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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07
  • 2007.05.01
  • 387
한미 FTA와 한국사회의 변화

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디자이너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가 만든 제품(product)의 사용 효과는 써보지 않고도 미리 알 수 있다. 한미 FTA의 체결 효과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누구의 주도에 의해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한미 FTA가 장차 어떠한 효과를 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정확한 가늠이 가능하다.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아직 정보공개가 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언론 등에 의해 일부 알려진 것만 보더라도 협상 내용은 거의 미국이 원한대로 채워진 듯하다. 우리로선 얻은 건 별로 없고 내준 건 너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미 FTA의 체결로 이 땅에 들어설 새로운 제도, 정책, 규범 등은 실로 무수할 것이다. 우리가 고쳐야할 법만 해도 100여개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전체 법률의 10분의 1 정도를 손봐야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가히 헌법개정의 수준이다. 반면 미국은 단 한 개의 법률개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는 한미 FTA 협상이 미국의 주도에 의해 미국이 바라는 방향으로 타결되었음을 의미한다. 한미 FTA라는 산출물(product)의 디자이너는 결국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한미 FTA의 미래 효과는 가늠 가능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과연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예컨대 영미식이라고 불리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 체제와 흔히 유럽식이라 불리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 체제가 그것이다. 영미식은 시장과 자본의 자유를 최우선시함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반면, 유럽식은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의 조정을 장려함으로써 사회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간에 소위 ‘자본주의 표준경쟁’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만들고 스스로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기술, 규율, 제도, 체제 등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경우, 그리하여 그것이 ‘세계표준’(global standard)으로 자리 잡을 경우, 그 창시자는 세계 어디를 가나 편안한 환경과 유리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요국간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표준경쟁이 벌어진다. 자본주의체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국의 자본주의체제가 세계표준이 될 때 해당국은 세계 경제질서의 주도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주로 유럽연합(EU)의 확산과 타지역 및 국가들과의 협력관계 구축 작업 그리고 ‘유러피언 드림’ 같은 연성파워(soft power)의 투사 등을 통해 자신의 자본주의 영역을 점진적으로 넓혀가고 있다면,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앞세운 다자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전미주자유무역협정(FTAA) 등의 체결을 통한 지역주의, 그리고 한미FTA 같은 양자주의적 경로 등을 통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보다 급격한 자기확산을 추진하고 있다.

이 경쟁에서 미국이 유럽에 비하여 훨씬 공세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일한 경쟁상대인 유럽조차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타 지역이나 국가들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산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압력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80년대의 중남미 그리고 1990년대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IMF 관리체제하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요당한 것은 그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 역시 IMF 구조조정을 뼈아프게 경험했고 이제는 다시 FTA방식에 의한 미국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미국은 FTA를 미국식 세계화, 즉 미국식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외교 목표의 달성을 위한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미 FTA 역시 그러한 용도로 수행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한미 FTA에서의 미국의 의도란 한국의 경제체제를 ‘미국화’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이너인 미국의 의도가 그러한 것이라면 한미 FTA의 미래 효과는 한국 경제체제의 미국화가 가져올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미국식 세계화는 금융자본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요체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의 FTA는 상대국에게 철저한 시장개방, 민영화, 정부개입 축소 등을 요구한다. 이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약소국에 대하여는 불공정한 관계의 설정을 요구하는 FTA라 할 수 있다. 미국식 FTA의 핵심적 특징은 그것은 항상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라는 데에 있다. 단순히 제조 상품만이 아니라 농산품 및 써비스 상품을 모두 교역 자유화 대상에 포함하며 그 외에도 투자, 지적재산권, 경쟁 정책, 노동, 환경 등 경제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협정이라는 것이다. 결국 실제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경제통합협정에 해당한다.

미국과의 포괄적 FTA 체결로 한미 양국이 경제통합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상당부분 미국식으로 바뀌어가게 될 것이다. 본디 상품, 서비스, 기술, 자본 등은 경제규모가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로, 그리고 경제발전 정도가 높은 나라에서 낮은 나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경제통합협정은 당연히 이 흐름을 더욱 거세고 가파르게 그리고 보다 일방적이게 한다. 흐름에 방해가 되는 각종 장벽들이 인위적 충격에 의해 비교적 단기에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거되는 장벽들에는 관세뿐 아니라 제도, 규범, 정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및 경제체제까지도 포함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자본주의 유형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성취를 위해 필요한 효과적 기제와 유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노력 없이 당장 미국식 FTA를 체결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화가 이로운 것이라면 반대할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화는 결코 바람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정한 자본주의 유형은 특정한 복지체제 혹은 민주주의 형태와 친화성을 갖는다. 조정시장경제를 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나 조합주의적 복지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시장의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자유주의 복지체제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복지의 질과 양조차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있는자는 최상의 복지를 누릴 수 있으나 없는자는 누군가의 시혜만을 바라보아야하는 굴욕적 처지에 빠지게 된다. 전자의 민주주의가 보다 참여적이고 포괄적이라면 후자의 민주주의는 배타적이거나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노동자나 농민 혹은 중소상공인들과 같은 약자집단들의 실질적 정치 참여는 당연히 전자의 민주주의에서 제대로 보장된다.

우리가 미국식 자본주의로 갈 경우 우리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절름발이 민주주의로 전락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체계의 미비로 인해 97년체제 이후 사회 양극화 현상은 가뜩이나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 김대중 정부 당시 IMF 구조조정의 여파로 최고조에 올랐던 우리 사회의 소득불평등 정도는 노무현 정부에 와서도 개선되지 않았고, 거기에 더하여 부동산소유 등 자산불평등 상황마저 심해져 빈부격차 문제는 악화일로에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빈곤층의 확산이다. IMF 체제 하에서 한국의 빈곤 인구는 급격히 증대하였다. 중위소득의 50%를 기준으로 하여 빈곤율을 계산할 때 김대중 정부 당시 한국의 연평균 빈곤율은 무려 10.3%에 달했다. 그런데 그것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더욱 악화되어 물경 12%에 육박하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도 같은 양상으로 증대되고 있다. IMF초기 45%를 밑돌던 비정규직이 어느새 56%를 넘어섰다.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는 고용불안 상태의 비정규직이 이제 정규직을 누르고 오히려 보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근로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하루하루가 불안한 자영업자들의 규모가 600만을 넘는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과 삶을 즐길 수 있는 인구는 고작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만약 미국화의 길을 걷게 된다면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격차 문제는 전혀 시정됨이 없이 (현재의 미국이 그렇듯이) 당연한 우리의 현실로 고착될 것이다.

미국은 빈부격차가 세계 최악의 수준인 나라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는 고작해야 잔여적(residual)일 뿐인, 따라서 막대한 규모의 빈곤계층은 거의 방치상태에 놓여 있는 국가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선진국’이며,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의 투옥률을 기록하고 있는 불만 가득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국의 특수성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 광활한 영토, 엄청난 내수시장,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권 등 미국은 미국이기에 가능한 여러 형태의 격차 수용 기제를 갖고 있다.

우리에겐 그러한 기제가 전혀 없다. 격차 용인 정도가 매우 낮은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사회가 격차의 확대 혹은 유지를 당연시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로 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평등과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양극화와 격차 확대를 해소하고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우리 국민들이 우리 경제체제의 미국화를 선호할 까닭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 본고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논문 “한미FTA와 한국형 개방발전모델 모색”(『창작과 비평』 2007년 봄호)에서 옮겨온 것임을 밝힌다.

최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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