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과 고모라

구약 성서에 악의 극치로 상징되는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있다. 사치와 방탕, 부정과 부패, 음란, 폭행, 윤리의 몰락, 인권유린을 보다 못한 신께서 불의 심판을 준비한다. 착한 사람 롯이 신께 간청해서 의인 10명만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는 신의 약속을 받아내지만, 결국 10명을 찾지 못해 두 도시는 심판을 면치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소돔과 고모라의 악목(惡目)을 골고루 갖춘 우리 사회에도 신의 심판이 임박해 있을까? 최소한 한가지 측면에서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의인이 많은 것이다. 대중매체들은 온갖 악의 화신들로 도배되어 있지만, 그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소개되는 다양한 미담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의인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실로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노숙자들과 실업자들, 결식아동들, 소년소녀 가장들이 굶어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수고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대량실업에 직면하여 정부는 수조 원의 자금을 동원하면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을 운위해 왔지만, 정작 안전망을 만들어낸 것은 이들 의인들이었다. 이들은 번듯한 자선사업가들이 아니다. 그들이 돕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달픈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박봉을 쪼개고, 고단한 가사의 한 틈을 할애해서 이웃과 아픔을 나누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랑이 귀한 생명들을 건지고, 우리 사회를 불의 심판에서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의인들이 하는 일과 정부가 하는 일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의인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이 게을렀는지, 근면한지, 공부를 잘하는지, 앞으로 쓸모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지만 묻는다. 정부는 그렇지 않다. 정부의 생각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공짜로 먹고살게 해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불가피하게 공짜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일하는 사람보다 높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심판자가 된다. 그러나 그 심판의 기준은 획일적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중심적이고 지배적인 가치를 유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그 가치는 효율과 경쟁의 가치이며, 당연히 힘의 논리이다.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에서 승리한 자가 우월하고, 패배한 자는 열등하다는 논리가 전제된다. 열등한 자들이 우월한 자들과 동등한 생존권을 누리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된다. 2등보다 조금밖에 낫지 않은 1등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노름판같은 사회가 당연시된다. 이러한 지배의 논리는 일견 타당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해 보이지만 일차원적이다. 여기에서 지배적 가치의 타당성은 문제시되지 않으며, 다양한 다른 가치들의 동등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부와 쾌락을 지배적 가치로 숭상했던 소돔과 고모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효율은 비효율을 전제하며, 경쟁은 패배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효율과 비효율, 승자와 패자는 항상 같이 존재한다. 따라서 표면적인 비효율과 패배자의 내면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함께 사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우리 사회의 선인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즉 다양한 삶의 스타일을 영위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말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존엄성에 연유한다. 우리는 사회복지의 출발점이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왜 인간이 존엄한지는 잘 모른다. 인간은 과연 존엄한 존재일까? 아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 자체가 불과 몇 백년 되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 이래로 오래고 오랜 인류의 역사 동안 어떤 소수의 인간들은 존엄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헌법적으로 선언된 오늘날에도 힘있는 사람들의 존엄성만 존중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론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관계론으로 풀어야 될 것이다. 내가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가 나를 존중할 때 인간은 서로 존엄해지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타자의 증오와 그에 연유한 위협을 원천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타자를 존중하기로 결정했을 수 있다. 이러한 개별적인 경험들이 사회조직의 원리로 승화되어, 인류의 생존을 유지하는 귀중한 비밀이 된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사상은 인류가 생존의 비밀로 깨달은 지혜인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관계론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깨달음이 되었다.

90년대이래 우리 나라의 역대 정부들은 모두 새로운 밀레니엄을 대비하는 혁신적인 복지체계를 정립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별로 없다. 혁신다운 혁신은 찾아볼 수 없다. 영국 복지국가의 초석이 된 베버리지 보고서 비슷한 것 하나 산출하지 못하였고,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였다. 문제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넘어선 새로운 입장의 정립이 진지하게 고민되지 못하였던 데 있다. 정부는 더 배워야 한다.

이영환/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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