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희망본부 칼럼(cc) 2003-10-09   1004

<두건족의 프라이버시이야기> 비디오가게 컴퓨터는 기억한다. 당신이 빌린 에로비디오를

사무실의 동료들, 한두명씩 나를 ‘두건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음, 좋은 일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까. 아, 오늘도 내 족속 한 명을 발견했다. 역시나 그자도 발신자표시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은 자다. 흐흐. 자, 두건족의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요즘, 나는 만화책을 많이 빌려본다. 뒤늦은 귀가 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구불구불 걸어올라가다 만나는 도서대여점 불빛. 지치고 힘들지만 곧바로 잠자리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쉬우면, “딸랑” 소리를 내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최근 열독하고 있는 <21세기 소년> 이라는 일본 만화를 한두권 집어든다.

어릴 적에 꾸며낸 허당된 공상과학 이야기가 현실이 되며 겪는 주인공들의 고난과 투쟁을 그리는 기발한 상상이 흥미롭다. 그 내용 중에 두건족의 관심을 끄는 것은 2010년경의 사회가 감시와 통제의 사회로 묘사된다는 것이었다.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일부 두건족으로부터 선지자로 모셔지고 있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생각난다(언젠가, 조지 오웰님과 그 분이 예언하신 ‘큰 형님’의 강림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만화를 고르고 나면, 컴퓨터 앞에 앉은 여자가 묻는다.

“두건이 인데요”.

“어, <21세기 소년> 10권은 지난 번에 보셨는데요?”

너무 훌륭하다. 간만에 빌리러 가서, 대체 어디까지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만화들. 이제 걱정할 것이 없다. “저, 이것 몇 권까지 봤죠?” 그러면 된다. 대여점 주인이 친절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나보다 더 내 만화 독서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물론, 그의 기억에 의한 것은 아니다. 도서대여점 카운터마다 떡하니 높여 있는 컴퓨터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안에는 내가 본 만화에 대한 모든 기록이 들어 있다. 무슨 만화를 봤는지, 언제 봤는지, 또 얼마나 연체를 했는지… 고맙게도 이 집 주인은 연체에 대해서 관대하다. 그에게는 축복을, 그 집 컴퓨터에게는 가끔 바이러스를.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도서대여점은 비디오가게를 마주보고 있다. 나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왼쪽 도서대여점, 오른쪽 비디오가게, 선택을 고민한다. 결혼을 하고 나니, 만화 책이 비디오보다 여러모로 좋다. 특히, TV를 사랑하는 내 아내로부터 비디오 시청을 위해 TV를 빼앗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서로가 마음에 들어하는 비디오를 고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무원칙적 타협으로 인해, 12시가 넘어선 밤에도 비디오를 2개나 빌려야 할 경우도 생긴다.

그 비디오가게에도 앞 집과 같이 컴퓨터가 있다. 그 안에는 내 이름, 주민등록번호(도대체, 이것이 왜 필요한지 설명도 없다), 전화번호, 내가 본 비디오 제목들, 내 연체 기록 등이 들어 있다.

“두건이씨, 연체된 것이 있는데요. 연체료 1,500원입니다”.

이집은 연체에 대해서 에누리가 없다. 연체료도 깍아주지 않는다. 일단, 시치미를 떼본다.

“예, 그럴리가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그 집 컴퓨터는 자신의 기억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따따닥. 주인은 내 연체 정보를 조회한다. 가끔씩 가게를 비워두고 돌아 다니는 그 집 주인처럼, 컴퓨터의 기억력도 대충대충이면 좋을텐데.

“××일날 빌려간, <원조교제>를 3일 늦게 주셨는데요”

헉. 그것이 말이지…. ^^; 다행히 비디오가게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에로비디오 제목을 크게 외칠 것이 뭐냐. 사실 크게 외친 것은 아니지만, 붉어진 얼굴로 듣기에는 동사무소에 걸린 앰프 소리만 같다. 저 안에 들어 있을 민망스러운 비디오 제목들. 바이러스는 도서대여점 컴퓨터가 아니라, 이 집 컴퓨터에 걸릴 일이다.

결혼 전에 1, 2년 간격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이 곳 저 곳의 비디오 가게의 컴퓨터에 남겨진 내 기록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뒷골이 땡긴다. 그 곳마다 내 이름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 내가 봤던 몇 십개에서 몇 백개의 비디오 제목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민망스러운 에로비디오 제목들도 포함해서. 에로비디오 제목들이 패러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있어 가끔 재밌기는 하지만, 내 이름 아래에 그 것들이 쭉 도열해 있다고 생각해봐라. 으으…. 게다가 이 비디오가게들이 망하거나 해서, 그 컴퓨터가 주인의 손을 떠나면 도대체 그 안에 들어 있는 대여기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당신 회사로 당신이 빌려본 비디오 제목 리스트가 배달되어 올지도?

한 개인의 비디오 대여기록이 공개되면서, 정치적 사건으로까지 번진 경우도 있었다. 1987년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로 추천된 보크 판사를 두고 정치권과 여성운동진영 등이 가세한 설전이 벌어졌다. 아시다시피, 미국 연방 대법관이 어떤 성향이 인물이 되느냐에 따라서 미국의 정책―여기서는 여성의 낙태권에 관련된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설전 중에, 한 언론사가 보크 판사가 이용하는 비디오가게에서 그의 대여기록을 뽑아냈다. 그 언론사는 그 사실을 흘리면서, 보크 판사가 포르노 같은 점쟎지 못한 비디오를 빌리지 않았을까 하는 대중적 의혹과 호기심을 부추겼다(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대여한 비디오에 포르노는 없었고, 디즈니와 히치콕 영화만 대부분이었다). 한 개인의 비디오 대여기록을 동의없이 수집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에 해당할까? 또한 그런 류의 대중적 호기심에 대해 관대해지는 것이 옳을까?

갑자기 얼마전 국회 청문회에서 발생한 폭력이 떠올른다. 중고등학교 때의 학생기록부를 흔들어내던 국회의원의 반두건적인 작태들. 직무 수행 능력과 관련없는 중고등학교 때의 성적을 들척이는 것이 인사청문회인가? “이혼 사유가 뭐요? 뭐 때문에 이혼했어요?” 오호, 인사청문회의 새로운 방법론. 이혼사유를 알면, 감사원장의 직무 수행 능력을 알 수 있다. 놀라운 발상이다. 도박판의 화투장 까듯이 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까발기는 것을 실력이라 생각하는 이들을 어찌 해야하나?

두건족, 갑자기 흥분했다. 두건족들은 이런 것을 보면 참지를 못한다. 어제도 두건족 모임에 나갔더니, 이 사태를 두고 한참을 분개했다. 아무튼, 미국 의회는 보크 판사 사건 등을 다루는 청문회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로 1988년에 비디오 대여기록를 보호하기 위한 <비디오프라이버시보호법>를 제정하였다. 인사청문회에서 학생기록부 흔들거나 이혼 사유 묻는, 반(反)두건적 국회 의원들은 도대체가 이해가 안될 이야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우씨,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글을 마치기 전에, 나만의 비법(?)을 하나 알려주어야겠다. 다만, 이것은 이름이 어렵거나 나처럼 혀가 짧아서, 남들이 잘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은 사람들만 쓸 수 있다. 처음 비디오가게에서 계좌를 만들 때, 되도록 발음을 흐린다. 그러면 가끔 주인이 이름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하게 컴퓨터에 입력한다.

“이름이……두건희씨. 맞죠?” (사실 내 이름은 ‘두건이’이다).

아싸!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그 DB와 나를 연결시키기는 힘들다. 하지만 요즘은 실명확인제도를 이용하는 대책없는 가게 주인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일치하는지를 보는 것이다(이것이 주민등록번호의 존재 이유다). 대체 그렇게 집요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이유가 뭘까?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곳은 지문 검색 시스템이나 얼굴 윤곽 검색 시스템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이제는 비디오가게에 가서도 지문을 찍어야 될 판이다. 그리고 짧은 내 혀의 유일한 이점마저 조금씩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다. 슬프다.

두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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