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3 2003-05-02   1467

“스럽다”와 “답다”

지난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TV토론회가 생방송으로 중계된 후 네티즌들 사이에서 “검사스럽다”는 말이 급속도로 퍼졌었다. 대통령에게도 대드는 사람들이니 일반 국민들에게는 오죽하겠느냐, 고생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룸싸롱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느니, 제 것은 안 주면서도 남의 것은 빼앗으려 한다느니 한마디로 검사들을 비난하는 민초들의 감성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어의 어법에 맞지는 않지만 “검사스럽다”는 신조어가 탄생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국민들은 “검사답다”를 기대했다는 말이다.

우리말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스럽다”는 이름씨(명사) 따위의 말 뿌리에 붙어 “그럴 만 하다”는 뜻을 가진 그림씨(형용사)로 쓰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랑스럽다 영광스럽다 좀스럽다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답다”는 이름씨 따위의 말 뿌리에 붙어 “그 성질이나 자격이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어른답다 학자답다 자네답다 등으로 쓰인다. 이렇게 보면, 사실 “스럽다”나 “답다”는 어떤 이름씨와 결합되느냐에 따라 좋은 뜻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또한 그 이름씨 자체가 좋은 뜻을 나타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도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의 가치판단과 상황적인 맥락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사실, 검사는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국가 공무원이다. 따라서 “검사”라는 이름씨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럴 때 “검사답다”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중의 하나였던 검사는 참으로 검사다운 검사였다. 그러나 너무 정치적이거나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검사, 심지어 부패에 연루된 검사는 “검사답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말이 “검사스럽다”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스럽다”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로 활용되는 것 같고 “답다”는 긍정적인 뜻을 가진 어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3월 17일 또 하나의 “스럽다”가 탄생하였다. 보건복지부 김화중 장관이 보육업무를 여성부에 이관하겠다는 느닷없는 깜짝 인터뷰 기사가 사회복지계를 놀라게 했다. 아직도 “참여복지”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볼 수 없어 구체적인 정책내용을 기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터져 나온 복지부장관의 발언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정부가 말하는 참여복지의 분명한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참여복지의 그림은 아직 스케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도화지 한 쪽을 찢어버리는 꼴 아닌가? 그렇다고 그리겠다는 고령화사회에 대한 복지의 그림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전문가들과 현장의 의견을 두루 섭렵하여 참여복지에 대한 밑그림이 완성된 후에 보육사업을 이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도 이런저런 불만들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취임하자마자 일을 저지르니… 처방전도 없이 일단 주사바늘을 꽂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보건복지부장관의 이러한 태도는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국민의 부담률 증가 또는 급여율 하락에 대해 국민적인 설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일단 결정을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일 처리 방식은 국민들을 매우 불안하게 한다. 참으로 복지부장관스럽다. 앞으로 건강보험 통합문제, 의약분업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걱정이 된다.

보건복지부의 정책과 사업들은 계급, 계층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게 되어 있다. 의약분업이 그랬고, 건강보험 통합이 그랬으며, 국민연금 또한 그러하고 이번에 파장을 일으킨 보육사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일반자본과 의약자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으며, 보건의료계, 노동계, 복지계, 여성계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보건복지부장관은 다양하고 심지어 대립적인 주장과 의견들을 통합적으로 잘 이끌어내는 지혜와 자기희생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자리이다. 특정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밝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특정 정파나 세력의 대표로 안배된 인사가 이끌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물론 모든 장관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장관은 장관다와야 한다.

`90년대 초반,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 K씨의 경우 자신이 약사 출신 정치인이라 복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며 전국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학과장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일회적인 모임이었고 정례화 또는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태도는 신선했다. 그 당시보다 민주화된 정부의 장관이라면 복지에 대해 배우기 위해 겸허한 자세를 보이고 참여복지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책임성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취임할 때 시민사회단체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나타낸 것도 복지부장관스럽다. 그러나 이제 복지국가의 비전을 마련하고 설득력 있는 참여복지의 그림을 보여주어야 복지부장관답다.

윤찬영 / 전주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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