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6 2006-09-11   554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며

지난 7월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수 년간 자체적으로 준비하여 온 차별금지법안을 발표하고 동 법안에 기반한 내용의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추진할 것을 국무총리에게 권고하였다.

80년대까지 수십년간 반민주·군부독재 시대를 살아 온 우리 국민은 불법 구금이나 공권력에 의한 폭력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훼손을 비롯한 자유권적 인권에 대한 침해를 막아내기에 급급한 험난한 세월을 지내 온 관계로 90년대 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도 자유권을 중심으로 한 기본권의 확장에는 주목하여 왔으나 정작 ‘차별’의 문제에 관하여는 상대적으로 인식의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 사회와 같은 계급·신분 사회에서의 신분상의 차별은 해당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본질적 제도로서 존재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기본으로 하는 국민주권 국가를 표방하여 1948년 독립한 이래 우리 헌법은 성별이나 종교, 인종 기타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헌법 규범은 이론상 현실 사회에 적용되었어야 할 것이었지만, 헙법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의 문제는 국민의 자유권이 제도적·실질적으로 보장되어 가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실은 그 동안 차별의 문제가 방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차별 문제는 특정 영역이나 특정 사유에 한정되지 않고 누적적이고도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영역별로는 고용분야에 집중되어 있으며, 차별 사유에 있어서는 장애와 관련하여 누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차별을 규율하는 일반법적인 법률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련 몇 몇의 법률에서 선언적인 차별금지 규정을 몇 조항 정도 두고 있는 정도이며, 실효성있는 그 어떠한 구제수단도 강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러한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는 차별을 금지하고 억제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법적 근거의 마련이 절실하다고 할 것이며, 이러한 법률의 제정은 우리 헌법의 핵심적 기본권인 평등권을 구체적,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의 차별금지법제 입법 작업은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선진 외국에 비하여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40년 이상 늦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등 보편적인 차별금지법제를 두고 있는 국가들의 경우 차별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자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주된 요인이자라는 점에 주목하여 일찍부터 그 시정을 위한 구체적인 입법을 해 왔고, 이러한 보편적인 차별시정법률과 법률에서 정한 현실적인 구제수단을 통하여 차별 시정의 성과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차별금지법제에서 보호되는 대상자들은 대부분 그 사회의 약자라 할 수 있으며, 차별 문제의 해소를 위하여는 그 차별로 인한 이득을 누려 온 상대방들의 현실적인 양보가 필요하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게 하여 온 각종 제도와 정책의 시정이 요구된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제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의 일부 양보와 이에 따른 사회적부담관계의 변동이 초래되며, 누적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각종 적극적 조치를 포함한 차별시정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경제적, 재정적 부담이 발생하므로, 법 제정 및 시행에 관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적지 않은 사회적 갈등이 수반되는데 미국이나 영국, 기타 차별금지법제를 두고 있는 국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범국민적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해결해 나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차별금지법과 제도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와 같이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난 2003년부터 차별관련 인권단체 및 전문가, 법률가 등과 함께 차별 관련 주요쟁점 및 외국의 입법례 검토, 조문 작업, 전문가 간담회 등을 실시하면서 법안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후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과 전문가 간담회, 관계부처 의견조회, 공청회 등을 실시하는 등 3년 여에 걸친 준비 끝에 위원회의 권고법안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차별금지법제 제정 움직임은 인권위의 이러한 움직임 이전에 이미 장애계 주도하에 장애차별금지법제 제정 운동이 있어 왔고, 관련 법률이 국회에 계류중이기도 하지만,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권고법안을 발표하고 입법을 권고한 것은 ‘차별시정 법제화’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공식적으로 던진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권위의 권고법안은 제1장(총칙), 제2장(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차별시정 의무), 제3장(차별금지 및 예방조치), 제4장(차별의 구제)의 총 4개의 장, 43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인권위 보도자료에서 정리한 주요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차별의 정의를 구체화하고 범위를 확대 및 보완(안 제2조)한 바, ○차별을 직접차별, 간접차별, 괴롭힘(harassment)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성별, 장애, 나이, 인종, 학력, 고용형태 등 20개를 차별 사유로, ○고용, 교육, 재화ㆍ용역 등의 공급 및 이용, 법령과 정책 집행에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를 차별의 영역으로 함

▶위원회의 차별시정기본계획 권고안 마련 및 대통령의 차별시정기본계획 수립(안 제8조), 중앙행정기관의 장,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시장ㆍ도지사ㆍ군수ㆍ구청장 및 시ㆍ도교육감의 연도별 세부시행계획 수립(안 제9조) 명시

▶고용, 교육, 재화ㆍ용역 등에서의 차별금지(안 제11조~제22조), 참정권, 행정서비스, 수사ㆍ재판절차 등의 영역에서 차별예방을 위한 조치 및 적절한 편의제공 등의 차별예방조치에 관한 규정 적시(안 제23조~제28조)

▶구제수단의 다양화 및 구제의 실효성을 제고한 바, ○위원회의 일반적인 구제조치로서 조정 및 시정권고(안 제30조), 특별한 권리구제 장치로서 제한적인 범위에서의 시정명령(안 제31조), 피진정인이 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의 경우 소송지원(안 제37조) 도입, ○법원의 구제조치로서, 적절한 임시조치, 차별적 행위의 중지나 적극적 조치 및 손해배상 등의 판결(안 제38조), 손해배상의 특례제도로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 지급 결정 가능(안 제39조), 증명책임의 전환(안 제40조)의 도입 등이다.

이와 같이 위원회의 권고법안은 금지되는 차별을 정의하고 그 구체적인 기준을 명시하고, 금지된 차별을 위반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효성있는 구제수단을 강구하고 있으며, 나아가 차별시정을 위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 조치를 제도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권위의 권고법안이 입법화될 경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내하청, 도급근로 등 비전형적 고용형태로 인한 차별 등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적 관행은 불법으로 금지되게 될 것이며, 이는 90년대 이후 우리 정부와 경영계, 노동계가 생산원가 절감이라는 명분 하에 눈 감고 양산하여 온 비정규직 등 고용영역에 있어서의 차별에 대한 암묵적인 카르텔의 해체를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아가 장애인에 대한 심각한 장벽이 되어 있는 교통시설, 건물 등 각종 공공시설 및 편의 시설들의 문제의 시정을 위한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해관계자인 재계 등으로부터 당장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게 되며, 실제로 인권위의 권고법안 발표가 있자 재계에서는 권고법안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폄훼하고 있으며, 유력 언론 매체들과 일부 경제분야 매체들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욱 더 확대될 것이다. 현 정부는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뿐아니라 정권 출범 후 성별,장애,외국인노동자, 비정규직, 학력·학벌 차별 등 5대 차별 시정을 국정 과제로 채택한 바 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기왕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작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차별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법제도 정비에 대하여 별다른 의지와 노력을 보이지 않은 채 이를 회피하여 왔다.

지금이라도 이와 같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차별 철폐를 국민에게 약속하여 온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인권위의 ‘권고법안’을 참고하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주도하고 입법에 착수하여야 한다. ‘차별’의 문제는 이제 고용정책이나 경제 정책의 문제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인권적 문제이며, 이에 소요되는 사회적 부담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사회연대성에 따라 짊어져야 할 과제임을 현 정부 스스로 인식하고 국민에게 진솔하게 설득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가 그들을 지지하여 선택하여 왔던 한 국민으로서 과분한 요구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차별금지법 입법 과정이 보다 성숙하고 합리적인 사회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합의의 관행이 정립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찬진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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