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교육 2012-07-20   1546

[언론기획]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장학금 반액이 날아갔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반값등록금을 공약했습니다. 계속된 공약이행 요구에도 묵묵부답이던 정부가 올해부터 ‘국가장학금’을 시행했습니다. 정부는 “등록금 관련 예산이 대폭 늘었다”, “등록금 부담 완화 효과가 약 23%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국가장학금을 받는 학생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요? 국가장학금을 받는 대학생들이 실제 느끼고 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와 반값등록금국민본부는 <국가장학금 분노기> 공모를 시작했고, 받은 글들을 오마이뉴스에 연재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국가장학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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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장학금 반액이 날아갔다’
[국가장학금 분노기③] 바뀐 제도 탓에 혜택 줄어, 200만원 결국 어머니가 마련

산업화 시기, 한국의 대학은 국민들의 계층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학벌’이라는 후광을 얻는 일은 상류층에 속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하류층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했던 당시, 대학은 개천의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어줄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가난을 헤쳐나가고 성인이 된 이후의 삶까지 보장해줄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하면서 기성세대들의 수많은 자수성가 사례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공한 이들의 과거는 흔히 가난과 시련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가난 속에서 힘겹게 공부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한국사회의 리더로 성장하는 이야기들은 종종 진부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진부한 이야기들이 우리 세대에서는 좀처럼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종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돈 없는 고등학생 가출 결심… 결국은 ‘공부’ 선택

저는 지방 소도시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4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는 애초에 느낄 수도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춘기를 겪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줄 몰랐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는 중식감면과 종종 현금으로 지급되는 장학금을 받았고, 중∙고등학교는 등록금 지원과 중식감면을 받으며 다녔습니다.

돈 없는 고등학생으로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저지른 비행이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방황했고, 좀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공부를 선택했습니다. 집과 학교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보자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좋은 대학에 대한 집착은 컸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제 성적을 담보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재수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던 그 1년의 시간은 저에게 ‘명문대’라는 보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합격의 기쁨은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등록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졸업하고 직장을 갖기 전까지는 절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 첫 학기 등록해야 했습니다. 대출 원금은 아직까지 단 한푼도 갚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대학은 희망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졸업만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만 같은데, 정작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매 학기마다 신청한 장학금이 얼마나 나올지 가슴 졸일 수 밖에 없었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과외를 두 세개씩 해야 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 공부는 결국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학 내내 일만 해야 했습니다.

장학금 수혜 발표…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반액’ 장학금

저와 같은 지방학생들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은 막대합니다. 학기 중에 쓰는 하숙비와 생활비를 방학 중에 어떻게든 다 벌어내기 위해서 힘든 일을 찾아서 할 수 밖에 없었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서 개강 첫날이 맞이하기 일쑤였습니다.

다행히 매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졸업이 가까워진 지금까지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겨울 장학금 제도 개편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많은 우려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 역시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전액장학금을 받아왔으니 문제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애써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에게 주어진 것은 ‘반액’ 뿐이었습니다. 장학금 수혜 발표가 난 다음날부터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일하는 내내 남은 ‘반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쌓여갔습니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월급, 등록금을 낸다 하여도 남은 돈으로는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에게서 2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받아서 등록금을 납부했습니다. 200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은, 제가 조금 더 힘들게 일하면 한 달 안에 벌어낼 수도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그만한 돈을 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저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빠듯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코끝이 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매번 전액장학금을 받았으면, 한 학기 정도는 등록금 낼 법도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등록금을 모두 장학금으로 해결하여도 저는 방학이 되면 일터로 내몰립니다. 방학 두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한 학기 동안의 생활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장학금을 반액밖에 받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물론 학기 중에도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하지만, 등록금의 절반을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는 학기 중에도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학원도, 어학연수도, 자격증 하나 딸 시간도 없는 처지이기에 학교 공부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은데, 이것마저도 나에게는 사치라는 것인지.

아무도 제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힘들어도 어떻게든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20대 젊은 날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힘들었던 학교생활을 거의 마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편된 국가장학금제도로 인해, 저와 비슷한 후배들이 저보다도 큰 고생을 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이 주거비와 생활비도 모자라 등록금까지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국사회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히 날개가 있음에도 자기 자신보다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탓에 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번도 내가 짊어지고자 선택한 적 없었던 천근만근 무거운 짐들. 이들의 짐을 덜어주는 일을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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