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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20
  • 2020.09.01
  • 306

‘한국판 뉴딜’에서 ‘복지국가’ 찾기

 루스벨트의 ‘뉴딜’에는 있고 문재인의 「한국판 뉴딜」에는 없는 것

 

윤홍식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서론

문재인 정부의 뉴딜은 보수정부 시기와 비교하면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였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에 대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제한적인 실업부조(취업지원제도)의 도입, 특고를 포함한 고용보험의 부분적 확대(전국민고용보험), 상병수당(시범사업)의 제도화 계획 등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시작한 이래 누적된,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심화된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문재인 정부의 뉴딜을 평가하면, 문재인 정부의 뉴딜은 한국 사회가 풀어야 문제의 본질(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 이 글은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을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뉴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먼저 ‘뉴딜’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서 제시된 것처럼 뉴딜을 단순히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나 테네시 계곡 사업과 같은 재정정책과 일자리 확충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뉴딜이 갖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는 큰 틀의 문제의식을 간과하고, 뉴딜을 프로그램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뉴딜은 크게 4가지 관점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첫째, 뉴딜은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30년대 뉴딜이 시작되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방임주의가 지배적인 체제였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가 1929년 대공황을 유발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Schivelbusch, 2006). 폴라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사회로부터 탈착근된 시장의 확대가 사회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던 상황이었다(Polanyi, 1944).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에 대한 사회의 통제를 회복하는 일 즉, 국가가 개입해 자기조정적 시장을 사회에 착근된 시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뉴딜의 핵심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시장을 규율한다는 것은 뉴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뉴딜은 폴라니가 말한 사회의 이중운동으로, 국가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뉴딜을 위기에 직면한 사회를 구하는 민주주의에 착근된 대안(복지국가)로 이해한다면, 그 핵심은 민주주의에 착근된 뉴딜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집단을 만들어내는 과제를 담고 있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 ‘뉴딜’을 공약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등장이전까지 민주당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었다(Schattschneider, 2008[1975]: 149-162). 뉴딜을 통해 미국의 민주당은 뉴딜연합을 형성해 민주당의 장기집권(1932~1964년까지 치뤄진 9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7번을 승리했다)과 진보의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Andersen, 2019[1979]). 뉴딜은 당시 경제위기로 가장 고통 받는 노동자의 결사 자유를 강화하고, 정치적 힘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와그너법은 미국에서 최초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한 법이었고, 이후 노조활동이 합법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뉴딜연합은 소수자, 흑인을 배제해 이후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종차별주의 지속시키는 한계 또한 노정했다.

 

마지막으로, 뉴딜은 위기에 빠진 시민들에게 안정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대와 일자리의 창출의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대와 일자리의 창출은 뉴딜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뉴딜을 통해 실업문제를 성공적으로 대응했던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실업률이 감소한 것은 뉴딜의 일자리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더욱이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일자리를 확충해 완전고용을 달성해 자유방임주의가 유발한 위기에 가장 잘 대응했던 대안은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뉴딜이 아니라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였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Schivelbush, 2006). 1930년 미국과 독일의 실업률은 각각 14.2%와 22.7%로 독일의 실업률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1938년이 되면서 미국은 27.9%로 높아진 반면, 독일은 3.2%로 낮아졌고, 1939년에는 0.3%로 완전 고용을 실현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스탈린의 소련도 완전 고용을 달성했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실업문제가 완화되었다.

 

이를 종합하면, 뉴딜이란 위기에 대한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중장기적 대안을 의미하며, 그 성과 또한 단기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뉴딜은 실패했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민주주의에 착근된 뉴딜이었고,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와 복지국가의 황금시대를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의 정치경제적 성격

이제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단기적 위기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자본주의의 누적된 위기가 폭발한 중장기적 위기로 이해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위기가 단기적 위기가 아니라 중장기적 위기라면, 이에 대한 대응 또한 중장기적 전환을 내오는 개혁과제가 제시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IMF의 주도하에 세계 경제의 기조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균형재정을 강조하던 것에서 고용과 임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고,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속도가 늦춰지고 있으며, 저성장 기조로 전환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극우 포퓰리스트 집단에 의해 위협받고 있고, 미중 갈등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분배측면에서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포함해 위기를 겪을수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렇게 누적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의 모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중장기적 대안, 구조적 대안이 요구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패러다임 전환인가?

한국판 뉴딜은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중장기적 대안으로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뉴딜이 정확한 정세판단에 기초해 구상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1960년대 산업화 이래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 개발국가의 산업정책으로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시대의 산업정책은 국가가 주도했다면,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재벌이 주도한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지난 보수 정부의 산업정책과도 큰 차이가 없다. 그린 뉴딜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 뉴딜을 기초로 녹색을 그린으로 명칭을 바꾼 정책 패키지라고 할 수 있고, 디지털 뉴딜은 박근혜 정부의 ‘ICT기본계획 비전, ICT를 통한 창조와 혁신의 대한민국’을 확장하고 업데이트 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수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산업정책이 유사하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하려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담아야할 뉴딜이 개발국가의 산업정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보장정책과 관련해 전국민 고용보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상병수당 시범사업 시행 등은 보수 정부와 비교해 의미 있는 진전도 있다. 그러나 지난 1997년 외환위기에서 얻은 교훈은 노동시장에서 시민에게 안정적 고용을 보장해주지 못했을 때, 공적 복지의 확대를 통해 불평등, 빈곤 등 사회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여지는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구조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중장기 대안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면 한국판 뉴딜을 뉴딜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첫째, 한국판 뉴딜에는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이 담겨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도 이전 보수 정부와 같이 재정균형과 인플레이션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패러다임 전환, 즉, 기존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았다. 만약 현재의 확장적 재정정책을 들어 이전 정부의 대응과 상이하고 주장한다면 이는 적절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 또한 정책기조의 전환 없이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해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대응했지만, 위기가 진정된 2010년부터 다시 인플레이션과 재정균형을 강조하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패러다임 전환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도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재부가 현재 상황을 한시적·예외적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가시적 인식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IMF, 세계은행 등 이미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책기조를 인플레인션 통제와 균형재정에서 고용과 임금을 중심으로 정책기조를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Ostry, Loungani, and Berg, 2019),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구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한국판 뉴딜이 지향하는 사회상,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재벌 대기업이 주도하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통해 성장을 계속하는 개발국가 복지체제를1)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한국판 뉴딜이 지향하는 사회적 목표가 불명확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발국가 방식의 성장이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 경제의 문제는 첨단 자동화 장비를 설치해 부품과 소재를 수입해서 조립 생산하는 수출지향의 거대 기업과 낮은 노동생산성에 기초해 국내 시장에 고립되어 있는 중소기업으로 양극화 되어있는 구조적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광범위한 사각지대도 바로 이러한 경제구조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한국판 뉴딜」 어디에도 이에 대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으며, 국가가 디지털과 그린 산업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지원해 대기업 중심의 성장을 지속시키겠다는 의지만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판 뉴딜」이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라 과거의 패러다임의 지속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희망한다면, ‘대기업 재벌 조립형 수출주도 중심의 경제’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성장, 자동화와 노동숙련의 균형, 수출과 대내수의 균형,’ 생태적 균형이라는 탈-개발국가의 성장전략이 담겨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총요소 생산성’ 즉 혁신의 부재로 인한 것인데, 이는 한국의 성장체제의 변혁 없이는 개선하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이 담겨있지 않는 「한국판 뉴딜」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악화시키는 악수(惡手)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셋째, 한국판 뉴딜은 뉴딜의 핵심 과제인 시장을 다시 사회의 통제아래 두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형성·확장하는 대안이 담겨있지 않다. 정치적 기반이 반드시 노동계급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들 지향하는 목표를 지지하고 함께할 정치적 지지집단의 조직화·세력화 없이는 뉴딜은 성공할 수 없다. 단체교섭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불안정 고용상태에 있는 노동자의 결사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지원을 할 것인지, 변화하는 노동시장 구조에 맞는 노동자성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 할 것인지 등의 과제가 있는데도 한국판 뉴딜은 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다. 정책은 좋은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정치의 결과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샤츠슈나이더(Schattschneider, 2008[1975])가 이야기 한 것처럼 “정책의 특성은 새로운 종류의 정치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국판 뉴딜에는 한국 복지국가의 담대한 비전이 담겨있지 않는, 사회보장과 고용문제 또한 대단히 미온적인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판 뉴딜의 목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소득에 기반한” 전국민의 보편적 사회보장이 아니라 기존의 고용관계에 기반한 전국민고용보험이라는 과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원리에 기초한 단일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더욱이 이마저도 점진적 확대를 이야기하고 있어 문재인 정부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얼마나 안일하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용창출과 관련해서도 한국은 단순히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고용이 지위와 기업규모에 따라 양극화 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기본 상식에 기초한 대안을 내놓지 않고, 위기에 대한 단기적 대응(단기적 일자리 창출)으로 일관하고 있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만들어지는지, 그러한 사각지대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복지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산업구조, 성장체제의 개혁과 같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담겨있어야 했다.

 

종합하면 한국판 뉴딜은 개발국가의 산업정책이라는 한국의 오랜 전통에 기초한 성장동력을 재벌 대기업을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산업정책, 성장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성장정책과 산업정책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추진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문제는 현재와 같이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개발국가의 성장정책을 답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본 위기의 본질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발생한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가깝게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멀게는 1960년대 경제개발 이후부터 한국 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코로나19를 계기로 한국 사회의 약한 고리에서부터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위기를 촉발하는 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사회 위기의 본질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위기는 첫째, 재벌대기업이 주도하는 조립형 수출주도성장체제의 결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재벌대기업이 최첨단 설비를 설치하고 부품과 소재를 수입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하는 생산방식은 필연적으로 노동숙련의 중요성을 낮추고, 설비에 소요된 비용을 보상하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좋은 일자리의 창출을 제약하고, 나쁜 일자리를 확대했다. 둘째, 취약한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이러한 산업구조, 성장체제의 문제를 억제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장이 사회에 착근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힘의 부재, 민주주의의 취약성이 경제구조에서 발생하는 사회위기가 심화되는 데도 이를 수정할 수 없었던 근본적 원인이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성은 필연적으로 사회보장제도에서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양산했다. 안정적 고용과 임금을 보장받는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공적 복지를 확대한 한국 복지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절실한 사람들을 배제했다. 더욱이 한국 복지국가의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낮은 급여수준은 제도의 대상이 되는 중산층조차 사적 자산축적을 통해 사회적 위험에 개별적으로 대응해야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히 중산층이 ‘아파트’로 대표되는 사적 자산축적을 통해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낮은 급여를 대신하면서, 사적 자산축적은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보편적 확대를 가로막은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어쩌면 한국 복지국가의 보편성을 높이기 위한 큰 방향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경제영역에서는 수출과 내수의 균형,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 자동화와 노동숙련의 균형, 생태적 균형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시장에서 기업규모와 고용지위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전통적 조직 노동은 물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교섭력을 높이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제도의 도입을 통해 체제개혁을 위한 권력자원을 확대해야 한다. 복지의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사회보험을 소득에 기반한 사회보장제도로 전환해 보편성을 확대하고, 사회보험에 포괄되지 않는 인구집단을 위한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 인구사회적 특성과 생활주기에 따른 보편적 사회수당(전환적 기본소득)의 도입을 통해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영역, 소득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득에 기초한 사회보험의 제도화,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보험을 고용관계가 아닌 소득에 기초한 제도로 전환하는 것은 사회보장제도의 패러다임을 기여에서 조세로 전환하는 획기적 변화를 의미한다. 현재 기본소득과 전국민 고용보험이 마치 대립적인 제도처럼 논의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정치권이나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환적 기본소득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구사회적 특성에 따라 지급되는 전환적 기본소득은 보편적 사회수당 제도와 유사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지향점은 다르지만, 당분간 그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전환적 기본소득이 완전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전단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결국 전환적 기본소득이 실질적 기본소득으로 전환할지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증의 문제이다. 반면 전국민 고용보험으로 촉발된 사회보험제도의 개혁은 빈곤예방이나 기본생활의 유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수준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소득비례형 사회보장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보험은 기본소득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고유한 제도적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기본생활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일인당 20~30만원 수준의 전환적 기본소득을 생애주기에 따라 배치하고, 여기에 사회보장세(조세)로 운영되는 전국민 사회보험을 제도화해 기본생활과 생활수준 유지를 동시에 보장하는 사회보장의 중층적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리

뉴딜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판 뉴딜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현하는 뉴딜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핵심은 정치적 자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경제사회적 개혁은 이러한 정치적 기반의 확대가 수반되었을 때 지속가능한 개혁이 될 수 있다. 또한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위기는 사회지출을 확대한다고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시장에서의 1차 분배의 제도적 개혁 없이 사회보장과 같은 2차 분배만으로 문제를 완화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1980년대 복지국가의 모습을 보면 사회지출의 확대만으로는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했다. 문제는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한다면, 국민은 다시 한 번 시장주의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시민은 다시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문재인 정부는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근본적 체제개혁 없이 단순히 대중의 성장요구를 따라 갈 경우, 어쩌면 우리는 지난 20년의 과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1) 개발국가 복지체제는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결합하면서 소득을 높여, 불평등과 빈곤을 완화하는 체제이다(윤홍식, 2019a).

 

참고문헌

  • 윤홍식. 2019.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 Andersen, K. 2019[1979].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이철희 옮김 (The creation of a democracy majority, 1928-36). 서울: 후마니타스.
  • Ostry, J., Loungani, P., and Berg, A., 2019, Confronting Inequal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Polanyi, K. 2009[1944]. 『거대한 전환』, 홍기빈 옮김 (The great transformation). 서울: 도서출판 길.
  • Schattschneider, E. 2008[1975].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박수형 옮김 (The semisovereign people: A realist’s view of deomcracy in America). 서울: 후마니타스.
  • Schivelbusch, W. 2006. Three New Deals: Reflection on Roosevelt’s America, Mussolini’s Italy, and Hitler’s Germany, 1933-1939. Metropolita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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