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속의 독일 사회국가

세계화는 일종의 과정이다. 과정 개념(Proze begriff)으로서 세계화는 역동성과 정체성 간 상호 작용을 유발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속성은 민족사회(Nationalgesellschaften)에 끊임없이 사회적 긴장을 가져다 준다 (Kaufmann 1998:3). 여기에서 사회적 긴장이란 사회 변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요소의 등장을 의미한다. 세계화가 제공하는 사회적 긴장은 한 민족사회의 계급 대립이나 이익 집단 간 갈등에 기초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사회국가 (Sozialstaat)를 형성하는 독일 민족사회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입각한 영미식 개념에서 볼 때 사회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공간의 통일체이다. 이 맥락에서 사회는 다른 사회적 단위(soziale Einheit) 위에 군림하면서 모든 기능을 담당하고 주체성을 갖는 상위 개념이다. 사회는 사회적 계약에 근거하여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사회에 비해 국가가 갖는 역할은 비중이 낮은 편이다. 이에 반해, 헤겔적 전통에 따른 독일식 개념의 사회는 국가와 가족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시민적 사회이다 (Kaufmann 1998:4). 국가, 시민적 사회, 가족 공동체가 세 축을 이루면서 동등한 비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겠다. 이 맥락에서 사회는 다양한 이익 집단들의 연결체로서 모습을 가진다. 독일 사회 특유의 조합주의(Korporatismus)가 이 모습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단위를 하나로 묶기 위해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식 국가 개입은 전지전능한 국가 역할 수행 과는 거리가 있다. 카리타스 등을 중심으로 한 복지단체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이나 사회보험에서 볼 수 있듯이, 거시적 연대의식 (Makrosolidarit t)을 바탕으로, 국가는 각 사회적 단위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 형성 – 재정 부담이나 법적 요건 창출 등 -을 주요 과제로 갖는다. 이같은 역할 분담 하에 독일식 사회국가 형성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국가 통제로부터 자본 이동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율성을 가지게 되고, 생산입지 논쟁 (Standortdebatte)에서 기업가·자본가와 국가 간 힘의 균형이 전자에 기울게 되면서 '독일민족'을 단위로 국가가 전통적으로 수행하던 역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지도력, 조정력에 대한 사회와 가족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져 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방의 세계화 (Glokalisierung)로 대변되는 현상에 볼 수 있듯이, 각 지역 단위 (예를 들면, 각 주 정부)가 주체가 되어 사회적 단위의 이익을 대변·조정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주 정부 간 혹은 지역 간 사회적 긴장을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현상이 나타난다.

카지노 자본주의와 생산입지 논쟁으로 대표되는, 국경을 초월한 자본 및 기업의 유동성은 민족국가 체제에서 지금까지 가능했던 "집단적 소속감"을 허물어내고 있다. 사회시장경제 (Soziale Marktwirtschaft) 체제 구축을 통해 국가가 수행해 오던 사회보장 기능이 실업문제, 사회보험 재정 적자 등으로 위협받는 반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은 해마다 사상 유례없이 높은 이윤 내지 이자 소득을 얻고 있다. 이 결과 국가를 통한 "사회적 삶 (Soziales Leben)"에 대한 합의가 독일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사라져 간다고 보는 것이다. 소위 세계화의 승자와 패자 (Globalisierungsgewinner und -verlierer)간 갈등 (Altvater/Mahnkopf 1997:27)이 사회적 연대의식을 약화시킨다고 하겠다.

경제적 관계의 세계화와 사회국가 간 긴장 관계 해명이 90년대 중반 이후 독일 사회정책학계 중요 관심사 중 하나이다. 세계화와 독일 복지국가, 즉 사회국가 사이는 어떤 식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까? 세계화가 복지국가 체제를 어느 정도 위협하고 있는가? 세계화가 복지국가 체제에 가져다주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결국 복지국가 체제는 세계화 물결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 수 있는가?

먼저 세계화에 대한 입장을 보면, 첫 번째, "세계화는 새로운 현상으로서, 모든 환경을 변화시킨다"이다. 그 반대 (두번째) 입장은 "세계화는 기존 정치·경제 체제 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며, 통제 가능한 과정이다"라고 본다. 그 다음, 복지국가 체제에 대한 시각을 보면, 먼저, "사회국가는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라는 입장이 있다. 그와 다른 시각에서"사회국가는 근본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세계화와 사회국가에 관련한 각각의 입장을 짝지우면, 현재 세계화와 독일 복지국가 사이 자리매김에 관한 네가지 관점을 알아낼 수 있다 (Lessenich 1997:855).

첫번째, "세계화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며, 사회국가는 이에 직면하여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볼 수 있다. 자본이 국가 통제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기업주가 임금과 세금이 가능한 낮은 국가를 찾아다닐 수 있는 시대에 사회국가 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이 관점에서는 본다. 결국 개인 복지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사회국가는 사회보험과 공적부조 등을 통해 늘어난 국가 개입 규모를 되도록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세계화가 새로운 현상이며 모든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만, 사회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필요는 없다"라는 입장이 있다. 사회국가 체제는 세계화, 그리고 그 이전에 동서독 통일이 가져다 준 사회적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함으로써 사회적 평화 유지에 기여한다고 본다. 물론, 사회보험이나 공적부조 체계를 시대적 변화에 맞게 개선해야 함을 이 관점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공적부조와 사회보장제도 이념을 혼합한 "기본생활보장 사회보험 (Bedarfsorientierte Mindestsicherung)" 도입에 관한 논의가 그 대표적 예라고 하겠다.

세번째는 – "세계화는 근본적 사회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사회국가 체제도 근본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자본 유동이 국가 통제를 벗어나 있고 예전보다 많은 기업이 임금이 싼 동유럽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같은 현상이 사회국가의 뿌리를 흔들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아시아나 남미 금융 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금리만을 노리고 투자를 할 경우 얻게 되는 손해를 고려할 때, 아직도 많은 투자자들이 안정된 유럽 금융 시장을 떠나지 않다는 점, 또한 기업이 투자할 때에는 싼임금 뿐만 아니라 노동자 숙련도, 기술 수준, 사회하부구조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독일 기업이 쉽사리 독일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번째 관점은 "세계화가 근본적 변화를 야기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사회국가 체제는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독일 사회국가 위기는 분명히 존재하며, 이 위기는 세계화라는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국가 체제 내적 요인으로 야기됐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이 가운데 위기를 가속시키는 역할만을 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관점은 취업 근로자만을 중심으로 한 사회보험제도가 보여주는 모순에 주목한다. 기여금 중심 재정 운영이 원칙이면서도 통일 후 막대한 액수를 과거 기여금을 내지 않은 구동독인 연금을 위해 지출하는 등 보험 외적 요인에 의해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제도적 모순이 현재 중요한 재정 압박 요인이라고 본다. 만성 실업으로 야기되는 생활 수준 유지 문제를 현 사회보험제도로 해결할 수 없음도 문제로 지적한다. 따라서 사회국가의 전통적 기반으로 여겨져 온 "사회적 연대의식 (Solidarit t)"도 사회보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연대의식에 불과하며, 앞으로 변화하는 독일사회를 지탱하는 역할은 할 수 없으리라 전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국민을 상대로 한 기초연금 (Grundsicherung)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관점들이 가지는 타당성, 문제 등에 대한 개별적 고찰을 통해 각 개별 명제들을 검증하는 절차가 앞으로 따라야 하리라 본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화가 가져다 주는 영향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이 요청된다. 이 시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현상은 – 세계화라는 개념을 앞세워 사회보장제도의 질적·양적 측면에서의 축소, 계층을 초월하는 실업문제 등장, 계층 간 삶의 질 양극화 현상 등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집권 사민당 (SPD)의 슈뢰더 수상이 내세우는 소위 '신중산층 (Neue Mitte)' 논의가 결국 시장 경쟁의 극단적 자유화를 통해 중산층의 소멸을 야기하고 종국에는 '사회국가의 미국화 (Amerikanisierung des Sozialstaats)' (Martin/Schumann 1997:230)로 가는 시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사민당은 최근 있었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였다.

물론 세계화의 물결에 반하여 국경을 닫아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다니지 않고 변화에 대처하여 사회국가를 계속 발전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세에 기초한 기본생활보장 (Grundsicherung), 취업에 있어서 안식년 제도 (Sabbatkonto), 사회보험에 기초한 기본욕구 충족 (Bedarfsorientierte Mindestsicherung) 혹은 시민노동 (B rgerarbeit)에 기초한 임금 (B rgergeld) 지급 등 여러 가지 제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 제안을 둘러싼 논쟁도 사회정책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사회국가가 개편될 것이냐는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참고문헌

Altvater, Elmar/Mahnkopf, Birgit (1997), Grenzen der Globalisierung, Westf lisches Dampfboot, M nster.

Kaufmann, Franz-Xaber (1998), "Globalisierung und Gesellschaft", in: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B 18/98, S.3-10.

Lessenich, Stephan (1997), "Verwirrende Lehre zu verwirrenden Handel", in: Zeitschrift f r Sozialreform, H.11/12, S.854-861.

Martin, Hans-Peter/Schumann, Harald (1997), Globalisierungsfalle, Rowohlt, Hamburg.

정재훈 / 충남대 강사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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