만 이 중 반 이상은 유학을 갈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빨리 학위 마치고 외국으로 박사 후 과정을 밟을 사람들이고 그 외는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공계위기에 이공계인들은 없는 현실. 누구보다도 이공계의 위기를 느끼고 나서야 할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는데 도대체 뭐가 이공계위기란 말인가?

이공계위기론? 이공계쇠퇴론?

처음 신문에서 이공계 위기론의 본질과 그 대책마련이란 말을 보고 곧바로 사전을 찾아보았다. “위기”란 사전상의 용어로 ‘위험한 때나 고비’를 뜻한다. 그런데 지금이 과연 위기일까? 적어도 교육부에 계신 분들이나 이공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님들은 그런 걱정을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공계에 몸담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그런 걱정을 했을까? 우리는 이공계위기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초학문의 위기야 예전부터 있어온 일이라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보면 차라리 이공계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어져서 우리의 희소가치가 높아진다면 지금보다는 희망적이지 않겠냐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그 뒤로 나온 말들.

‘우리나라는 한번 당해봐야 정신 차린다.’

‘지금 언론에서 떠드는 것도 거품이야 거품.’

이렇게 말하는 내 선배, 후배 그리고 동료들의 눈 속엔 이미 희망이 없다. 엄밀히 말해서 희망을 버린지 이미 오래다. 이쯤되면 혹자는 신성해야 할 배움터에서조차 자본주의의 천박한 시장원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한 이상도 꿈꾸기 어렵다. 연구를 하려면 연구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연구비를 따려면 연구대상 자체가 ‘돈 되는 것’이어야 하는 게 우리나라다(그것도 단기간에). 따지고 보면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던 때가 언제 있었는가? 이공계 내에서도 인기 있는 학과, 취직이 잘되는 학과는 항상 존재해 왔고, 더 좁게 들어가 학과 내에서조차 그렇다. 내가 졸업한 생물학과에서도 더 이상 “생태학”이나 “분류학”을 하는 후배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과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나보고 하라면 나 또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사회학 용어 중에 ‘기대상승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존슨 행정부가 미국 내 소수민족들의 인권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했었다. 이때 소수민족들이 제일 처음으로 보여준 행동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연이은 시위와 폭동이었다. 즉, 그동안에 쌓여온 보상받지 못한 울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폭발되었던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만 우리나라도 이공계에 대한 충분한 대책마련과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그동안 잘 참아왔던 우리나라 이공계대학원생들도 위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위기를 넘어선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공계위기론’ 보다는 ‘이공계쇠퇴론’이란 말이 더욱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와서 왜 이공계 위기론이 대두되는 걸까? 내가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당연히 이과를 선택했던 분위기였는데 왜 이렇게 전락하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공계의 위기가 왜 같은 이공계생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나는 이공계 위기론의 본질을 현상학적인 측면보다 그 위기에 몸담고 있는 대학원생의 한 사람으로서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대학원생인 관계로 나의 전공인 생명공학의 입장에서 주로 예를 들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요즘 이공계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최소의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러한 의견이 제기되는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서 한사람이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석사2년, 박사4년 최소가 6년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경우, 박사학위까지 마치게 된다면 서른 살이다. 그 후, 직장을 구하고 자리 잡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치면 서른이 넘어간다. 군대를 갖다온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더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물론 여기엔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을 전제로 한다. 대부분 6년 안에 학위를 못 받는 것이 현실이다보니 학위를 받기 위해서 나이 서른쯤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석사를 마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취업을 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첫 번째 유형은 일단 돈 좀 벌어놓고 공부하려는 사람들로서, 대부분 공부를 계속하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돈이 궁한 생활에 지쳐버린 나머지 더 이상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일한만큼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들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정말로 우리나라는 대학원생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너무 부족하다. 한학기 등록금은 300만원이 넘는데, 거기에 용돈도 써야하고,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부가적인 지출도 많아져서 아무리 절약을 해도 생활은 항상 쪼들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기간에 결혼은 당연지사 꿈도 못 꾸고 주변동료가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어떻게 살려고..”내지는 “집안이 좀 잘 사나보지”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석사를 마치고 취업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연구를 해야 할텐데, 우리나라의 연구소 숫자는 한해 배출하는 석/박사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몇몇 대기업에 속한 연구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연구직은 계약직, 일용직이다보니 안정성도 보장받을 수 없고 월급 또한 매우 적어 차라리 “대학 졸업하자마자 취직할 걸” 하는 후회감이 밀려온다. 졸업할 땐 나름대로 고생해서 받은 석사학위라 뿌듯하기도 하고, 그래도 학사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도 세상 사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서서히 “도대체 내가 왜 대학원에 갔을까”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이것은 왜 이공계 생들이 부득이 외국유학의 길을 선택하는지 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유학은 여러모로 잇점이 많다. 일단 연구환경이 공부하는데도 좋고, 지원이 많아 상대적으로 생활비 걱정을 덜 할 수 있다. 유학생끼리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집값마저 해결되니 오히려 돈이 남게 된다. 그리고 치사하지만, 논문도 외국에서 내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쉽다. 거기에 유학파 교수들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 유학은 어찌보면 당연히 밟아야 할 과정이고 학위도 못 따고 돌아온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 외국어라도 배우게 되는 셈이니 유학은 여러모로 남는 장사가 된다. 그러니 생각이 빠른 사람들은 일치감치 유학을 택하게 되고, 아닌 사람들은 뒤늦게라도 유학을 가려고 애쓴다.

그럼 마지막으로 유학을 갔다온 후는 어떠한가 보자. 학위를 다 마쳤으니 직업을 가져야 한다. 선택은 두 가지다. 연구소에 가느냐, 아니면 학교로 가느냐.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학교를 택한다. 보수는 오히려 연구소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단은 회사의 연구주제는 이익추구적인 것에 비해서 학교는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명목상의 이유이고 실질적으로 학교가 갖는 매력은 정년보장이 된다는 것이다. 회사에 연구소장은 대부분의 퇴임이 45세에서 50세 사이다. 앞서 말한대로 완전히 학위를 받게 되면 최소 나이가 35세에서 40살인데, 어느 누가 겨우 5년-10년을 일하고 퇴임하길 바라겠는가? 남자라면 부양할 가족도 무시할 순 없다. 그래서 한정된 교수자리를 놓고 또 한번 경쟁을 해야한다. 사태가 이쯤되면 후회막심이다. 친구들은 벌써 안정된 나이에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데 젊은 시절 뭔가 한번 해보겠다는 꿈은 이미 흘러간지 오래고, 유학시절 빨리 돌아가 나라에 기여 한번 해 보겠다던 의지가 곤두박질 친다.

과학기술자들의 가리워진 꿈

어렸을 적 내 친구는 ‘꿈이 뭐냐’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과학자’라고 얘기했었다. 그 이유도 늘 한결 같았는데, 바로 만화 ‘은하철도999를 타보고 싶어서’였다. 어찌보면 그 나이에 그러한 기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학자라는 건 인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와 과학의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한가지가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반면에 과학은 과학자가 낸 결과를 통해 실현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옛날에 사람들은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고 했었다. 영화’ET’는 이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과학은 정말 토끼가 사는지 확인해 보고자 우주선을 만들어냈다. 외계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나 과학은 둘 다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과학을 어렵고 딱딱한 학문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재미가 없을까? 위에서 말한대로 과학이 영화와 비슷하다면 소재가 진부하기 때문이다. 그럼 소재가 왜 진부한가? 그것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사고의 한계에 있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소재가 바로 과학기술자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과학기술자들이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내고, 한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접근방법과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보다도 창조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할 과학기술자들이 가장 보수적이고,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996년에 생물학관련 심포지움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제가 발생학에 대한 것이었는데, 외국의 저명한 논문에서 팔이 나오는 발생과정을 미분과 적분공식을 이용하여 식을 만들어 발표한 것을 보았다. 그것도 수학관련 저널이 아닌 생물학 저널에 말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가 죽어도 미국을 못 따라잡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벌써 생물학을 바탕으로 한 생물수학, 생물경제학, 생물 법학과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들을 창조해 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여기엔 획일적인 우리나라 교육정책에도 문제가 있다. 세대는 변해가는데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교과서에 담긴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은 더 늘어나서 내가 대학에 와서야 공부했던 내용들이 요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그러나 교과내용만 어렵게 만드는 것일 뿐, 효용가치가 없다. 나도 실험을 해보고서야 알았던 내용을 변변한 실험기구 하나 없고 실험도 안해본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렵다. 하지만 어쩌랴, 점수를 따기 위해 때때로 과학도 순간 외우고 마는 암기과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요즘 고등학생들은 이공계에 지망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왠지 어려울 것 같고, 재미없을 것 같으니까. 나는 이공계의 본질을 얘기하는 대다수의 언론이나 기사에서 ‘성적이 좋은 애들이 의대를 가고, 법대를 가고, 어쩌고 저쩌고…’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어느 청소년 잡지에서 인기있는 학과는 의대, 법대가 아닌 연극영화학과였다. 요즘말로 생각을 ‘끼’로 표현한다면 학생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끼’를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폼생폼사라는 말도 있듯이 “내 멋=개성”을 중시한다. 이것이 일부 연예인을 동경하는 학생들의 문제라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의대를 가네. 법대를 가네” 하면서 은근히 학문에 우위성을 매기는 게 더 위험한 발상같다. 차라리 연예인이 되면 웬만한 의사보단 수입이 더 나을텐데 뭐하러 그 어려운 공부를 하느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고 꼭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헤어디자이너, 코디네이터, 프로게이머 등 과거엔 천대받던 직업도 요즘은 선생님소리 들을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한술 더 떠 이 때문에 이공계 위기가 심각해진 것인 양 떠드는 사람들을 볼 때는 마치 우리나라가 공부 잘하는 몇몇 소수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아 불쾌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어느 때보다 주관이 뚜렷한 지금의 아이들에게 왜 이공계가 선택받지 못했는가는 처음부터 과학이야말로 다양한 사고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에 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뷰티풀마인드’를 보고 나서도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속된말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아마 오래전에 학계에서 추방당해서 다른 일을 하거나 왕따로 전락했을 것이다. 최근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던 미국의 과학자 로버트 쿡 디간은 직접 이 프로젝트를 비판한 책을 썼다. 거기엔 과학이 어떻게 정치와 관계를 맺는지 하는 예민한 문제도 언급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것을 보고 정말 부러웠다. 자기분야가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고 학계에서조차 학연, 지연으로 얽혀 생각이 다르면 공격받는 국내 연구 분위기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말 그대로 생각하는 학문, 사고하는 학문이다. 신이 인간을 똑같은 사고만 하도록 창조하지 않은 이상, 생각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그런 다양성이 존중받도록 조성되어있는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정말 부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또 한번 절망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쯤은 각오를 하고 대학원에 들어왔지만 꿈만 있다고 해서 그 꿈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과물인 논문를 내고 평가받아야 하는데, 그 기준이란 게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SCI에 의존하고 있다. 즉, SCI에 내면 좋은 논문, 아니면 안 좋은 논문이라는 인식하에 우리나라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연구를 위해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SCI에 논문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연구를 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연구를 지켜나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 나아가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연구자체가 무시당하게 되면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착각으로 전락한다. 연구자들이 “꿈꿀 수 있는 자유의 상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공계위기가 가져온 수많은 현상 뒤에 숨겨진 가장 큰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공계위기는 이것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고 수년간 방관해온 질낮은 과학교육, 최소의 연구 환경조차 무시하고 앞에 보이는 결과만을 요구해온 과학정책, 다양한 사고의 교류를 무시한 채 논문수 늘리기에 급급한 학계 연구 분위기가 배출한 예정된 작품이었다.

글을 마치며

사람들은 종종 어떤 사건이 닥쳤을 때 특별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알고 보면 그 이유는 사소하고 근본적인 문제일 때가 더 많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공계위기에 이공계인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않는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 가져야 할 사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고를 키우기 위한 여러 사회적 기반이 다져지지 않는 한 이공계인들의 꿈은 환상에 불과 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대로 연구비 몇 푼 올려준다고 해서 또는 연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해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울러 과학기술자들이 갖는 사고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삶을 좀 더 향상시키고자 생각한다. 과학은 이러한 생각 자체이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문명의 혜택도 이러한 생각들이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외국도 사고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받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보다는 좀 더 사정이 나은 까닭에 외국은 벌써 과학기술들로 인해 비롯된 여러 가지 폐해와 윤리적인 문제들을 자숙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시작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과학기술은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특정한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올바른 과학가치관이 정립되지 않고서는 과학은 순수한 목적을 벗어난 무기와 같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의 수준이 외국에 비해 상당히 뒤쳐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최신의 과학기술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라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고, 빈약한 연구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몇 ‘튀는 연구’에만 주력해왔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맹목적 분위기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과학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로버트 쿡 디간도 책머리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한 가계를 조사하기 위해 직접 그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왜 유전학을 해야 하는지 알았노라”고.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이공계위기를 극복하고 싶다면 이 말이 주는 의미를 결코 흘려 들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선주 | 고려대학교 생명공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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