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9-02-13   655

[칼럼] 복지의 강을 따라 진보의 바다로

흐르는 구름이 해를 가릴 수는 없다. 비록 온통 구름에 싸여 희뿌연 하늘이 계속되는 겨울 들녘이라 해도 머리를 들면 구름 너머 창공에는 찬란한 태양이 들녘의 모든 생명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눈부신 태양의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보(progressive). 인류를 진전시켜 왔던 하나의 동력이건만 우리나라에선 어느덧 희화화된 존재가 되고 있다. 정녕 이 땅에선 한 번도 제대로 지배적 가치가 되어 본 적 없었던 이것이, 어느새 낡고 고루한 이름으로 퇴색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19세기 이후 서구 선진국들의 발전사를 보자면, 인간이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제도에 강력히 저항한 것이 진보였고, 이로 인해 많은 충돌과 분란을 만들어 왔으나 결코 소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한 충돌의 역사 속에서 ‘분배적 정의’와 ‘평등’의 진가가 드러나고 비로소 상류계급에 집중되었던 부의 역사가 뒤바뀔 수 있었다. 그러한 분란의 역사 속에서 ‘공동체’와 ‘연대’의 이름으로 안정과 질서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소수의 가치를 위해 다수의 권리가 억압되어 왔던 질곡의 역사가 시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진정한 보수가 없었던 것처럼 진정한 진보도 없었던 가운데, 어느새 진보는 빛바랜 유물로 전락하는 형국이다.


복지(welfare). 사회 구성원들 모두의 ‘행복한 상태’를 개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보장해 주려는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노력의 산물.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나라에선 지극히 왜곡되거나 유치찬란의 개념으로 얼어붙은 지 너무 오래다. 동정과 시혜를 복지의 기본 가치로 이해하는 우매한 지식인. 가난한 하위계층에게 ‘공짜 점심’에 대한 근성을 키워 사회의 암이 될 것이 지극히 우려스러워 최소한의 사회적 부를 쪼개주는 제도로 복지의 본질을 이해하는 천박한 정치인. 복지가 성장을 저해하고 복지에 대한 지출은 비생산적이라는 19세기 인식수준에 머문 대중. 이들 모두 학습과 경험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해낼 수 없는 사회와 시장의 장벽이 있다는 엄연한 현대사의 진리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은 수용되지 않고, 복지보다는 여전히 성장만이 내세워지는 이 허망한 기류가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지속시켜 준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소중함에 대한 가치를 구현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이 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진보의 가치가 누더기가 되었기에 우리 사회의 폭력성은 지속된다. 개발이익의 논리로 도심의 엄연한 상권이 철시되고 어엿한 주택가의 생활터전이 포클레인으로 갈아엎어지고 그 안에서 폭력과 야만이 난무하는 이 현실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에 진보와 복지의 가치가 크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화초가 되었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작은 시냇물로 시작된 강물이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면서 대지를 적신 후 모이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거대한 바다에 이르듯이, 진보의 진정한 가치는 복지제도를 통해 극대화되고 대중화된다. 복지가 보수의 가치 아래 난도질되고 왜소하게 뒤틀어지는 것에 비해, ‘진정한’ 진보의 가치와 결합된 ‘진정한’ 복지만이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반인간, 반생명, 반사회의 면모를 거두는 길이다.


복지의 강을 따라 배 저어 가노라면 진보의 바다가 열리는 이치는 구름에 가렸으나 해가 있다는 사실만큼 엄연한 진리다. 이 땅에 거대한 복지의 강물이 흘러가게 하는 일은 이 시대에 아직도 진보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책무다.












이태수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

*한겨레신문 2월 1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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