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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위원회  l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만들어갑니다

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05
  • 2005.09.10
  • 1289
이번 호부터 60년대의 복지제도에 관해 살펴볼 것인데 이 기간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복지제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간이다. 다시 말해서 60년대는 한국 복지제도 발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였다는 것이다. 50년대의 복지도 오늘날의 복지제도 형성에 미친 영향이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60년대의 전환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미치는 것이고 오늘날 한국의 복지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토대는 6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60년대의 복지는 50년대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60년대의 복지가 50년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거나 그로부터 획기적인 질적 전환 같은 것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60년대의 복지는 짧은 집권기간을 가졌던 민주당 정권기의 모색기 내지 과도기를 거쳐 ’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정세력에 의해 일정방향으로 정리됨으로써 그 이후 나타나게 될 한국 복지제도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60년대의 복지발달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당 정권에서 복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그 이후 집권한 군정세력은 50년대까지 형성되어온 복지제도를 어떤 방향으로 정리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에서는 먼저 민주당 정권기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민주당 정권기과 복지

주지하다시피 민주당 정권은 4월 혁명을 계기로 집권하였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이 4월 혁명에 참여한 학생이나 민중세력으로부터 진정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며 단지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하였다. 4월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항쟁과 그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었지만 그 배경은 보다 복잡하다. 4월 혁명은 50년대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4월 혁명은 대학생들이 주도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게만 규정할 수 없는 점들도 있다. 4월 혁명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출신배경을 보면 대학생들보다는 도시비공식부문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훨씬 더 많다. 이는 이들이 시위대열의 맨 앞에 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주로 요식업종의 배달원이거나 유통업종의 종업원들이었다.

정・부통령 선거시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것이라고 알고 있는 시위에 왜 이들이 전면에 나섰을까? 이것은 4월 혁명이 단순히 부정선거 규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50년대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고발하고 이의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이었음을 의미한다. 4월 혁명 당시 시위의 전면에 나섰던 배달원과 종업원들이야말로 50년대 말 원조의 급격한 삭감과 농업의 피폐로 인해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시빈민층의 형성은 지난 호에서 본 것처럼 ’57년 이후 한국경제가 직면한 구조조정요구에 이승만 정권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했던 민주당 정권은 50년대 말 한국경제가 직면한 구조조정요구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고 이와 함께 복지제도의 재편도 일정하게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물론 복지제도가 그 당시에 분출하고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요구를 적절히 담을 수 있는 것인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부문은 그것이 모인 하나의 전체가 갖는 의미에 의해서도 규정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문 그 자체가 갖는 의미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할 때, 복지부문 역시 50년대 한국의 국가형성 과정이 복지분야에 부과했던 부당한 요구만큼은 올바른 방향으로 교정했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제는 반공전쟁과정에 부당한 방식으로 동원되었던 민중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특히 군경원호대상자들을 올바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적절한 처우를 하며 도시빈민들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는 반드시 오늘날 우리가 복지제도라고 생각하는 제도적 장치의 모습을 빌어 수행될 필요는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제도적 수단이든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여 민중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제도적 형식은 그 다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민주당 정권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역사적 과제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조기에 몰락하고 말았다.

민주당 정권의 복지정책

민주당 정권기의 복지의 전개과정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집권세력 자체가 추구한 정책흐름이며 둘째는 일단의 사회보장전문가들이 전개한 노력이다.

우선 민주당 정권의 복지노력을 살펴보기 위해 복지예산부터 보기로 하자. <표 1>을 보면 민주당 정권이 1960년에 수립한 1961년도 예산에서 정부총예산은 1960년대 대비 약 152억원이 증가하지만 복지예산은 민주당 정권이 60년에 수립한 61년도 복지예산은 정부총예산이 약 152억원 증가하지만 복지예산은 약 5억원이 감소한다. 이에 따라 복지예산이 정부총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56%로 감소하게 되는데 이는 50년대에 복지예산이 정부총예산에서 대체로 4% 이상의 비중을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이다. 이 점에서 적어도 예산에 있어서 민주당 정권의 복지노력은 이승만 정권의 그것에 비해 더 컸다고 하기 어렵다. 또한, 민주당 정권기에 복지담당 정부조직에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55년에 편성된 보사부 조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50년대 말까지 형성된 정부의 복지정책내용 역시 민주당 정권에서 큰 변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표 1> 1950년대와 1960년대 정부총예산과 보건사회부 예산의 추이

- 생략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복지재편과 관련하여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당 정권은 60년 12월에 전국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였는데1), 이것은 각계 대표 및 지역대표 약 300명이 모여 7개 분과(행정기구개편분과, 재정금융분과, 산업구조개편분과, 공기업분과, 국제수지분과, 고용 및 생활수준분과, 지방개발분과)로 나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갖는 대단위 종합학술대회였으며, 대회 마지막 날 열린 종합토의는 대통령과 장면 총리도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7개 분과 중 ‘고용 및 생활수준분과’는 종합토의시의 최종보고에서 모든 근로자의 근로조건 개선과 생활보장을 위하여 사회보장제도의 수립을 제의하고 이를 위해 우선 제도모형을 연구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심의위원회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노동조합 출신 인사들의 적극적인 찬성 속에 이의 없이 통과되어 정부에 이를 건의하게 되었다.

정부가 50년대부터 실업보험의 도입 등을 위해 일정한 노력을 했고 또 사회 일각에서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기행에서 다룬 1950년대 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부가 종합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그 결론으로 사회보장제도의 창설을 직접적으로 건의한 것은 아마도 건국 이래 최초가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 정권의 복지노력은 비록 복지예산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로 나타나지만 내용 면에서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진지하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회보장제도의 도입과 이를 위한 사회보장제도심의위원회 설치 건의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사회보장제도심의위원회 설치 건의가 제기된 것이 60년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제도심의위원회규정(안)이 국무회의로 넘어간 것은 61년 3월이었고 이 규정안의 국무회의 의결예정일 바로 전날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실현이 무산되었다.

사회보장전문가들의 노력

민주당 정권 자체의 복지노력은 이처럼 큰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민주당 정권의 집권기간에 50년대 내내 존재했던 사회보장제도 도입주장의 흐름이 일단의 사회보장전문가들과 정부공무원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추진체를 형성하는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민간 사회보장전문가들의 노력은 자료상 나타난 것으로는 1955년 부산에 설립된 부산노동병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노동병원은 노동조합 조합원과 그 직계존비속 등 가족을 이용대상자로 하여 이들에게 회원증을 발급하고 회비를 받아 운영하였는데, 이 병원을 이용한 노동조합은 부두노조, 기아산업노조, 대한조선공사노조, 이용사 및 미용사 노조 등이었으며 회원은 약 3만 8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부산노동병원의 이러한 운영방식은 사회보험방식을 원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산노동병원은 후에 규모가 커지면서 한국노동병원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당시 이사장은 신영식(愼永植)이라는 사람이었고 총무는 손창달(孫昌達)이었다고 한다. 부산노동병원은 병원 이용자들을 조사 검토하여 1959년 8월에는 「의료보험을 중심으로 한 한국 사회보장제도도입을 권고함」이라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손창달은 그 후 계속 연구를 진행하여 1961년에는 「건강보험제도시안」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바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민간사회보장전문가들의 노력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부에서는 1959년 10월부터 보건사회부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에 「건강보험제도도입을 위한 연구회」(이른 바 ‘목요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들은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이었던 윤유선(尹裕善) 박사였으며, 그 외에 손창달, 양재모(梁在謨), 엄장현(嚴章鉉) 등이 참석했고 참석자는 모두 8명이었다고 한다. 이 목요회를 출발로 해서 당시 보건사회부에서는 의료보험은 의정국에서, 실업 및 노동재해보험은 노동국에서, 공공부조는 사회국에서 각기 연구를 시작하였다. 정부 내에서 결성된 목요회에 부산노동병원 운영에 관여했던 손창달 씨가 참여한 것을 보면 당시 사회보장제도 도입연구를 진행한 사람들은 각자가 일했던 곳은 다소 차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념적으로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쨌든 50년대 말부터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가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민주당 정권기에도 지속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에 의해 시도된 사회보장에 관한 연구는 일정한 연구성과물로 나타났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사회보장 일반에 관한 연구물로는 양재모, 「사회보장제도창시에 관한 건의」(1961)와 손창달, 「현대 사회보장적인 제법규의 고찰」(1961), 손창달, 「세계 각 국의 사회보장일람」(1961)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손창달은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의 최저기준에 관한 국제조약」을 번역하기도 했다(1961).

의료보험에 관한 연구물로는, 손창달, 「건강보험제도 5개년계획시안」(1961)과 엄장현, 「의료보험제도도입에 관련된 제문제에 관한 견해 및 예비권고」(1960), 손창달, 「건강보험제도 5개년계획시안」(1961) 등이 있다. 이 중 특히 엄장현은 「예비권고」에서 당시 국민소득 수준으로 보아 전국 규모의 의료보험제도 실시는 불가능하며 한정된 규모의 의료보험의 모색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재원으로는 비례세 또는 누진세를 주장했으며, 그 외에 사회보장에 관한 연구기구의 설치도 주장했고, 사회보장의 전개방법으로는 건강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을 주장했으며 공공부조와 복지제도는 보완적으로 병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근로기준법 제8장 재해보상규정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한계로 사회보장제도의 수립을 통하여 근로자의 권익보장과 재해위험의 분산 필요성이 높아졌고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1960년과 1961년 양년에 걸쳐 노동재해 및 실업보험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나온 바도 있다. 보건사회부는 1960년에 사업장노동실태조사를 실시하여 「사업장노동실태조사보고서」(1960), 「실업보험관계 노동실태조사서작성」(1960), 「일본의 실업보험법 및 특별회계법」(1961), 「실업보험제도의 현실적 적용문제에 대한 연구」(1961) 등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민주당 정권에서 사회보장심의위원회가 건의만 되고 실제로 설치되지는 못하였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사회보장전문가들의 노력은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는 군사정권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군사정권기에 있었던 한 사회관계부처 실국장급 회의에서 당시 재무부의 한 국장이 “요즘 사회보장 운운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미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자 회의에 참석했던 당시 보건사회부의 한 국장은 “요즘 세상에 사회보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미친 사람들”이라고 응수하여 큰 논쟁이 벌어진 바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60년대 초반에 사회보장제도 도입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복지개혁노력이 일정한 세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바로 50년대 말에 한국경제가 구조조정단계에 진입하였으며 그에 따라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분야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상당정도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60년대 초반 군사정권이 시도했던 대량 복지입법은 이러한 배경에 의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복지개혁노력을 군사정권의 국가형성방향에 맞게 일정하게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군사정권기의 복지제도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1) 이 회의는 당초 부흥부가 57∼58년경에 각 분야 인사로 구성되는 종합경제회의로 구상한 바 있었으나 당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찬섭 / 성공회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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