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2 2012-10-15   1497

[칼럼] 국가가 범죄에 대처하는 법

국가가 범죄에 대처하는 법

 

오동석ㅣ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의 범죄 대책은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가의 형벌권을 확대하면서 재생산한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열거해도, 주민등록증, 열손가락 지문 채취 및 경찰의 데이터베이스화, 신상공개제도, CCTV 설치, 유전자 정보 수집, 형사사법 정보의 국가기관간 공유, 전자발(팔)찌, 화학적 또는 물리적 거세, 총기 사용, 사형 집행 등이 있다. 국가는 현실적인 피해자와 범죄자를 본보기 삼아 가상의 잠재적 가해자를 만들어낸다. 빈곤층, 이주민, 사회·학교·군대 등 각종 부적응자 등이 그 대상자이다.

 

범죄현장으로 가보자. 갑이라는 사람이 을이라는 사람을 살해했다. 갑은 살인이라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갑은 가해자로서 범죄자이고, 을은 피해자이다. 그런데 을의 유가족은 갑을 응징할 수 없다. 사적(私的) 해결은 국가가 금지한다. 국가가 개입하여 갑에 대한 수사․기소 및 재판 그리고 형 집행절차를 진행한다. 을의 유가족은 민사소송을 제기하거나 국가의 책임을 묻는 등 국가의 개입을 요청할 수 있다. 갑과 을은 각각 국가를 매개로 하여 관계를 형성한다. 국가는 공적 해결자이다. 국가의 형벌권이란 을의 유가족을 대신하여 갑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이 정한 대로 갑의 인권을 존중하면 형사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책무이다. 국가는 감정이 없다. 국가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피의 복수가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적나라하게 재현된다. 문제는 국가라는 망나니만 칼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행위는 분명 사회의 악이다. 국가는 범죄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가장 중요한 국가의 의무는 그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부터 국민이었고,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도 여전히 국민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는 신체의 자유와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이 매우 중요하다. 인권은 국가의 폭력을 정당성 있는 권력으로 길들이는 핵심장치이다. 물론 피해자 측에게도 삶의 지속가능성, 정신적 치유, 재판절차에서 피해를 진술할 권리 등이 중요하다. 이러한 양자의 권리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할 주체는 바로 국가이다.

 

최근 국가와 언론은 각종 범죄가 창궐하고 있다며 대중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사건의 피해자는 주로 아동이나 여성 또는 불특정 사람 등 대중이 감정이입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사건의 가해자는 학생이나 사회적 소외계층 또는 술 취한 사람과 같이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국가는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골몰한다. 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 피해자는 국가의 관심 밖이다. 입시경쟁에 지쳐 자살하는 학생들과 술 취하지 않고서 살 수 없는 고단한 사람들은 가려진다. 정작 파고들어야 할 교육문제와 생존의 안전망 문제는 밀려난다.

 

한편 ‘살인해고’라는 정리해고 또는 비정규직 때문에 삶 자체가 위태로운 노동자는 범죄의 피해자로 읽히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고혈을 짜내고 골목상권의 생계까지 위협하는 재벌권력은 범죄의 가해자로 읽히지 않는다. 국가는 청년의 실업과 장년의 퇴출 그리고 학생과 노인 등의 자살에 대한 ‘범죄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반면 거액의 뇌물을 받은 부패권력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할 뿐이다.

 

국가는 계급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국가의 응답은 이중적이다. 권력 있는 범인(犯人)에게는 나약하고 범인(凡人)에게만 가혹하다. 힘없는 자의 범죄폭력에 대처하는 국가폭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점점 광폭해지고 있다.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국가의 ‘최종해결책’은 물리적 거세이다. 더욱더 최종적인 해결책으로서 사형 집행 재개를 들먹이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헌법적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인권을 유린하는 지경의 국가는 이미 공권력이 아니다.

 

공권력으로서의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가해자 엄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공적(公的)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적(私的) 감정을 끌어들인다. 국가의 폭력이 조직폭력배의 그것과 다른 점은 그것의 구성 및 행사 방식에 있다. 그것은 인권적이며 민주적이며 법적이어야 한다. 피해자를 앞세우는 것은 국가로서의 자격상실이다. 사적(私的) 복수심을 처리하는 청부업자를 자임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대립시키는 ‘감정적’ 접근방법은 국가가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음을 자백하는 꼴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는 폭력을 독점할 자격이 없다. 국가가 헌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대량학살이 일어난다. 차라리 범죄피해자 또는 일정 관계인에게 복수할 권리를 인정하는 게 낫다. 그들은 그 규모와 강력함에 있어서 국가만큼 폭력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합리적인 조정중재자들이 나타난다. 제3자인 이웃사람들이다.

 

국가는 범죄예방 목적을 강변한다. 그렇지만 예방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을 되돌려 범죄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보자. 국가가 잠재적인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지목하는 이들을 돌아보자. 모두 불우하거나 빈곤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국가는 그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던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경쟁에서 탈락시키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교육을 국가는 균등하게 제공했던가? 일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입고 먹고 살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衣食住醫)를 국가는 충분히 제공했던가?

 

반면 국가가 눈 감고 있는 현실적인 폭력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최근 신문만 들춰보면 안다. 2012년 10월 8일 2009년 쌍용차 대규모 정리해고로 인한 23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자  94명과 휴직자 500여명은 아직도 현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회사는 파업노조에 대해 158억 원 이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이다. 지난 7월 말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차 부품업체 ㈜SJM 공장에서는 회사 측이 고용한 경비업체 ‘컨택터스’ 소속 사설 경비원 200여명이 농성 중인 노조원 150여명에게 폭력을 휘둘러 노조원 11명이 중상을 입는 등 40여명이 다쳤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전력 자회사인 5개 발전회사의 ‘민주노조’ 파괴에 청와대․지식경제부․경찰청․한국전력 등이 개입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었다.

 

그런데도 재벌 또는 대기업의 범죄 또는 횡포에 대하여는 무능력하다. 10대 재벌 총수들은 전근대적인 순환출자 제도를 통해 그룹 내 1%도 안 되는 지분(평균지분율 0.94%)으로 99%를 지배하게 하고 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된 한화그룹 회장의 법정구속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재계 17위인 신세계그룹의 회장과 아들인 부회장이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에 부사장(회장의 딸)이 대주주인 계열사의 빵·피자·식음료사업을 부당지원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었다. 엄청난 이윤을 거둬들이고 있는 유통재벌들이 동네 상권까지 장악해가고 있다.

 

오히려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 문제까지 드러난다. 과거 국가가 직접 저질렀던 범죄 또는 방임 행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일제 때 성노예(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다.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의 진실규명과 피해자 배상에 대하여도 충분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신독재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다. 최근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하여 행정안전부는 조사권한이 없다며 재조사를 거부하였다.

 

최근 범죄에 대한 국가의 ‘엄벌’ 대책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정작 문제해결에는 사후약방문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병만 주고 거짓 약 또는 오히려 독약을 주는 꼴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엄벌에 처해야 할 폭력에 대하여 국가는 침묵한다. 정작 헌법에 따라 국가가 마땅히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데는 무능하다. 국가는 피해자를 들먹이며 가해자를 엄벌하기보다 인민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기 전에 인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는 요즘 유행하는 개그식으로 말하면, 스스로 “국가가 아니므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법과 질서’를 외치기도 한다. 로익 바캉(Loic Wacquant)이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말한 형벌국가이다. 폭력의 범인(犯人)은 바로 그 국가이다.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를 인민의 자기권력으로 갱생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주권자의 실천행위에 대해서까지도 국가는 폭력이라 부르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헌법제정행위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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