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주거 2014-11-25   1284

[나는세입자다-시즌2] 대기업 다니는 아들 둔 아버지, 왜 반지하에서 살았나

< 나는 세입자다 – 시즌2 우수상 수상작 >

대기업 다니는 아들 둔 아버지, 왜 반지하에서 살았나

반지하 방 덕분에 얻은 창 하나의 소중함 

이영미(organ) 님
 

가계부채가 1.200조 원을 훌쩍 넘어서 가파르게 급증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저 부동산 시장 활성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빚 내서 집 사라”는 정부의 대표 정책인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를 완화시킨 데 이어 2주택자 전세 소득 과세를 철회하고 재건축완화 정책도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전-월세는 치솟기만 하는데, 정부는 집 없는 세입자들을 위한 정책에는 사실상 손을 놓아 버렸습니다. 
세입자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온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전국세입자협회민달팽이유니온이 오마이뉴스, 국회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과 함께 지난 2012년에 이어 무주택 세입자 시민들의 수기 공모전 < 나는 세입자다 – 시즌2 >를 공동기획해 지난 8월 1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진행했습니다. 출품작 중 대상 1명, 우수상 2명, 장려상 5명을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수상작들을 비롯해 출품작들을 차례로 싣습니다. [편집자 말] 
* 시상식 & 토크콘서트 : 11월 27일(목) 오후 7시, 오마이뉴스 대회의실 (아래 안내 참고)

어제는 치과에 다녀왔다. 오래전에 앞니가 깨졌는데 그때 때운 부분이 닳아서 다시 때워야 했다. 일이 잘 안 될 때 웃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밤에 쓰레기를 버리려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앞니 3개가 부러져 피가 흘러도 거울을 보고 웃었다. “괜찮아! 영미야, 괜찮아! 머리를 안 다친 것만도 어디니?”하고 나를 도닥거렸다. 앞니를 다시 때운 다음 거울을 보고 나는 다시 웃었다.

“와우! 감쪽같네. 이렇게 틈날 때마다 때우면 앞으로 임플란트 같은 것 안 하고 곱게 늙겠네.”

그렇게 나는 웃으면서 살아간다. 말을 잘못 알아들어 소통이 어려워도 웃으면서 “다시 말해 줄래요?”아니면 “좀 적어 주세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웃으면서 살다 보면 날마다 웃을 일이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세입자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웃기기보다 아련하고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추석이다. 꼭 이맘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막내라서 아버지는 나를 유달리 귀애하시고 편애하셨다. 아버지는 일본과 무역업을 하느라 무역선을 가지고 계셨고, 부산에서 제일가는 부자 동네인 광복동과 붙은 보수동의 동장을 지냈고, 학교에서도 육영회장으로 활동하셨다.

일 제 시대에 큰언니와 큰오빠는 매일 양복과 양장과 구두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는데 이러한 부귀가 절정일 때에는 아쉽게도 나는 세상에 없었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아버지와 20년을 함께한 친구가 일본에서 회사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잠적해 부도가 났을 때였다.

서 울대와 서강대를 다니면서 서울에서 자리 잡은 오빠들과는 달리 막내인 나는 부모와 같이 살면서 전세에서 월세, 다시 전세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래서 그 방면에는 도가 텄다. 결혼할 때까지 부산과 서울에서 이사 다닌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결 혼하고 나는 내 집마련을 위해 13번을 이사해서 소도시에 처음 세워진 고층 아파트 한 세대를 분양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산골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시어머니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친정엄마와 교대로 밤새도록 주공아파트 분양의 줄을 서서 시부모님을 도시로 이사하게 도와주었다.

이후 의료보험도, 집도 없이 30평 넘는 아파트를 떠나와 빈 손으로 9평 원룸에서 살아야 하는 홀로서기를 했을 때에도 한동안 잠들었던 노하우가 다시 살아났다. 여기 저기 이사를 다닌 끝에 5년간 임대하는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임대로 살다가 결국 내 집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20년 동안 15번 이사… 셋방살이 기억 서러워 

IE001487019_STD.jpg
 2011 년 8월 정부가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들썩이는 전세시장을 잡겠다며 올해 들어 세번째 전, 월세 대책을 내놨지만 부동산 현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전세대란에 대한 우려와 함께 전세시장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시 들썩이는 분위기다. 사진은 21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부동산. (자료사진)
ⓒ 연합뉴스  

이 소도시에서만도 나는 20여 년 동안 이사를 15번 정도 했다. 세입자로 살면서 참 많은 애환과 우여곡절이 있지만, 아버지와 관련한 셋방살이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은 아픔이다.

아 버지는 한 번씩 화장실에 오고갈 때, 피를 한 대접씩 쏟으셨다. 치질인가 싶어서 어머니는 늘 기저귀를 아버지 팬티에 대고 꿰매셨다. 통증 없이 피만 나왔는데, 어느 날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이미 많이 진행된 췌장암이라고 하였다.

전세이긴 했지만 독채로 살던 부산을 떠나 서울 동대문 묵동의 반지하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서울에서 자수성가한 오빠들이 있었지만, 아들 집에 세 식구가 갑자기 얹혀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병이 든 시아버지와 중증장애인인 시누이를 합한 세 식구를 흔쾌히 받아줄 며느리는 백에 한 명 있을까 말까다. 보통 며느리는 좋다 나쁘다는 의사 표시보다는 감당이 안 되어 엄두를 못 내기 마련이다.

자 존심을 빼면 시체라는 것이 경상도 사나이의 특징인데, 마산상고를 나와 독자로 자라 일본과 무역한 호쾌한 호인으로 사신 우리 아버지는 유독 더하셨다. 그래서 흔쾌히 중병이 든 시부모와 중증장애인 시누이를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닌데 자존심이 꽤 상하셨는지 죽을 때까지 아들집 문턱은 안 밟는다고 말씀하셨다.

췌장암 진단 받은 아버지… 아들집 문턱 안 밟는다고 선언

부 산에 살던 동네와 비슷한 산세가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묵동에 살면서 아버지는 국립의료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나는 시간제로 일하면서 공부하는 주경야독하는 생활을 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의사와 오빠들은 수술하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하시고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난 살 만큼 살았고, 이 병은 수술해도 낫는 병이 아니다. 그렇기에 계속 누워서 살아야 하는 데 목숨을 연장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수술을 안 하기 때문에 암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점령하고, 의사는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말했다. 퇴원하면서 큰오빠네가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하셔서 허락하지 않았다.

“치워라! 이제 와서 뭔 소리냐! 너 집에는 안 간다 안켓나?”

그 지독한 암은 아버지의 자존심도 점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비켜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종내 큰오빠와 어머니의 권유를 물리치고 반지하셋방으로 다시 오셨다. 주인 집은 한 번씩 드나드는 인물이 훤칠한 오빠들을 보면서 수근거리다가 궁금증을 못 참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아드님들 두 명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친아들이 아닌교?”

기 가 얼마나 찼던지 어머니는 그날 밤에 내게 이야기하고 꺼이꺼이 울으셨다. 아마도 이웃사람들은 엄마가 둘째 부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면서 주인집 아줌마는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불러도 가끔 대답을 하지 않는 나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아, 나는 대문 하나 열고 닫는데도 도둑고양이처럼 닫았다. 주인집 마당을 지날 때는 잔디를 밟을세라 소리가 날쎄라 살금살금 걸었다. 공동화장실 쓰는 것도 어려워서 우리는 요강을 하나 구했다.

추석을 엿새 앞두고 잠이 든 아버지가 갑자기 깨어나셔서 말하였다.

“내가 추석은 쉬고 갈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못 가겠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드셨다. 잠이 드신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긴 밤을 새우면서 혼자말로 중얼 중얼거렸다.

” 이보쇼! 우리가 자식공부시킨 것 말고는 해준 게 뭐 있는교?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안 모신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하면 무슨 부모인교? 그러지 말고 이 세상 떠날 때라도 자식한테는 좋은 모습 보이고 떠나야제… 이 반지하 셋방에서 숨 거두면 주인집 보기도 그렇지만, 우리 자식들한테는 평생에 불효자라는 낙인을 찍어주는 게 된다 아잉교? 이 셋방에서 죽으면 안된다 아잉교!”

나도 잠이 든 아버지의 앙상한 뼈만 남은 다리를 쓰다듬으면 말했다.

“아부지! 우리 큰 오빠집에 가자! 나도 따라갈게! 거기 가면 덥지도 않고 엄마도 좀 편하고…”

정신이 든 아부지가 갑자기 한마디하셨다.

“불러라! 나 델꼬 가라고!”

큰 오빠는 ‘부랴부랴’ 지하셋방으로 왔고 아부지를 업고, 고층 아파트인 자기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큰오빠 집으로 간 지 하루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 아버지 장례식에 부산에 있는 고모와 언니들도 모두 올라왔는데 아버지가 임종 하루 전까지 반 지하셋방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오빠 내외를 혹독히 다그쳤다.

“내가 큰아들 집에서 죽으면 니하고 막내는 아마 델꼬 살 것 같다…”

이웃에서는 장례식을 전후해서 소리가 나니깐, 무슨 큰 재산 싸움을 하는 줄 알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대기업에 다니던 큰오빠의 손님으로 장례식 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큰아들 집에서 죽으면 니하고 막내는 아마 델꼬 살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온 거야! 큰아들 생각해서 온 게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데 니하고 막내가 살아갈게 막막해서…”

그 러나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한 달이 지나도 큰오빠는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반지하셋 방에서 몇 년 동안 그대로, 내가 시집을 갈 때까지 살았다. 어머니와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노트를 묶는 부업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성당에 열심히 나가시고, 나는 인사동에서 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영성적으로 종교에 의지하여 암담한 현실에서 자유로워져 가고 있었고, 나는 학문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반지하 셋방에 살고 있고 달라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우리는 희망의 날개를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시퍼런 자존심은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큰오빠 집에는 명절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밝게 웃으면서 자급자족하려고 노력했다. 오빠들은 더 이상 제사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하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 기일이 되면 성당에 미사를 바쳤다.

마치 한 뿌리에 나무는 한 몸으로 자라더라도 세월이 지나가면 여러가지가 생기고 그 가지의 끝은 서로 닿지 않는 것처럼 가족들도 그런 것 같다. 가끔 바람이 불면 바람의 힘으로 가지 끝들이 서로 스치듯이 가족들도 경조사가 있으면 만나고, 달빛이 비치거나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듯이 좋은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만난다. 세월의 힘은 한 핏줄이라도 결국은 떨어지게 만든다.

신문지 한 장보다 작았던 창이 있던 반지하 셋방에서 어머니는 참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점점 처녀가 되어가던 나를 걱정했다. 나는 잠깐만 스치는 그 햇빛 덕분에 한낮의 따사로운 햇빛을 종일 받아도 싫증을 안내고 셋방이라도 온전한 창 하나가 있는 방 한 칸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알게 되었다.

볕이 드는 따스한 남향의 창 하나면 만족

IE001749789_STD.jpg
 지금은 창에 햇빛과 달빛과 별빛도 들어오고 하루종일 통유리로 된 베란다로 볕이 오는 집에서 나는 산다.
ⓒ http://pixabay.com  

지금은 창에 햇빛과 달빛과 별빛도 들어오고 하루종일 통유리로 된 베란다로 볕이 오는 집에서 나는 산다. 작은 아파트이지만, 그 베란다 햇빛을 잘 받고 잘 살라고 올망졸망 씨뿌려 키우는 화초도 몇 백 개정도 된다.

부 동산 전문가 언니가 가끔 내게 소형 아파트가 귀해 전세가 잘 나가니, 집을 전세로 내놓고 다시 세입자가 되어 돈을 키우라고 권유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일반인보다 몇 배나 많은 이사를 다녀서 지친 것이 아니다. 그저 볕이 드는 따스한 남향의 창 하나면 만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입자다 시즌2, 시상식&토크콘서트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