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빈곤정책 2002-03-29   1626

할머니 생계위해 손주가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불합리한 기초생활보장법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정순이 할머니

“우리 손주 봉급이 원래는 70만원, 80만원정도요. 그런데 반도체는 쉴 수 없다네. 기계를 멈출 수 없어서 그렇다 하대. 그래가 3교대를 하는데 일하다 보면 자리가 빌 때가 있지 않소. 손주가 그 자리를 다 채우는 기라. 남 잠잘 적에 못 자며 일해가, 그래가 월급이 100만원이 넘소.

그란데 손주 월급 100만 원 넘었다고 수급자에서 떨어졌소. 오바해서 일하고 버는 돈도 수입이오. 그래가 손자가 내한테 20만원씩 주고 있소. 손주도 살아야 하고 장가도 가야되는 거 아니오.”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사는 정순이 할머니(81세)는 기가 막히다. 40년 전 남편을 보내고 혼자 5남매를 키웠는데 아들 넷은 모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세다. 따로 사는 아들 셋은 둘째치고 함께 사는 큰아들(61세)은 사고가 나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딸은 사위가 먼저 죽어 혼자 6명의 자식들을 키우며 산다. 5남매가 모두 가난하다. 누구도 할머니를 부양할 수 없다. 유일하게 회사를 다니는 장손은 기숙사에 지내며 지방으로 일하러 나갔다. 그나마 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로 선정되어 나오는 돈으로 이런 저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손자의 월급이 110만원이 넘기 때문에 수급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통보.

국가가 못하니 가족이 맡아라?

“우리 손주가 동사무소에 물었대요. 나도 따졌소. 그럼 수급자 하려고 손주 회사 관두라는 얘기오. 돈 많이 모으려고 야근 더하는데 야근하지 말라는 말이오. 회사 관두면 수급자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는 말이오.”

자식들 얘기를 물었더니 묻지도 말라는 듯 손을 내친다.

“애들? 그러게, 있으나 마나 해. 다 못산다. 아들들이 있다 해도 사글세 사니까 도와 줄 수가 없어. 자식들이 많이 벌면 안 된다니까. 동사무소에서 조사하면 다 나오거든. 우리 애들은 다 가난해. 그리고 소용이 없어. 다리가 아파서 죽겠어서 주사 맞게 병원 가자고 해도 안 와. 명절에는 오지. 아들들 직장에 나가는가 뭣을 하나 모르겠어. 아마 직장 나가는 놈 없고 다 노가다 할꺼야. 어디 생활비를 누가 갖다줘. 죽으나 사나 손주가 20만원 주면 그걸로 사는 거지. 관리비 내고 나면 없지. 관리비 15만원. 5만원 남지. 그니까 사는 게 우습지.”

▲ 할머니의 아파트 관리비 영수증. 손주 월급 때문에 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에서 탈락하고, 다리가 아파 취로사업조차 나갈 수 없는 할머니는 손주가 주는 용돈 20만원이 수입에 전부이다.

지난해까지는 취로사업에 나가 얼마라도 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아파 그나마 나갈 수도 없다는 정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복지관 사람들이 들어와 혈압을 재기 시작했다.

“나 혈압이 높아서 약 먹어. 이 사람들이 매일 와서 재주지. 약은 매일 먹어야 혀. 한달에 6000원 정도 들어. 관절염 약은 못 먹지. 나눔의 집에서 반찬을 일주일에 한번씩 주고. 쌀은 동사무소에서 두 번 준 적이 있어. 나눔의 집 얘기하면 관절염약 받을 수 있다고? 이 참에 가서 그 약도 받아야겠네. 잘 됐네.”

다리가 불편에 바닥에 앉지도 못하고 방 한 구석에 놓인 의자에만 앉아 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돈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날 바뀐 제도는 사랑스런 손자의 취직으로 한 가닥 남은 희망까지 버려야 한다. 그나마 전에는 동사무소에서 주는 돈으로 입에 풀칠은 했는데. 만약 손자까지 등을 돌리면 정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불합리한 부양자의무기준에 쐐기 박는다

그렇다. 실제로는 정 할머니처럼 최저생계비 이하의 최악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급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많다.

2001년 보건복지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 탈락자 및 일선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수급자 선정에서 탈락한 가장 큰 이유로 전체 중 45%가 부양의무자기준을 꼽았다.

현재의 기준은 ‘부양할 가족’에게 지우는 짐이 지나치게 크다. 부양을 위해 부양자의 삶의 질은 평균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또 한 명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을 해야하는 게 정당한가.

정 할머니의 경우를 따져보자.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제 25살 된 할머니의 장손 천아무개 군이 아닐까. 최근 3개월간 그가 받은 월급명세서를 살펴보니 각종 야근수당으로 평균 월급 120만원. 그 중에서 80만원은 적금을 들고 있었다. 그럼 남은 생활비는 40만원. 그나마 할머니가 천군 때문에 수급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20만원을 생활비로 내놓고 있다.

도대체 천군이야말로 어떻게 사는 걸까. 그야말로 발등의 불만 끄고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기초생활보장법. 천군이 30년 후 정순이 할머니와 같은 입장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이영환)는 이와 같은 부양의무자기준의 부당성과 불합리함을 제기하게 위해 유사한 사례를 모아 다음달부터 공익소송과 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모든 국민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더 이상 기초생활의 보장을 가족이 떠안아야 하는 현실을 두고만 볼 수 없다. 기초생활보장의 단위는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어야 한다.

황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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