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칼럼(cc) 2003-12-13   930

<두건족의 프라이버시이야기> 자신도 모르는 은행계좌와 60만원의 비밀

십년 전 과거로부터 문득 연락이 왔다. 누굴까? 혹시 옛 애인이라도. 가만, 내 첫사랑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낭만적 망상을 불러 일으킬 만한 연락은 아니었다. 그래도 10년 동안 거래하지 않은 휴면계좌에 들어있는 예금을 찾아가라는 우체국의 친절한 편지였다.

계절이 한바퀴 돌아 새로 꺼내 입은 옷에서 생각지도 못한 지폐 한 장을 발견한 듯한 흐뭇함. 그런 횡재만 같았다. 그렇다고 많은 돈은 아니었다. 우체국이 친절하게 찾아가라고 안내한 돈은 2천십원뿐이었다. 흐흐. 좀더 많은면 좋을텐데. 아쉽다.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그 계좌를 사용했던 10년전 대학생활의 아련한 추억까지 덤으로 주었으니, 가끔씩 잊어던 과거로부터 연락을 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잠시후 문득 10년이 지나도 내게 이 편지가 정확히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쭈삣해진다. 그 사이에 이사를 한 것만 해도 대여섯번이 넘으며, 한때는 주거부정의 상태이기까지 했는데도 내 신혼집 앞으로 정확히 날아온 우편물.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계좌번호니, 최종거래일이 언제인지 내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사실들까지 내 앞에 펼쳐 놓고 있으니. 또 내가 9개 숫자로 된 번호(고객번호)를 부여해서 ‘나’를 관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전에 만들었다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다른 계좌들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흐뭇한 감정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소름이 돋는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난 내 감정의 변화. 이 정도면 치료가 요할 정도의 조울증이 아닐까 걱정스럽다. 두건족들은 모두 이런 조울증을 겪고 사는 것은 아닐까?

며칠전 두건족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던 중 나온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여자의 이야긴데, 한 1년전에 아는 사람의 권유로 △△은행에 가서 현금카드를 하나 만들려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단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후로는 아예 그런 사실이 있었는 지조차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날 다른 은행에 인터넷 뱅킹을 신청하러 갔더니만, 싱글벙글 웃는 은행직원이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더란 것이다.

“이미 △△은행의 인터넷 뱅킹이 신청되어 있는데요”

자신은 인터넷 뱅킹을 신청한 적도 없고, △△은행에 계좌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게 어찌된 말인가? 그길로 △△은행에 달려가 보았더니, 자신도 모르는 계좌가 개설되어 있고 게다가 인터넷 뱅킹까지 신청되어 있더란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자신의 계좌에 60만원이 입금되었다가, 3차례에 걸쳐 20만원씩 모두 출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권이나 조폭 등이 계좌를 도용해서 불법자금을 관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60만원짜리 불법자금도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세차례에 나누어서 20만원씩 출금되었다는 것은 또 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 △△은행 현금카드를 만들기 위해서 작성했던 신청서가 완전히 파기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그 황당한 사건의 발단이었다. 계좌 개설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적혀진 신청서를 담당직원이 파기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이용해서 은행계좌를 만들고 더불어 인터넷뱅킹까지 신청하였던 것이다.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이용한 것으로 명백한 불법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60만원이 왜 입금되었으며, 3번에 걸쳐서 20만원씩 출금된 것에 대해서는 △△은행은 아직까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나는 현금인출을 하고 나온 명세서를 대여섯 조각으로 찢어버리던 것을 아주 가루가 될 정도로 찢어대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된다.

두건이, 신용카드 신청서를 해부하다

문득 내가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면서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궁금해졌다. 근처 은행에 가서 짐짓 새로 신용카드를 발급할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신청서 양식을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자주 이용하는 주거래 은행이고 창구 직원과도 안면이 있어서 그런지, 선뜻 양식을 건네준다.

그런데 이런 양식이라는 것을 받아놓고 보면 난감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이런 양식을 두고 관료적 효율성의 결정판이라고 하지만, 나같은 사람들에는 일반인을 주눅들게 만드는 관료적인 장애물의 극치인 것만 같다. 우선, 가로세로 구획된 네모칸에 빼곡히 글자들과 그와 짝을 지어서 뭔가를 쓰도록 하거나 체크를 하도록 한 수많은 빈공간을 보면 막막하다. 대체 나에게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아내려고 그러나 싶고. 또 카드 한 장 만드는데 이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건족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서는 거의 적의에 가까운 마음까지 발동한다.

한번 양식을 들여다 보자. 우선 이름, 예의 그 끔직한 주민등록번호, 직장과 집의 주소, 직장 전화번호, 집 전화번호, 핸드폰, 이메일 주소를 요구한다. 신원 확인용이자, 청구서 발송에 필요한 정보라고 보여진다. 물론 짐작이다. 각각의 정보들이 왜 필요한지 설명은 없다. 다시 그 아래 쪽을 보자. 직장명, 부서, 직위, 입사년일? 전직장 근무기간? 이런게 왜 필요하지. 아무튼 더 보자.

이번에는 참고정보라는 란에 있는 항목들이다. 연소득, 실제생일, 최종학력, 취미, 급여일, 종교… 아니 이럴 수가 종교까지 묻다니. 특정 종교가 있으면 카드를 발급 안하겠다는 것인지. 대체 무슨 이유에서 종교를 묻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전세인지, 아파트인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맞벌이 부부인지, 자녀수는 얼만지… 별 시시콜콜한 정보까지도 다 물어본다. 설마 이 모든 정보가 카드 발급에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정보까지 다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아, ‘참고정보’라서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고 해서 안 썼던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이런 란을 양식에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건족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궁금하더라도 절대 창구 직원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마라. 대개 2종류의 반응일 것이다.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아니면 어쩔 줄 몰라 옆사람이나 뒷자리 간부에게 수선을 떨며 도움을 청할 것이다. 두가지 경우 모두, 지켜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양식들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내게는 쉽지 않다. 설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리볼링 신청’이란 란이 있는데, ‘예/아니오’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선택하면 몇 %를 할 것인지 쓰라고 되어 있다. 리볼링이 뭘까? 뭘 굴린다는 영어(레볼루션)와 어원이 연결된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말이니, 나랑 상관없겠거니 하며 무시하지만…. 참내.

이번에는 뒷면의 ‘개인신용정보의 제공·활용 동의서’에 도전해본다. 그래도 문장으로 풀어져 있으니 읽어볼 수 있어 한결 낫다. 내가 앞에서 쓴 신청서 양식의 내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고 활용하는데 동의하느냐는 것인데, 이것을 동의하지 않으면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단다. 동의하지 않으면 발급받을 수 없다면, 앞에서 뭐 빠지게 그 많은 정보를 적어넣도록 했단 말인가? 신청서 첫머리에 <아래에 적게될 개인정보의 제공과 활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카드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써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위한 계약을 위해서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정보가 있고, 또 그것을 다른 기관에 제공·활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싫으면 카드 사용을 하지 않으면 되고. 좋다. 인정하자. 그러나 보다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줄 수는 없을까?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신용정보집중기관, 신용정보업자, 신용정보 제공·이용자 등에게 개인정보가 제공된다고 하는데, ‘신용정보집중기관’이 대체 어디며 뭐 하는 곳인지 알게 뭔가. 법전을 항상 옆에 끼고 다는 것도 아니고, 법전을 보더라도 신용집중기관이 어디인지 나와 있지는 않다.

게다가 동의서에 표기된 제공되는 개인정보나 제공되는 기관의 범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항목을 나열하다가 마지막에 붙이는 ‘등’을 보면 너무 불안하다. 이런거다.

제공할 신용정보의 내용 : 개인식별정보(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직업 등)

제공기관의 범위 : 특정 제휴카드의 범위(해당카드 제휴업체 – 항공, 정유,….., 동문회 등)

그 ‘등’에 들어갈 개인정보는 대체 무엇이며, 제공기관은 또 어디란 말인가? 그 ‘등’에 나에 대한 또 다른 정보가 포함된다고 카드사가 우기면 난 뭐라고 항의할 수 있을까? 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별 일이야 있겠어 하면서 물러나지 않고서는 두건족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이럴 때면, 개인정보를 지키기 위해서 과감히 신용카드를 포기한 내 친구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신용불량자가 넘쳐나기 시작한 몇해 전, 친구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도 군문제로 학교에 적을 두면서도 시간강사도 할 수 없어 정기적인 수입이 없은지라 거의 신용불량자 선상에 해매고 있었다. 매월 결제일을 몇일씩 늦어서 가까스로 들어온 원고료 등으로 이를 겨우 해결하곤 했으니, 당연히 카드사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찍었던 모양이다.

카드사는 친구에게 핸드폰 번호를 요구했다. 연락이 잘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이를 거부했다. 집전화를 알고 있으니, 또 다른 연락처를 알려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카드사와 친구 사이의 공방은 이어졌고, 급기야는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면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발전했다. 친구는 그날로 카드를 꺾었다.

이대로라면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살 날을 맞이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두건이의 뱀발. 공력이 벌써 다한 모양이다. 스스로 보기에도 글발이 처음같지 않다. 게다가 2주 간격의 글 올리는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추운 겨울, 금요일밤의 텅빈 사무실. 정리하고 내려가서 따뜻한 정종이나 한잔 해야겠다.

두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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