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2 2002-08-10   875

이제 색깔을 드러내라

몇 해전 우연히 외국의 한 뉴스 방송(CNN)이 미국 의회에서 진행하는 청문회를 중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외국말이 짧으니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했던 발언과 행동을 놓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보건복지부의 보건담당 국장인 사람을 놓고 인사청문회를 하는 것인데, 낙태에 대한 견해를 묻고는 과거의 행적과 발언이 현재 견해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국장 한사람 놓고 무슨 청문회냐고 할 법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국장이 Surgeon General로 불리면서 오래 전부터 한 나라의 보건정책 방향을 총괄한다고 해서 청문회의 대상이 될 만한 핵심요직으로 분류된다. (양담배 곽에 Surgeon General이 어쩌고 하는 경고문구가 아직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중요한 자리인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도 최근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벌써 잊혀지는 과정에 들어선 듯 하지만, 장상 총리서리를 평가하는 청문회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 경우와는 달리 청문회와 거기서 논란이 된 문제들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응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심사가 언짢은 것을 숨기기 어렵다. 당사자가 가진 흠이야 우리 사회 “주류”가 가진 일반적인 그러나 한심한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치고 그냥 넘어가자. 아직 멀었다 싶은 것은 도무지 묻는 쪽이나 답하는 쪽이나 일관성이나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없는지 부러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를 일이나, 물어보는 것마다 두루뭉수리요 답도 상황논리로 넘어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러니 토론이고 논쟁이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더 한심한 것은 그걸 그냥 넘긴다는 것이다. 언론조차 입맛대로 논리를 바꾸고 비판의 잣대를 달리 하니 말해 무엇하랴.

이제는 누구라도 색깔을 확실하게 하자. 무슨 이념의 깃발을 높이 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만 모면하는 “총론 찬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판단을 내놓고 비판이든 찬성이든 기대하는 것이 맞다.

이미 정치와 선거의 계절이라 장밋빛 전망이 난무하는 세태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나 정파는 누구라도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하기 바란다. 예컨대 복지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면서 정부 예산편성의 기조는 복지지출을 “효율화” 하겠다는 것은 면피용 이상이 되기 어렵다. ‘신중히 고려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기 바란다. 어차피 그런 일이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장애 문제도 총론찬성, 각론유보로 치자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라도 색깔을 확실하게 하라. 장애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선 투자할 사람이나 정파가 누군지 판단이라도 할 수 있게.

김창엽 / 편집인,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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