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장제도의 시련

성과와 분배를 둘러싼 논쟁이 끝이 없다. 1960년대 경제개발 초기 개인의 자유조차 유보당했던 시절에는 분배문제가 주요한 사회적 과제로 되지 못했다. 지금 IMF 금융위기 이후 분배논의는 정상적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사회보장이라는 주제는 학문의 한 분과에서 제기되는 호사스런 주장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반하는 이념지향적 테제로 내몰리기도 한다. 자본의 세계화가 급진전되고 자유시장경제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사회적 삶의 모든 문제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 전반에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고 통합되는 거대한 시장 속에서 인간은 개체화되어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소비없는 생산이 존재할 수 없다. 소비로 연결되는 유통조차 생산이라고 얘기되는 사회에서 분배는 왜 성장의 목표가 될 수 없는가? 분배는 항상 모든 문제의 뒷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분배 시스템의 구축은 전무한 현실이다. 4대 사회보험, 특히 의료보험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논쟁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사회보장제도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는지 알게 해준다. 의료보험 통합파와 조합파의 논쟁 이면에는 사회보장제도의 정착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배제도의 재편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개인의 사회적 권리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경쟁과 효율의 사회, 자본주의 생산체제와 소유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할 때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의료보험 통합을 통해 사회보장제도에 본질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이익단체의 근시안적인 아집과 이를 지원하는 '자본'으로 지칭되는 가진 자들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 여당이 내년 총선을 의식하여 의료보험통합법 시행을 6개월 연기하기로 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수준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2002년 완전통합 전까지 직장과 지역의 재정분리를 전제로 한 의료보험 통합은 직장의료보험측의 조직보존 논리에 따라 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500만이 넘는 직장의보조합에 가입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말이다. 140여개 직장의보조합이 하나로 통합될 때 노동자의 54%는 보험료가 내리고, 46%는 오름으로써 그간 불평등하게 부과되어온 보험료 재조정사실을 마치 노동자들의 보험료 인상으로 도시고소득자영자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왜곡 선전하고 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소속의 다수 조합원들은 보험료가 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중소하청업체나 저소득 근로자들과의 형평을 위해 재조정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또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소속 조합원들이 보험료가 내리는 조직에서 오히려 통합을 반대하는 모순이 일어나고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역사적으로 자본가에 대항해온 노동자들의 투쟁을 거쳐 정착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본가 및 일부 노동자와 전체 노동자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보장제도를 얘기할 때 우리 사회 전반에는 이를 국가에 의한 시혜적인 정책으로 오해하는 측면이 강하다. 개인의 참여없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사회보장제도 그 자체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원의 문제에도 적극적인 기여가 필요하다. 물론 형평이 전제되어야 한다. 전체 자본과 노동의 형평성은 물론이고 노동자 내에서의 형평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보장은 저부담을 통한 높은 수준의 혜택을 기대할 수 없다. '적정부담을 통한 적정혜택'이라는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난 달 민주노총이 국회에 입법청원한 주 40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주 35시간 노동시간제를 검토하기 위해 현지 3대노총 중 하나인 민주노동동맹(CFDT)에 출장을 다녀왔다. 그들에게는 물론 400만에 육박하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용창출이 주요 목표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 부담을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가 주요 내용처럼 보였다. 개발도상국가들의 높은 수준의 초기 생산성 향상과 경제성장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역시 누군가가 분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노동자들과 기업의 이윤을 크게 잠식하는 신규직원 채용의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사용자들간의 주장이 크게 대립되었다. 이에 정부는 주당 35시간을 2000년부터 20인 이상 사업장에 먼저 시행하되 사용자가 정부에 납부하는 사회보장기금을 감면해주기로(1년차 노동자 1인당 9천 프랑에서 5년차까지 1천 프랑씩 축소)하고 노사간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추가 인건비에 대한 전액보상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노동조합에서는 임금삭감은 아니더라도 당분간의 인상은 자제하는 방향으로 협상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직장을 가진 노동자가 직장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연대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우리나라 노동부에 해당하는 정부부서가 '고용연대부' (M. of Employment & Solidarity)라는 데서 보여주듯이 정부 또한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보장제도에 기초한 적극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20 대 80의 사회, 국내에서 빈부격차 확대는 물론 전 지구적으로 남북격차가 심화되는 오늘날 사회보장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구호나 학문의 한 분야가 아니다. 더 나아가 높은 수준의 이념은 더 더욱 아니다. 한 인간의 생존이며, 모두의 공존이다. 우리 사회의 공존 (win-win game 또는 Mutual gains)은 일반적으로 현상유지를 요구하는 구호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규칙(rule)이 아니다. 형평을 위해 재편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사회체제이고 그것을 우리는 사회보장제도 개혁이라 부른다. 인간은 토지, 노동, 자본의 생산 3요소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전체를 포괄하는 주체다. 인권은 바로 사회보장제도 정착과 함께 확립될 수 있다. 그럼에도 천박한 논리의 옳지 못한 사람들과 이익집단의 준동으로 한국적 사회보장제도는 출발부터 시련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11월

허 영 구 / 민주노총 부위원장

허영구 / 민주노총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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