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일반(cc) 2000-04-03   936

작은권리는 짬뽕이다

작은권리를 찾자-3주년을 돌아보며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3주년을 맞았다. 3주년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글을 부탁 받았는데 얘기 거리가 없다. 뻣뻣한 연대기 아니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써야할 지, 사람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활동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막막하다. 더구나 ‘네티즌의 기호’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니!

항상 뭔가를 써야 할 땐 ‘말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반대로 말로 할 땐 ‘쓰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 이 필설(筆說)의 빈곤이란. 내가 아는 것은 3년의 채 반도 안되기 때문에 한구석에 적당히 편한 마음을 먹는다.

96년 참여연대는 ‘공익소송센터'(당시 소장: 안영도 변호사)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보편화된 개념이 아니었던 공익소송은 ‘사적 이익 대변’ 기능에 머물러 왔던 소송수단을 공익적인 이슈에 접목시켜, 시민운동의 구체적인 성과물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익소송센터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은 없고 단지 소송 수단만 있는 취약점을 드러냈으며, 참여연대의 각 활동단위가 사업과 관련한 공익소송을 자체적으로 진행하자 자연스럽게 그 존폐의 문제가 검토되었다. 그러나, 문제의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민운동의 유력한 무기로서 소송수단을 활용하는 일은 각 활동단위별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법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익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그 해답으로 시작된 것이 ‘작은권리찾기운동’이다.

‘작은권리찾기운동’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제안하고 상상력을 제공한 사람은 박원순 사무처장이었다. ‘작은권리’라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권리면 권리지 작은권리는 뭔가?’ ‘뭐가 작은권리고 뭐가 큰 권리인가?’ 그 배경에는 아마도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사회가 발전하고 권리의식도 발전하고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큰 권리는 그럭저럭 보장되고 있다”. “그렇지만 일상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으냐”. “법·제도가 미처 정하지 않은 것들도 있고 또 정해져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룰을 지키지 않는 사회 아니냐. 시민운동이 이런 것들을 들추고 대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시민 있는 시민운동이 된다”. 처음엔 약간 어색했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간결하게 활동의 핵심 취지를 관통한 이 이름은 ‘명 카피라이터’인 박원순 사무처장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것이었다.

97년 3월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출범하면서 김칠준 변호사가 1년의 안식년 동안 유학을 반납하고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의 실행위원장을 맡아 상근을 하였다.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칠준 변호사의 상근 활동이 큰 힘이 되었다. 이즈음 참여연대 활동가들 사이에 김칠준 변호사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한가’ 였다. 변호사답지 않은 친근한(?) 외모와 좌중을 사로잡는 격의 없는 ‘수다’가 비결이었다. 그 때문에 붙여진 닉네임이 ‘아줌마’ 또는 ‘칠준 언니’이다. 방송일 등 한동안의 외도를 접고 다시 참여연대로 귀환한 ‘칠준 언니’가 펼칠 수다 마당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97년에 가장 인상적인 사업은 ‘한겨레 21’과 함께 했던 ‘작은권리찾기’ 기획 캠페인이었다. 97년 5월부터 98년 3월까지 총 40회에 걸쳐서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에 접수된 각종 권리침해의 사례와 구제에 관한 내용으로 연재된 한겨레 21 캠페인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98년 들어서 참여연대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시민들이 기대감이 커지면서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로의 상담문의가 쇄도하였다. 20여명의 상담 자원활동가가 있었지만 충분한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이들로는 밀려드는 상담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상담의 홍수 속에 간사도 자원활동가도 넋이 나가 흔들릴 즈음 홀연히 나타나 이를 감당한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정의로운 예비 법조인들이었다. 그들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특유의 사투리와 큰 목소리로 밤늦게까지 남아 밀린 상담을 처리하던 열정적인 이모 연수원생이다. 지금 그는 검찰을 국가 공권력의 중추로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98년말에 밀려드는 상담과 격무에 지쳐 끝내 담당 간사가 쓰러져 입원하는 사태 속에도 ‘지하철 4호선 안사 터널의 부실시공에 대한 감사청구’, ‘수도권수해주민권리찾기 결의대회’ 개최 및 분쟁조정, ‘학습지 회사들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공정위제소 및 보증금 반환청구소송’, ‘불량 씨티폰 기본료 환불운동’등 굵직한 기획사업들을 진행하였다. 이즈음 작은권리찾기운동의 최대 성과는 아파트 입주자들의 권리찾기 운동을 ‘아파트공동체연구소’라는 조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아파트 공동체연구소의 출범은 그간 사회적 관심의 영역밖에 놓여 있던 아파트 관리비, 하자, 주민자치기구운영 등의 문제를 시민운동의 이슈로 전화시킨 것이며, 나아가 생활운동이자 도시공동체운동으로서의 아파트운동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근 실무력과 젊은 실행위원들이 충원된 99년,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어느 때 보다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책임을 제기한 ‘지하철 2호선 운행지연사고 손해배상 소송’의 승소는 지하철 안전사고 및 운행지연과 관련한 첫 승소로서 안이한 대중교통서비스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민간인에 대한 검찰의 사찰활동에 대한 국가상대 소송’에서의 승소 또한 공권력의 반 인권적 불법행위에 대한 법적 통제의 가능성을 확인시킨 사례였다. 전파사용료부과처분 취소소송과 법개정청원을 통해 휴대폰 이용자들이 부당하게 부담해 왔던 매년 2천 4백 억의 전파사용료를 폐지한 것은 99년 작은권리찾기운동의 최대 성과였다. 또한 10년 이상 소음에 시달려 왔던 김포공항 인근 주민들을 대리한 ‘김포공항소음피해집단소송’은 국가 환경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촉구하는 중요한 문제제기이다. 그밖에도 정보공개제도 운영실태 모니터 보고서 발간, MBC 여성시대와 함께 한 ‘숨은권리찾기’ 캠페인 등 크고 작은 여러 성과들이 있었다. 특히 4월에는 MBC 여성시대와 함께 한 캠페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지난 3년을 총 결산하게 되었다.

이후 작은권리찾기운동은 환경, 공공정책, 행정, 소비자 등 다양한 분야로 더욱 확대·심화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피해상담과 소송 중심의 단순한 사업패턴을 넘어 시민사회의 제반 공공이슈에 개입하는 ‘공익운동’으로의 발전을 목표하고 있다. 또한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억울한 한 사람의 사연도 그냥 흘려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문제에 직접 나서지 못할 지라도, 그들의 길눈이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작은권리는 ‘짬뽕’이라는 자조 섞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정치,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운동도 아니고 딱 떨어지는 개념도 일관된 분야도 없는 일을 하면서 활동가로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리는 아닐 듯 싶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민운동이 시민사회에 더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변 기능은 물론 생활의 대변자도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작은권리찾기는 꼭 필요한 시민운동이다. ‘짬뽕’이 아닌 ‘깨소금’처럼 말이다.

박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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