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기타(cc) 2006-10-24   1698

[참여연대-한겨레 공동기획] 피도 눈물도 없는 채권추심

“장기라도 팔까” 3백만명 ‘마음 고문’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상인 안토니오에게 3000다카트를 빌려주면서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는다. 빌린 돈을 기일 안에 갚지 못하게 된 안토니오는 생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빚을 이유로 처벌을 하는 행위는 금지됐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채무 불이행을 죄로 간주하는 ‘샤일록의 논리’가 배어 있다. “가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장기매매 스티커를 보고 있노라면 내 것도 한번 팔아볼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라는 한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의 말에는 삶을 위협받는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집·회사 찾아와 협박·폭행 당해도 속수무책

250만원의 신용카드 빚을 지고 있는 김아무개(35·여)씨는 채권추심업체인 ㅇ캐피탈로부터 매일같이 빚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를 받는다. 김씨는 두 달에 나눠 갚겠다고 했지만 추심업체 직원은 15일 안에 갚으라며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어머니 직장에까지 전화를 걸어 집과 월급을 압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파악한 올 6월 말 현재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297만여명이다. 일단 채무불이행자가 되면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는 채권추심이 따라다닌다. 빚 독촉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채권자에게는 전횡과 같은 권리만이, 채무자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의무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반말에 욕설은 기본이고 회사나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려 창피를 준다. 대표적인 불법추심 유형은 전화·방문 등을 통해 불안·공포감을 조성하거나 제3자에게 채무사실을 알리거나 협박·폭행을 가하는 것 등이다.

금융감독원이 사금융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2003년 46%, 2004년 71%, 2005년 39%가 불법 채권추심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정상 채무자에 비해 불법추심 피해가 2~3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 시민단체의 조사 결과는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금융채무 사회책임연대’가 대구와 부산지역의 금융채무 불이행자 28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6월 발표한 결과를 보면 불법추심을 한번 이상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80%가 넘었다.

추심업체 금품 주고 정보 빼내는등 불법 일쑤

추심 과정에서 채무자의 개인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신용정보회사가 공무원 등과 짜고 불법을 저지르는 사례도 드러났다. ㅎ신용정보회사 전 직원인 강진욱(가명)씨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채무자의 직장, 가족 등을 확인하기 위해 동사무소 공무원들에게 금품을 주고 직인도 찍지 않은 주민등록 초본을 한꺼번에 1000장까지 발급받거나, 심지어 의사나 약사에게 돈을 주고 채무자의 의료보험 가입 여부를 조회해 채권추심에 이용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신용정보법과 대부업법에 형사처벌 규정이 있는데도 채권추심업자 등의 불법추심 행위가 실제 처벌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유사 금융기관의 불법추심 관련 상담 건수는 274건이지만, 수사기관에 통보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김활 금융감독원 검사역은 “법규정이 다소 모호해 처벌 대상이 되는지 판단하기 어렵고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불법추심을 경험해 고발을 해도 법적·도덕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는 채무자로서는 채권자가 합의를 요구할 경우 이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헌욱 변호사(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실행위원장)는 “불법 채권추심은 피해자인 채무자들이 직접 나서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민생침해 사범으로 보고 엄단하려는 사법 당국과 금융감독 당국의 의지 없이는 근절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면책 통지안돼 또 “돈 갚아라” 52%

파산등 결정뒤에도 ‘어이없는’ 추심 잇따라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은 채무자에게도 채권 추심이 계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서아무개(37)씨는 지난해 3월 서울지방법원에서 파산 및 면책 결정을 받았다. 그해 4월 초 서씨는 채권사에 면책 증명원과 확정통지서를 보냈지만 얼마 뒤 채권사 중 하나인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서씨에게 채무를 갚으라고 독촉하는 등기우편을 보냈다. 서씨는 항의 전화를 걸어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자신의 신용정보를 조회한 서씨는 면책받은 채무를 내용으로 하는 채무 불이행 정보가 또다시 등록돼 있음을 발견했다. 참다 못한 서씨는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신청했고, 한국자산관리공사는 그때야 관련 정보를 삭제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달 이 채권이 부실채권을 매각하기 위해 설립된 유동화전문회사인 ‘ㅎ유동화전문’으로 옮겨졌고, 급기야 지난 1월에는 채권추심을 위임받은 ㄱ신용정보회사에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또 날아들었다.

지난해 대법원의 의뢰를 받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조사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면책받은 사람의 89%, 변제계획 인가를 받은 사람의 60%가 서씨처럼 계속 채권추심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주로 일선 추심업체 등에 면책 사실이 제대로 통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원은 지난해 9월 ‘면책자 클럽’ 등 시민단체의 탄원을 받아들여 면책 확정결정이 나면 곧바로 은행연합회에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예규를 고쳤다. 은행연합회는 이를 토대로 신용정보상의 연체 정보를 일괄 삭제하고 회원사들에도 면책사실을 통보한다. 하지만 여전히 본사에서 각 지역사무실이나 추심업체에 면책사실을 제때 통보하지 않아 문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조사에서 면책 이후 채권추심을 받은 경험자의 52%가 “(채권 추심업체가) 통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응답했다.

법률 해석상의 혼란도 이런 행위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김남근 변호사는 “법원의 면책 결정은 빚을 갚을 책임이 없어지는 것일 뿐 빚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다수의견이다 보니 계속 빚 독촉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또 현행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로는 면책 뒤 채권추심을 하는 행위를 처벌할 조항도 없다.

면책=법원은 채무자가 현재 재산이나 장래 수입으로 빚을 갚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파산선고를 내리고,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면책 결정을 하게 된다. 면책을 받으면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

변제계획 인가=일정한 수입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채무자에게는 법원이 생계비를 제외한 나머지 소득으로 원금의 일부를 갚게 하는데, 이때 채무자가 매달 일정액씩 지불하겠다는 계획표를 제출해 법원의 인가를 받으면 개인회생 절차가 시작된다.

개선방향은

‘공정채권추심법’ 도입 강박적 추심 규제해야

우리나라의 채권 추심제도는 지나치게 전근대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채무자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채무자 보호 장치 강화 △불법 채권추심 행위에 처벌 강화 등이 시급한 대안으로 꼽힌다.

채무자의 인권과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을 ‘빚진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활동가는 “정부의 신용카드 남발 정책과 비정규직 양산, 과도한 고금리 등으로 말미암은 생계형 빚으로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양산돼왔다”며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조사를 봐도,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은 이들의 65%가 비정규직과 실업자 상태였다. 금융채무 증가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해이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깊게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채권 추심업자의 준수사항을 엄격히 정하고 채무자의 방어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미국의 ‘공정채권추심법’과 같은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홍종학 교수(경원대 경제학과)는 “미국에서도 채무를 갚을 의무와 채권을 추심할 권리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며 “단지 그 모든 과정이 법에 의해 진행되도록, 채권자가 강박적 추심으로 채무자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공정채권추심법은 채무자 보호를 위해 채권추심자가 ‘할 수 있는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상세하게 나열해 놓고 있다.

특히 채무자에게 채권추심자가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채무자가 원한다면 채권자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 채권추심자는 법률행위를 통고하는 것 외에는 채권자에게 전화는 물론 편지, 대면 접촉 등 어떤 수단의 연락도 할 수 없다.

법원행정처도 지난 2월 과도한 채권추심 행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하는 법률 제정에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재명 기자(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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