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기타(cc) 2012-03-27   1688

[기고] ‘살은 떼어 가되, 피는 안된다’ 의 교훈

채권자의 도덕은 왜 묻지 않는가
이헌욱 변호사,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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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는 샤일록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하여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약속한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생살 1파운드를 떼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는 ‘살은 떼어 가되, 피는 안된다’는 현명한 재판관 덕분에 생명을 부지하게 되지만, 우리의 현실은 과연 그런가?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는 빚진 죄인이 되어 집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기며 미래를 저당 잡힌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는 인정사정이 없다. ‘빚은 갚아야 한다’는 철칙 아래 왜 갚을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빚을 빌렸는가 하는 도덕적 비난과 엄격한 법적 책임이 마구 밀려든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미래를 바쳐서라도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채무자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채무자는 스스로의 행위만으로 빚을 진 것이 아니다. 채무자가 빚을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채권자가 있어야 한다. 채권자가 빚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채무자는 빚을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채권·채무 관계는 동전의 양면이고, 채권자와 채무자 쌍방의 거래로 이루어진 것인데, 왜 빚을 갚지 못한 비난은 온통 채무자 혼자 뒤집어 써야 하는가? 과연 빚과 이자는 모두 채무자의 잘못만으로 조성되는 것일까.

채권자들과 지배층, 또 경제적 강자와 결탁한 수구세력들은 채권자들의 윤리로 ‘빚을 빌리는 채무자가 자신의 자산과 소득에 대한 평가를 잘해서 갚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빌려야 하고, 일단 빚을 졌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갚아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이러한 윤리는 정당한가? 왜 빚 갚을 능력에 대한 책임을 채무자가 담보해야 하는가? 주식이나 부동산을 살 때, 그로 인한 투자위험은 투자자가 부담해야 하듯이 채권자가 돈을 빌려 줄 때, 즉, 투자자가 채권에 투자할 때, 그 채권의 상환가능성을 잘 평가해 보고 돈을 투자하는 것이 기본이 아닌가?
금융의 기본원리는 원리금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만약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방식(예컨대 고금리, 과도한 채권추심, 높은 수수료, 담보권 실행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제반행위는 ‘약탈’일 수밖에 없다. 무력으로 재산을 빼앗고 생명을 짓밟는 것만이 약탈이 아닌 것이다. 미국 소비자신용보호법은 약탈적 대출을 금지하는 엄격한 규정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업법에서도 대부이용자의 상환능력을 초과하는 대부를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기는 하다.

최근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미국은 도드 프랑크 금융개혁법(Dodd-Frank Wall Street Reform and Consumer Protect Act. 2010. 7.)을 제정했다. 금융기관의 채무자에 대한 채무상환능력 조사 의무화, 과도한 중도상환수수료 부과 금지, 고금리 모기지에 관련하여 초기 상환금액 평균의 2배를 초과하는 상환금액 설계(ballon payment)를 금지하고 관련 수수료 및 금리 수준을 낮추도록 유도하는 등 연방 규제를 통해 소비자보호를 강화한 것이다. 신용카드 부문에서도 신용카드 개혁법안을 시행하여 이자율 인상 제한, 리볼빙 수수료 상한 설정, 가맹점 수수료 조정 등 소비자보호를 대폭 강화했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금융기관의 투자 잘못을 신용소비자의 도덕적 해이 탓만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약탈적 금융 행태를 철저히 근절하며, 이자 및 수수료 등의 과도한 설정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부터가 매우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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