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3-10   1827

[심층4] 복지국가는 실패했나?

백인립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현재 한국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사회복지 발전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일이긴 하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방향성이 엉뚱한 경우도 있고(보편성과 무상을 구분 못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전혀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은 정치집단이 자기들이 구현하겠다고 허세 떨고 있다. 이처럼 논쟁 자체가 낮은 수준에 머물다 보니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우파들의 흠집 잡기 또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사실처럼 퍼져 나간다.


  이 글은 우파진영에서 떠드는 해괴망측한 논리 중 ‘유럽의 복지국가는 실패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글이다. 이에 대한 반박논리로 흔히 사용되는 높은 사회복지 지출과 낮은 빈곤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경제성장과 같은 거시지표를 본 글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정책이 무엇인지, 그 근본자체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우파들의 주장에 대해 일갈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 중심은 누가 뭐래도 ‘시장’이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들은 시장에서 ‘고용주’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달랑 몸뚱이 하나만 지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먹고 산다. 이러한 노동계약을 통해 형성된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제품이 생산되고, 그 제품은 다시 유통을 통해 소비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것과 달리 상품이라는 것이 (그것이 노동이든, 제품이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요곡선과 공급 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적정의 가격이 결정되고 수요량과 공급량이 조절된다는 논리는 구멍가게에서 파는 풀빵하나에도 적용할 수 없는 사기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 또한 개탄할 일이다. ‘시장의 자유’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미국 자본가들께서 재작년 금융위기가 터지자마자 제일 먼저 ‘시장의 자유’를 배신하고 국가에게 애걸복걸한 사실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은 자기 혼자 스스로 절대 굴러가지 않는다. 따라서 뭔가 혼란구덩이 속의 시장을 조절할 ‘보이는 손’이 필요한 데 이 보이는 손 중 가장 역할이 큰 것이 바로 국가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다양한 역할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자본가의 안정된 이윤 증대를 보장해주는 조치일 것이다.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라는 단일의 냄비에 생산수단을 지닌 수많은 개별 자본가들이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상품을 마구 쏟아 붓는데, 이를 조절하지 않게 되면 결국 그 사회 전체가 공황으로 치닫거나 아니면 힘센 자본가가 독식하는 독점제체로 변질할 것이다.


  또 하나, 부각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자본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 증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자본에게만 맡겨 놓으면 제 수명 다 못채우고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국 자본주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70년대 한국 상황에서도 우리는 목도한 바 있다.
 이처럼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한 조건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 대한 ‘경제적 개입’이라 하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 대한 국가의 ‘사회적 개입’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개입은 구체적으로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국가의 사회적 개입은 ‘사회정책’ 혹은 ‘복지정책’이라 한다. 그리고 오늘날 인권이 괄목할만하게 발전하면서 이러한 사회정책의 대상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을 넘어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예를 들어 중증장애인, 고령자)에게까지 확대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사회정책 혹은 복지정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한 국가가 지닌 여러 얼굴들 (예를 들어 전쟁수행국가, 경제발전국가) 중에서 복지정책을 시행하는 국가의 모습을 우리는 ‘복지국가’라 부른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는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한 모습을 지니는가? 물론 아니다. 서구의 경험을 보자면 과거 50-60년대 국가의 경제정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방식에 근거하고 있었다. 즉 국가의 역할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을 전량 소비되도록 촉진시켜주는 것이 경제정책의 주요목표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복지급여 또한 수요촉진의 한 방편으로서 인식되어졌기 때문에 사회정책이 확장일로에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는 소위 말하는 다품종, 소량생산, 차별적 소비라는 색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이름의 차종이 그 모델을 일년이 멀다하고 바꾸는 것에서 알 수 있고, 이에 걸맞게 생산시스템도 매우 유연해져서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이 더 편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장의 운영방식이 이렇게 변화되다 보니 실업자에 대한  관리 또한 과거에는 국가가 직접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었다면, 지금은 직업훈련을 강화하거나 재취업 의식을 고취시키는 공급측면의 관리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처럼 시장의 운영원리가 변화하다보니 기존의 국가의 사회적 개입방식이 안 맞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현재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새로운 경제환경에 맞게끔 자신의 사회정책을 변화시켜가고 있다. 즉 우파들의 무지몽매한 주장처럼 유럽의 복지국가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온 현실을 두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가 갓쓰고 도포입고 서당에 가지 않을 것이라면 서구국가로부터 우리의 모델을 모색해야만 한다. 특히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복지비용이 10% 도 안 되는 복지후진국 한국에서 사회정책 모델을 탐색하고 구축하는 일은 매우 시급하다. 2만불 시대에 복지비용으로 스웨덴은 자신의 GDP 중 29%를 썼고, 프랑스는 25%를 사용하였으며, 하물며 미국 또한 13%를 지출했다. 따라서 한국은 무엇보다도 시급히 복지를 증진해야하는데 여기서 관건은 과연 어느 모델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 한국식 복지국가의 밑그림으로 삼아야 할 것이냐이다.


  <식코> 영화에서처럼 잘려진 두 손가락 중 어떤 손가락을 붙일지 결정해야 하는 미국식 모델인지 아니면 보편적 복지모델을 굳건히 고수한 채 달라진 경제환경에 맞게끔 그 내용들을 수정 중인 스웨덴 모델을 따를 것인지 우리는 결정할 시점에 서 있다. 혹자는 스웨덴 모델이 최고의 모델인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의 정치지형이 다름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즉 보편적 복지모델 성취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단결된 노동조합과 사민주의를 신봉하는 노동자 정당이 한국에는 부재하다는 현실로부터 그 사람들의 회의는 비롯된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싶다. 그것은 바로 이번 선거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선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독일 사민당도 1869년에 창당하여 1919년에 집권하기 까지 50년이 걸렸고, 스웨덴 사민당도 1889년에 창당하여 1932년에 집권하기 까지 근 40년이 필요했으며, 영국 노동당도 1893년에 창당하여 1945년에 집권하기 까지 5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에 반해 2000년에 생긴 한국 노동당은 12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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