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보건의료정책의 측면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한 후 1년여 동안의 기간은 일종의 "준비기간"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의료보험 통합을 제외하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정책이나 프로그램 자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고 해서 정책의 기조나 방향을 시비할 일은 못된다. "준비"만 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정책의 설계와 추진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DJ 정부 1년의 보건의료정책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반드시 외형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성과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실로 나타난 정책이나 사업이 평가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 정책의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정책목표와 이에 근거한 준비"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 정부는 지난 1년간 중요한 정책들에서 다른 정부와 구별되는 점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뚜렷한 철학에 근거한 분명한 정책목표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정책시행의 준비도 부실함을 면치 못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보건의료정책을 추진하는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 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새 정부 출범 후 1년의 시기가 경제위기 상황에서 보건의료와 복지 전반의 새로운 틀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의 소극적인 자세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부처가 대량실업과 고용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인 역할로 해당 과제의 중요성을 설득하고 사회적·정책적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면, 보건과 복지 업무에서는 종래의 역할을 탈피하여 새로운 모형을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이 대단히 미약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새 정부 출범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주로 이와 연관된 과제를 중심으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평가해 보고자 한다.

방향 잃은 정부조직 개편과 공공 보건의료 "개혁"

1998년 한 해 동안 정부조직과 공공부문의 개혁만큼 정책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변화를 찾기는 쉽지 않다. 보건의료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부 출범 이전부터 중앙부처에 대한 조직개편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지방조직과 기타 공공부문의 변화가 이어졌다.

중앙조직의 개편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여기서는 주로 보건소를 비롯한 공공보건의료기관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한다.

공공 보건의료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보건소와 지방공사 의료원, 그리고 대학병원이나 특수병원(보훈병원, 경찰병원, 원자력병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소위 "공공부문 개혁"의 핵심은 보건소와 지방공사 의료원으로, 이들은 1998년에 진행된 1차 지방조직 개편의 주 대상 중 하나였다.

공공 보건의료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보건소(와 그 관련) 조직의 개편에 대한 행정자치부의 지침이다. 여기에는 보건소 등의 개편방안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지침을 명시하고 있다.

ㅇ 주민이용률이 낮고 민간 병의원 등 보건의료기관이 중복되는 지역은 적극 정비(보건지소, 보건진료소도 동일)

ㅇ 의료, 진료기능 중 위탁가능 기능 위탁 검토(보건의료원 포함)

ㅇ 지방공사 의료원이 있는 시군 보건소는 존폐검토 또는 기능재정립 후 축소

이와 같은 개편 방향이 전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근거하여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3개 보건소, 150개 이상의 보건진료소가 폐지되었다. 맥락은 다르지만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부 국립병원의 민영화 논의, 최근 발표된 국립대학교병원의 경영혁신 방안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단순한 수의 감소가 아니라 이러한 조치의 배경이 되는 보건의료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다. 보건의료에 관한 한 현 정부는 "최소의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공공 보건의료는 민간부문이 담당할 수 없는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공공 보건의료에 대한 현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일부 부처, 일부 관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보건의료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은 이것을 매우 사적이고(private) 개인적인(individual)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 정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 정부부문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민간의료를 중요한 경험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정부의 정책담당자, 보건의료 전문가, 일반 지식인에게까지 이러한 인식은 매우 강고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전세계적인 보편성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보건의료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질병 때문에 그 구성원을 한 사회로부터 배제(exclusion)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형평성과 연대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현 정부는 이전 정부의 인식수준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으며, 더구나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 여전히 보건의료를 지극히 개인화된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불가결한 한 요소로서의 보건의료는 여전히 요원한 "꿈"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편, 지방조직 개편은 수의 축소를 넘어 보건소를 비롯한 공공 보건기관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수평적으로 관련 업무를 줄이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한결 높아졌다.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 책임성의 제고, 주민의 민주적 참여, 합리적인 평가와 보상 등의 과제는 지방조직 개편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또 다른 과제로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국민과 지역주민의 입장에서는 보건의료 분야 공공조직의 개혁은 약간의 조직축소 이외에는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운 상태라 할 수 있다.

안이한 경제위기 대책

경제위기 상황에서 질병은 가계파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국내외에서 빈곤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는 질병과 가계파탄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는 빈곤 가구의 17-54%가 가장이나 가구원의 사망, 질병 때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사정은 영국이나 미국도 비슷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보건의료비 부담에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경제위기에 대단히 취약하다. 단적인 예가 가계지출구조이다. 1985년부터 1994년 사이에 보건의료 서비스에 대한 지출 중 가계가 직접 부담한 몫은 매년 거의 55%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의료보장이 되어 있다고 하나 본인부담률이 50~60%에 육박한다.

이런 형편에서 질병이 가계파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고액의 진료비가 들거나 오랜 기간 만성질환을 앓게 되는 경우, 진료비 혹은 보건의료비 지출이 가계에 미칠 영향은 명확하다.

의료보장과 공공보건의료체계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질병으로 인한 가계파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보호장치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정부는 이러한 관점에서 의료보장과 공공보건의료체계를 보강하는 명확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진료비 본인부담 상한제, 의료보험의 급여확대, 공공 보건의료기관의 취약계층에 대한 서비스 강화 등이 계속 요구로 제기되었으나, 정부는 여기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주무 부처라 할 수 있는 보건복지부의 소극적인 자세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 하의 보건의료 서비스 확충을 위해서 지난 1년간 새로운 정책내용의 개발과 실행, 정부 다른 부처에 대한 설득, 제도적 틀의 마련, 민간부문과의 협력을 통한 사업개발 등 모든 부문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노동연구원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공동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경제적 약자와 실업자 사이에 광범위하게 보건의료 필요(need)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용과 실업, 복지 등과 비교하여 보건의료 서비스 확충은 상대적으로 더욱 더 미미한 수준에 머무른 것이 사실이다.

개혁정책의 계획과 추진

1998년은 그 동안 수차례 논의와 잠복을 거듭했던 보건의료분야 개혁정책들이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다시 전면으로 떠 오른 시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보건의료 개혁은 지난 한 해 동안 대통령 선거 공약 → 정권인수위의 100대 과제 → 정부와 여당의 보건의료 개혁정책 수립이라는 길을 밟아 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대체적인 개혁의 내용과 논리가 만들어지고, 1998년 말까지 중요한 과제들에 대하여 대체적인 방향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언뜻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등 큼지막한 과제들 때문에 아직까지 보건의료 개혁이 논의의 한복판에 진입한 것은 아닌 듯도 싶다. 그런 점에서 대선 공약과 인수위 과제에 포함되었던 보건의료 개혁과제들은 대부분 아직도 준비단계에 있다.

이들 개혁과제들은 1998년 말에 국민회의 정책위원회가 펴낸 「보건의료 선진화 정책보고서」에 주요 정책내용과 추진방향이 정리되어 있다. 또 일부 정부가 추진할 내용들은 곧 발표될 「21세기 보건의료 종합계획」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한 개혁정책들로는 주치의 등록제, 수가차등화, 일차의료인력의 획기적 증가, 중소병원의 기능전환, 공공보건의료체계 정비, 방문보건사업, 국가보건복지 정보체계 구축 등이 검토되었다.

지금까지는 이들 과제들이 논의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왔으므로 과제 자체에 대한 평가는 차후에 다룰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제들이 아직까지 넓은 범위의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 당사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정부 여당을 비롯한 집권 세력 내에서도 이를 추진할 뚜렷한 힘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될 전망이다. 더구나 상당수의 개혁정책이 이해당사자를 가지고 있는 만큼, 개혁을 추진할 주도세력이 없다는 것은 향후 개혁정책의 성패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집권 세력이 개혁정책을 추진할 충분한 동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현 단계 정치지형의 당연한 귀결로 해석할 수 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는 공동 정권 내의 이질성, 정당 내 구성원들의 극히 다양한 이념적 성향, 개혁과제에 밀착해 있지 않은 관료조직의 문제 등이 보건의료 분야 개혁과제를 추진하는 데에도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회에서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직업적 이해관계가 보건의료 분야의 정책 추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기할 것은 개혁정책을 주도할 지도력이 정부 내에서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이 개혁 주도세력이 미비한 또 하나의 중요 원인이라는 점이다. 특히 보건의료 정책에서는 범정부 차원에서 관련 작업을 조정하여야 하는「사회복지수석」의 역할이 미흡했던 것이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 근본원인은 지역연합을 기초로 하고 있고 집권경험이 전무한 현 집권세력의 한계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은 무엇이든 이러한 지도력의 미비가 개혁정책이 정부정책의 주류(主流)로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진행되고 준비되었던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보건의료 개혁, 그리고 정책환경으로서의 경제위기 상황은 1998년을 넘어 1999년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보건의료 개혁은 1998년 1년의 준비 시기를 거쳐 1999년 본격적인 전개를 앞두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 역시 미완의 상태로써, 정부의 2차 중앙 및 지방조직 개편 등 주변 여건에 따라 바로 현실적인 문제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경제위기 상황 역시 다소의 변화는 있을 망정 근본적인 환경으로서의 중요성은 여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과제와 환경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1999년의 보건의료 정책은 DJ 정부 1년의 반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다른 것에 앞서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본선이자 권리로서의 보건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정책적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국 보건의료의 "구조변경"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바탕으로서 정부의 역할 재설정(re-orientation)과 정부 내 지도력(leadership)의 재정비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김창엽 /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