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의약분업

시민단체의 의약분업안 수용

드디어 의약분업이 실시되게 되었다. 경실련, 녹색소비자연대, YMCA, 참여연대, 한국소비자연맹 등 5개 단체가 지난 3월에 결성한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가 제시한 의약분업 방안을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가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30여년을 끌어오던 의약분업안 시행이 이제 그 실시의 확실성을 더하게 된 것이다.

약품 조제에 관한 한 의사는 비전문인이다. 또한 진단, 처방에 관한 한 약사도 비전문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의사와 약사는 경쟁적으로 병을 진단, 처방하고 또한 약품을 조제하고 있다. 최근 자주 인용되는 페니실린 내성률과 같이, 의사, 약사가 의약학적 타당성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로 진단, 처방, 조제를 경쟁하고 있는 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소비자들에게 돌아오게 된다.

의약분업은 의약품의 오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불필요한 약제의 사용을 막음으로써 경제적으로 국민을 보호하며 나아가 의약계의 고질적인 의료비리를 근절하는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이다. '약은 약사에게 처방은 의사에게'라는 구호대로 의약분업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의사의 처방이 자연스럽게 공개되고 이를 약사가 검토하는 시스템이 제도적으로 구축됨으로써 의약서비스의 질적 향상이 도모될 것이며, 약에 대한 설명이 강화되고 외래처방전을 직접 환자들이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치료과정이 공개되어 환자의 알 권리가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시민대책위원회 결성과 활동

시민대책위가 결성된 시점은 3월 30일이다. 이는 의약단체가 약사법에 의한 금년 7월 1일 실시를 불과 넉 달 앞둔 시점인 3월 2일에 기습적으로 '준비부족'을 이유로 실시연기를 청원하고, 3월 9일 연기청원이 국회에서 받아들여진 이후 약 한달 간의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기간은 그 동안 의약분업 실현을 촉구하고 준비해 온 시민단체가 매우 심각한 내부진통을 겪은 시기라 할 수 있다. 비록 의약단체가 연기청원의 전제 조건으로 '의약분업 실시를 위해 시민소비자단체와 같이 노력하여 2개월 내에 의약분업 모형의 도출을 완료하겠다'는 약속이나마 하게 된 것이 그 동안의 시민단체 활동에 의한 하나의 성과인 측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단체의 즉각적인 연기수용과는 의미가 달랐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시민단체로서는 기정사실화한 의약분업 실시 연기를 과연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요구대로 계속 금년 7월 1일 실시를 사회적으로 밀어붙일 것인지, 만약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한다면 의약단체가 요구한 2개월간의 협의과정에 응하는 게 좋은지, 혹 의약단체들의 지연작전에 시민단체가 말려드는 수순은 아닌지 하는 등의 논점들이 주요하게 논의되었다.

이는 1963년 당시 약사법에 그 실시를 명문화한 이래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의약분업이, 로비를 앞세운 의약단체와 주무부처로서 5년의 세월을 허송만 한 보건복지부 그리고 업계의 로비를 무책임하게 수용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등에 의해 또다시 연기되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시민단체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던 질문들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이제 의약분업의 준비를 의약단체와 정부 그리고 국회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무엇보다 1년 연기가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타개하여 의약분업을 연착륙하도록 유도해 나가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의약분업 논의 과정이 이익단체들간의 '이해관계 조정'으로 흘러 의료소비자인 국민의 입장이 외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시민단체는 이번 기회에 소비자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약분업안을 제시하고 이를 의약단체에 관철함으로써 의약분업이 2000년 7월 1일로 명시된 시한에서는 더 이상의 연기가 결단코 없도록 제반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마침내 3월 30일 경실련 강당에서 그 결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기에 이른 시민대책위는 이와 같은 내용을 내외에 표방함과 아울러, 의약분업의 준비과정뿐만 아니라 그 추진과정에도 적극 참여하여 정부와 의약 단체의 실천 노력을 감시하기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시민대책위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한편으로는 의약단체와의 공식 비공식 협의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위촉된 자문위원들과 함께 '소비자 입장에서 본 의약분업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민대책위는 의약분업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와 공식성을 부여하기 위해 매주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의사협회와 약사회, 병원협회뿐만 아니라 개원의 협의회, 학계 전문가, 언론사 관련 전문기자 등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공개'된 자리였고 각 단체의 의약분업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4월 22일에는 공청회를 열어 '소비자입장에서의 의약분업안' 초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5월 6일 공개토론회에서 시민대책위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는 의약분업안 최종안을 의약단체에 제시하였고, 마침내 의약 양단체가 5월 10일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합의된 의약분업안의 특징과 의의

이번에 시민대책위가 제시하고 의약단체가 합의한 의약분업 방안은 지금까지 거론되었던 각종 모형 중 이른바 '완전 의약분업' 모형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의약분업 방안이 나왔지만 어느 것 하나 이번 안만큼 원칙에 충실한 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합의된 의약분업안의 특징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약분업의 결정적인 주체이면서도 정작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줄곧 배제되어 온 소비자의 입장이 이번에는 거의 훼손됨이 없이 의약단체들에게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의약분업안 협의과정은 의사와 약사 나아가 병원협회와 제약회사 등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조율이나 중재하는 차원으로 일관되어 소비자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되어 왔다. 이해관계가 첨예하여 그 동안 상상하기 어려웠던 병원조차도 의약분업의 대상에 포함되게 된 것은 이번 의약분업안이 일관되게 소비자측 입장을 관철하고 있음을 잘 말해 준다. 이로써 모든 병의원의 외래조제실은 폐지되게 되었고, 모든 병의원은 원외 처방전을 발행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둘째, 이번에 합의된 의약분업 방안의 원칙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번 소비자안은 의약분업을 통해 무엇보다 '약물 남오용 방지'를 최우선의 원칙으로 고려하였고 여기에 소비자의 비용 및 편익 문제를 부가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의약분업 합의 이후 많은 이들이 주사제 사용문제로 인한 국민불편 초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주사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주사제를 쓰지 않게 되면 이들이 말하는 불편의 폭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외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주사제가 우리나라에서는 과다하게 남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값도 싸고 상대적으로 불편하지도 않는 경구약으로 점차 대체되도록 유도함으로써 주사제 사용을 대폭 억제하고 약품남용을 줄여나가는 현행의 방식에 대해 국민들도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셋째, 이번 의약분업안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은 소비자의 알 권리에 관한 것이다. 의사 혹은 약사에 비해 소비자는 당연히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자신의 처방과 투약이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여 의사, 약사들이 극히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환자들 내의 정보의 왜곡과 자의적인 진단, 처방도 상당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의사나 병원은 처방전을 발행하여야 하고,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사로부터 약을 구입하던 관행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의사의 처방없이 구입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의 경우에도, 그 동안 약국에서 흔히 조제해 주던 소분(가루약 등) 판매 방식이 전면 금지됨으로써 소비자는 약갑으로 포장된 상태의 약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환자는 자신이 먹는 약의 이름과 설명서를 통해 소비자의 알 권리가 더욱 신장되게 되었다.

넷째, 의약분업의 실시를 통해 현재 의료기관의 부풀려진 약값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의약분업이 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약품 공급구조에서, 제약회사는 의약품 사용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의사, 약사 등의 처방자에게 이른바 할증, 할인, 랜딩, 리베이트비 혹은 기부금 등의 명목으로 높은 약가마진을 보장해 주는 비정상적인 유통구조가 가능하다. 한 해에 1조 원이 넘는 약가차액이 그 동안 고스란히 의약인들의 불법 음성수입이 되고 있고, 그 피해를 소비자가 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구조로 인해 소비자들은 직접적인 추가비용 외에도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의약품을 선택받아야만 하고, 고가약품 투약과 과잉 투약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의약분업이 실시되고 처방자인 의료기관이 의약품의 직접적 거래과정에서 제외되면 의료인들은 지금까지 약가차액을 통해 확보한 경제적 이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약사·약국의 입장에서도 의약분업으로 전문의약품을 임의조제할 수 없게 되면 약가차액을 통한 이윤확보가 제한되게 된다. 결국 의약분업은 약물오남용의 요인 중 하나인 약가마진의 비정상적 구조를 제거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작년 8월 정부에서 이른바 4차 분업추진협의회 안을 내어 놓았을 때 의료계는 강한 반발을 보였다. 의사회는 의사회대로 약사회는 약사회대로 서로 손해보는 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실련 등 시민단체는 이들의 반발보다 더 큰 반발을 한 바 있다. 이 안은 시종 의약단체의 이해관계에 따른 나눠먹기 식으로 일관한 의약분업 방안이었고 소비자들의 입장은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단체의 반발에 정부는 부랴부랴 제 5 차 분업추진협의회를 개최하여 이른바 후속조치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반발을 무마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정부는 의약계로부터 '준비미흡'이라는 빌미를 제공하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이제 의약분업은 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의 대부분은 정부의 몫이다. 정부가 이번 합의안에 반영된 내용을 얼마나 치밀하게 제도화하고 국민적 설득을 하느냐가 의약분업 시행의 결정적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김승보 / 경실련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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