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칼럼(cc) 2003-12-28   575

<두건족의 프라이버시이야기> Re: 요청하신 견적서입니다 – 이걸 열어? 말어?

두건이가 뽑는 스팸메일, 워스트 혹은 베스트 5

지난 주, 두건족 이야기를 여섯 번째를 밀린 숙제하듯이 때웠다. 그러면서 글발이 처음 같지 않다고 푸념을 하였더니, 옆자리 친구가 그런다. 즐기라고. 즐긴다. 그렇구나 싶다. 처음 두건족 이야기를 쓰면서 낄낄거렸다. 자다가도 이야기꺼리를 생각해내며 미친 놈처럼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런 낄낄거림이 사라졌다.

그런 실의의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나를 낄낄거리게 만들 이야기꺼리가 생각났다.

유레카!

이른바 연말 스페셜 이벤트.

“스펨메일, 워스트 5를 뽑아라!”

온갖 미치고 지랄 같은 세상 소식을 뒤로 하고, 두건족 독자들 한번 같이 즐겨보시라.

어떤 통계를 보니, 하루에 받는 메일의 80%가 스팸메일이란다. 이 정도면, 인터넷를 두고 일컬었던 “정보의 바다”를 빗댄 “쓰레기 정보의 바다”라는 비아냥거림에 공감이 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컴퓨터 켜고 한바탕 스팸메일를 지우는 일을 하고나서야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스팸메일을 지우는 노동은 단순반복적인 지겨운 노동이면서도, 엄청난 집중력과 순간적 판단력을 요하는 대단히 미묘한 작업이다. 사실 오늘 할 이야기는 스팸메일 지우기의 미묘함으로부터 샘솟는다. 그 미묘함이 역설적이게도 오늘 마련된 즐거움이다.

많은 두건족 독자들처럼, 내게도 대책없이 밀려오는 스팸메일을 일일이 지우는 일이 대단한 고역이기 때문에 필터링을 한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보통신부는 스팸메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전쟁의 방편으로 모든 스팸메일에는 ‘광고’라는 단어를 메일 제목의 제일 앞에 적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소위 전문가들은 ‘광고’라는 단어로 필터링을 하면 스팸메일을 상당수 줄일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런데, 필터링이 뭔지,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묻지는 말라. 설명할 자신도 없고, 그럴 시간도 아니다. 그냥 우리 사무실의 김모군과 같은 ‘착한’ 컴퓨터 전문가에게 알려달라면 딱이다.

스팸메일러와 두건족 사이의 두뇌 게임

그런데 여기서부터 스팸메일러와 두건족 사이의 ‘창조적인’ 머리싸움이 시작된다(꼭 두건족만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 싸움의 과정이나 결과는 결코 창조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처음에는 (광고), <광고>, [광고] 정도의 단어를 사용하면 필터링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스팸메일러들은 경험적 학습을 통해 진화했다.

필터링을 뚫고 두건족의 눈 앞에 자신의 메일을 보내기 위해서, (광 고), <-광-고-> [광/고] 등의 수많은 변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두건족들은 필터링 목록에 다시 그 변종들을 등록하고. 다시 새로운 변종과 필터링의 목록…. 게임의 룰이라는 것이 너무나 단순해서, 그 룰을 지키면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임의 수는 처음부터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연말연시에 갈 곳 없고 만날 사람없어 심심하면, 얼마나 다양한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는지 한번 시도해보라. 뭐, 조리퐁 갯수도 재미로 센다고 하던데, 그보다는 훨씬 지적 자극이 되는 창조적인 게임이 될것이다.

앗! 나는 이 순간 여기에서 갑자기 ‘공진화(Co-evolution)’의 진리를 발견했다. 스팸메일러와 두건족의 치열한 머리싸움, 그리고 이 싸움 중에서 서로 함께 변화·발전하는 모습. 이것은 인류가 항생제 페니실린을 만들어낸 이후에 시작된 바이러스와 인류 사이의 전쟁과도 같다. 인류는 더 강력한 항생제를 만들어내고, 바이러스는 항생제에 저항할 수 있도록 자신의 유전자를 바꿔내며 저항했던 싸움. 의학자들은 이 싸움에 끝이 있을지 의심스러워 하고, 두건족은 스팸메일과의 전쟁에 끝이 있을까 의심한다.

그러나 스팸메일이 필터링을 통해서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리고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서도 안된다. 일단 원리적으로 외국에서 날라오는 스팸메일에게 ‘광고’라는 단어를 기대할 수는 없다. 국경이 없는 것이 인터넷이니까. 나는 최근에 남아프리카의 어떤 부인이 보낸 영문 메일을 받았다. 큰 다이아몬드 광맥을 발견했는데, 어찌어찌 되서 남편이 구금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어려움을 넘길 수 있도록 자신들을 조금만 지원해준다면, 나중에 후하게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알게 뭔가? 내 관심은 내 메일주소를 어떻게 알았냐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영문 메일을 읽게 된 것에는 가슴 철렁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내게 영문으로 된 메일이 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메일은 제목도 읽지도 않고 삭제를 한다. 그러나 일 때문에 외국 출장을 한번 다녀 온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후속사업 논의를 위해서 보내 준 메일을 별 생각없이 덜컥 지워버린거다. 한동안 사업은 지연되고, “영문으로 된 메일 제목이면 모두 지워라”라는 내 스팸메일 삭제 원칙도 타격을 입은 것이다. “영문으로 된 것 중에도 스팸메일이 아닌 것이 있다”라는 예외 조건이 붙고 나니, 의심이 될 만한 것은 하나씩 열어보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광산 부인 메일이었다. 스팸메일 지우기의 미묘함은 이렇게 해서 그 복잡함을 더해 간다.

‘Re : 부탁하신 견적서입니다’ – 열어? 말어?

그런데 미묘함의 절정은 따로 있다. 영문 등의 외국어로 본 메일도 아닌 것이, ‘광고’라는 단어도 달지 않고 필터링을 뚫고 내 컴퓨터 모니터 안으로 고개를 내미는 스팸메일을 골라 내는 일이다. 불법을 불사하겠다고 ‘광고’ 머리말을 달지 않은 이놈들은 대담함과 함께 메일 제목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는 대단히 교묘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Re: 부탁하신 견적서입니다’. 이 스팸메일에 당해본 경험이 없는 사무직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처럼 자신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아, 어쩌란 말인가? 내가 견적서를 요청한 적이 있었던가? 무슨 견적서일까? 혹시 스팸메일이라고 무시했다가 큰 일 치루는 것 아닐까? 결국, 클릭! 이런 ×쉐이들.

두건이가 뽑은 올해의 스팸메일, 워스트 5!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 은유와 상상력에 있어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들도 있다. 그래서 결국 나로 하여금 메일을 열어보도록 하고 만든다. 대∼단해요 자 여기에서 두건이가 뽑은 올해의 스팸메일 워스트 5를 발표하도록 하자(사실 ‘베스트’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감탄스러운 것들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선택했다). 여기서 베스트 5를 뽑는데 도움을 준 주위의 동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받은 최악의 스팸메일을 열어보았을 때 경함한 치떨림도 불사하고, 스팸메일 제목을 기억해주었다.

5위 :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누구더라? 메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자니 기억이 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긴가민가 고민에 거듭하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열어볼라치면 아….. 이그 놈들을…. 이런 스팸메일은 차라리 아는 사람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 더 속편하다. 그냥 고민없이 열어보고 욕이나 한바탕 해버리면 끝이니까.

4위 : 동창회 있다. 꼭나와라∼

이런 스팸메일은 동창회라는 것을 쓸데없는 인연을 엿가락처럼 늘이는 것 쯤으로 이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다른 유혹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아려한 추억이 그립거나, 잊지못한 그/그녀의 얼굴이라도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제목이다. 특히나 오랜 솔로생활을 청산하고자 예전 졸업앨범을 펼쳐 혹시나 내 짝이 될만한 사람이 있을까 살펴본 자들에게는 이런 스팸메일은 꽤나 치명적이다. 이 즈음 되면 스팸메일은 인간에 대한 혐오와 미움이 싹트는 씨앗이 된다. 너무 과한가?

3위 : 책상서랍에 팬티 치우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스팸메일이 어찌 포르노를 외면하겠는가? 스팸메일의 역사는 인터넷 포르노의 역사와 나란히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많은 스팸메일이 자신의 정체를 속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포르노 스팸은 너무나 당당하다. 자신이 포르노 스팸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제목을 뽑으면 뽑을수록 그것을 열어볼 확률이 높다는 어느 ‘페미니스트’의 갈파가 새롭다. 그러나 이 스팸메일은 어떤가? 누구라도 포르노 스팸메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절제의 ‘미학’을 가졌다. 그 절제 속에서 상상이 꿈틀거린다. 필터링 항목에 ‘팬티’라는 단어까지 추가해야한단 말인가?

2위 : 입금확인 메일입니다

이것은 ‘Re: 요청하신 견적서입니다’ 버전의 최신 변종 스팸메일이다. 견적서 스팸이 업무적 긴장감을 파고든 메일이라면, 입금확인 메일은 그와는 또다르게 혹시나 하는 횡재를 갈망하는 나약한 심성을 공략한 치사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난데없이 입금이 되었다는 메일에 반신반의함에도 불구하고, 밑질 것 같다는 심정으로 클릭을 해봤다. 그러나 무엇이 떴을 것인가는 각자 상상에 맡긴다.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은 신만이 행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놈의 스팸메일러들! 천벌을 받을지다.

1위 : 우리 부부는 그 쪽 분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무진장 고민했다. 5위에서 2위까지야, 내 마음대로 정한다고 해도 뭐가 어떠냐 싶지만. 1위는 좀 다를 것 같다. 1위에서 “아하!” 하는 공감을 얻어내야, 내멋대로 뽑은 5∼2위가 그런대로 신빙성을 얻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결국 선정주의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보라, 3위와는 또다른 절제의 ‘미학’을! 모든 언론을 스포츠신문화(化)시킨 ‘스와핑’ 사건보도의 후광을 얻고 나타난 스팸메일. ‘불건전 정보’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날고 뛴다는 정보통신윤리위원일지라도, 이 메일을 걸러낼 필터링 단어를 집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단어들로만 구성된 스팸메일 제목. 아, 신이시여 어찌 이런 자에게 이와 같은 머리를 주셨나이까?

그럴싸했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름대로의 워스트 5를 뽑아보라. 생각보다 재밌을 것이다. 물론, 나처럼 뭐 낄낄거릴 것 없어 찾고 있는, 할 일 없어 심심한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올해 이 두건이의 낄낄거림에 동참해준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 전한다. 내년에도 두건족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노력해보겠다. 멋지고 좋은 새해 맞이 하기를!

아, 끝내기 전에 아쉬움이 남는 것 하나 있어서. 워스트 5를 뽑기 위해서 나는 11월부터 스팸메일을 모았다. 물론 ‘광고’의 필터링을 뚫고 들어온 것들이다. 5위 안에 들지는 않았어도 제법 쓸만한 놈들이 상당했다. 특히 막판 1위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탈락한 것도 하나 있다.

‘형, 준호인데…’로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한동안 연락이 끊긴 후배의 이름으로 온 메일이라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열었으나, 쩝. 내 허망함은 순간 분노로 변해서 워스트 1로 오래전부터 찍어두고 있었으나, 다른 두건족 독자의 공감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 같아 막판에 포기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면 부르르 떨린다.

이놈의 스팸메일러들! 새해에는 너희들에게 기억력 감퇴와 무기력증이 찾아오기를!

두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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