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4-02-26   638

<안국동 窓> 참여복지 1년, ‘참여’는 없고 ‘복지’는 보이지 않아

어느덧 참여정부 1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우리나라의 헌정사에서 대통령 자신이 인구에 이렇게 많이 회자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세인의 화제안에 노무현 대통령은 늘 가까이 있었다. 대통령 자신이 원한 것인지, 언론이 원한 것인지 구분은 가지 않지만.

그러나 지난 1년을 평가하려 하면서 허탈감부터 느끼게 되는 것은 이렇듯 대통령 자신의 말과 행동이 세인의 화제가 된 것에 비하면, 참여정부의 정책 자체는 세인의 화두에서 거의 사라진 느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노무현대통령은 정쟁을 선도했을 뿐 서민을 위해 한 것이 없다”는 혹평을 가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본다.

이러한 ‘정책의 실종’ 현상에 있어 복지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참여복지’로 대변되었던 현정부 출범 초기의 복지정책에 대한 세간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도대체 그 ‘참여복지’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조차 아직 해소되지 않았을 정도로 1년이 지난 이 시점 현정부의 복지정책이 가고자 하는 바를 국민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난 정부가 비록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생산적 복지’를 내세워 진행하였던 복지정책에 비하면 매우 대조되는 점이다. 그 생산적 복지 하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을 통해 ‘국민기본선’ 충족을 달성할 수 있는 큰 틀의 변화와 복지재정의 팽창이란 나름대로의 성과가 남겨졌다고 할 때, 참여복지 하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남을 것인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란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는 지난달 발표되었던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을 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어떤 것을 들이댄다고 하여도 지난 1년 노무현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총평은 “참여는 없었고 복지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간 박정희 식의 ‘압축경제성의 신화’가 지배해왔던 상태에서, 국민소득이란 양적 지표로 보았을 때 우리는 분명 성공한 국가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실제 우리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의 내면은 점점 더 피폐해져 왔다. 심각한 징후로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안에 소득분배의 불평등 기조가 완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사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실 우리 국민들의 생활 내면을 볼 때 의료, 주택, 교육, 아동양육, 노인 및 장애인에 대한 부양책임 등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의 충족이 개개인의 무한책임 하에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무리 명목소득이 높아져도 기실 우리들의 삶의 기초조건들을 확보하는 데에 급급한 생활을 한다는 의미이다. 세계화라는 표어가 보여주듯이 이제 세계자본주의로 전일화되는 와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은 그러한 기초조건들을 확보하기에도 충분치 못한 소득을 벌 수밖에 없기에, 비루한 자신의 삶을 한탄하면서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떨치지 못한 가운데 자살이나 범죄라는 극단적인 길로 들어서든지 아니면 이 나라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도 지니지 못하고 소리없이 죽은 양 하루하루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굉음만 느끼지 못할 뿐이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는 단순히 경제가 불황이어서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생계형 자살이 꼬리는 무는 것에서부터 500만명이 넘는 절대빈곤층, 100만가구에 달하는 해체가정, 100만명에 달하는 빈곤방임아동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최저의 출산율에 의해 2030년경부터는 절대 인구 자체가 감소하고 연간 100쌍이 혼인하는 반면 48쌍은 이혼으로 갈라섬으로써 세계 2위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는 점 등등 이루 열거하기 힘든 징표들이 수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양태가 자본주의 사회의 숙명이고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면 분명 서구 선진국가은 우리보다 적어도 두세대 전에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단속하고 진정 국민생활의 안온함을 확보하는 길을 모색하여 성공적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구사한 정책의 핵심은 바로 복지정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참여복지 안에 이러한 정도의 위상에 걸맞는 복지정책의 내용물이 들어 차기를 고대하였던 마음은 실망으로 화답되었다. 대통령 자신이 ‘성장’만이 복지문제의 해결이란 구호를 곳곳에서 사용하였음을 비롯하여 참여정부 정책결정의 핵심선상에 분배정책에 철학과 전망을 지닌 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방증자료이기도 하다.

거시적인 정책기조의 틀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데에서 오는 실망감이 복지의 미시적인 정책현장으로 내려와서 위안을 받았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어느 날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보육업무의 여성부 이관, 작년 하반기 우리사회의 화두가 된 ‘신빈곤’정책에 대한 무대응, 포괄수가제의 연기, 국민연금 급여율의 삭감과 보험료 인상의 일방적 시도, 시대를 역류하는 ‘건강가정’ 육성을 위한 정부의 계도를 인정하는 가족정책, 경제특구내의 영리법인으로서의 의료기관 설립허용을 통한 의료의 공공성 역행 정책 등등 일상적인 복지정책 추진과정에서도 수없이 허탈감을 달래고 복지강화의 역행에 울분을 토로해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기에 무너져 내리는 우리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으로서 복지정책의 실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세부정책의 실수가 있지 않도록 정책의 입안단계나 추진과정 어디에도 국민이나 시민단체의 ‘참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참여복지 하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마져 없었던 것이다.

지난 1년에 대해 내려진 복지정책의 실망스런 성적표가 남은 임기동안 반복되지 않으려면 이제 정책과 조직과 인물, 이 세 가지 측면에서의 혁신이 필요하다. 분명히 정책기조가 경제정책에서 사회정책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정책전망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조직체계와 인물이 구비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현 정부내에 사회정책을 통괄할 조직, 즉 사회부총리 내지 청와대 내의 사회수석의 설치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또한 단순히 ‘복지부의 파수꾼’에 머물거나 ‘복지에 대한 임기응변식’의 이해만이 담보된 인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 현상 전체를 조망하면서 분배정책에 대한 정확한 위상을 인지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설계할 수 있는 철학과 식견을 갖춘 인물들로 그러한 조직을 채워 나가야 함도 동시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정부에서는 ‘사회적 일자리’를 정책의 중심으로 선언한 바 있다. 이는 복지정책의 확대와 결부하여 볼 때 새로운 가능성을 담을 수 있는 기회임은 틀림없다. 여기에서부터 정책과 조직, 인물의 3박자가 갖추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실망스런 1년의 심정을 추스르고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조금은 살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태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부위원장,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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