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의료보험의 변화 : 배제의 정치의 종언

‘배제의 정치’의 종언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은 김대중정권하에서 가장 눈에 띠는 변화가 이루어졌다. 의료보험 통합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이 제정되었으며, 국민연금도 기금운용의 투명성과 민주성이 확보되는 방향으로 법개정이 이루어졌다.(의료보험과 국민연금제도의 변화 내용은 「복지동향」99년 2월호에 실린 이상이 “국민건강보험법 무엇을 담고 있나”, 권문일 “국민연금제도의 개혁 : 세부 내용 및 의의”, 그리고 99년 1월호에 실린 김연명 “국민연금 99년 전망” 등을 참조할 것.)

전체적으로 보면 두 제도의 개혁 방향은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요구, 그리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복지이념을 담아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적 내용을 평가하는 방식은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흔히 논의되는 것으로 김대중정권의 성격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있으나, 적어도 연금과 의료보험의 변화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거의 없고 오히려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노선에 휠씬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냐 혹은 사민주의냐 하는 식의 접근법은 지난 1년간의 연금과 의료보험의 변화를 파악하는 생산적인 개념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대 담론적 논의는 사회복지부문이 일정한 성장을 전제로 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며, 우리 나라처럼 복지부문의 규모가 보잘 것 없는 경우 정치적 이념에 상관없이 사회복지부분의 일정한 확대에 대부분의 정파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김대중정권하에서 연금과 의료보험제도 변화의 핵심적 내용을 인식하고 평가할 때 사회보장의 정책결정과 제도운영을 둘러싼 국가·노동·시민사회의 정치적 지형관계가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보장 정치의 틀을 형성시켰다는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즉,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제도 형성과 운영에 있어서 지난 1년간의 변화는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정치 지형’의 변화에 있어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의 변화는 1960년대 초 최초의 사회보험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제정된 이후 30여 년간 한국 사회보장제도 일반적 형성 경로라 할 수 있는 소위 국가주도 하에 ‘위로부터 조직화되는 사회보장제도’가 종언을 고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노동조합이나 길드 혹은 우애조합(Friendly Society) 등의 자생적 조직을 근간으로 국가가 사회보장제도를 형성시킨 유럽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는 자생적 사회보장조직의 싹조차 없는 상태에서 최초의 설계에서 제도의 운영, 변경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철저하게 국가(관료)가 통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보장제도가 형성되고, 운영되었다.

조합방식의 의료보험제도가 ‘자치주의’라는 표방된 이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철저한 국가통제적 운영형태를 보여 왔던 것이나 국민연금기금 운용이 국민적 불신을 받으며 정치적 쟁점을 형성했던 것도 바로 ‘위로부터 조직화된’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유산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제도는 한국 사회보장의 역사에서 노동자·농민단체, 시민단체 등 소위 ‘밑으로부터의 힘’을 주동력으로 하여 제도가 형성된 최초의 사례이며 국민연금법의 개정에 있어서도 시민사회단체의 요구가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두 제도의 변화는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정치지형에서 구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기존의 의료보험제도와 국민연금제도는 주요 정책결정과정(제도 변경, 보험료 조정, 수가 조정, 진료비 심사, 기금운용 등)과 의료보험관리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등 관리기구의 운영과정에서 노동자, 농민 등의 가입자와 의료공급자, 노동조합 등 소위 이해관계인을 배제시키며 모든 정책이 국가기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배제의 정치’ politics of exclusion 가 주된 특징이었다. 구 의료보험법의 ‘의료보험심의위원회’나 ‘의료보험조합운영위원회’, 그리고 구 국민연금법의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등에 이해관계인의 참여가 명문화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장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은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이사회’ 등 주요 기구에 가입자의 참여를 대폭 확충하였고, 진료비심사기구를 독립된 기구로 설정하였다. 마찬가지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나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이사회에 가입자 대표를 대폭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 졌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국가가 노동·시민사회를 배제하는 사회보장에 있어서 ‘배제의 정치’가 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다.

변화의 동력은 어디서 왔는가?

지난 1년간의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변화를 ‘배제의 정치’의 종언으로 규정한다면 이러한 변화를 가져 온 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김대중정권의 연금과 의료보험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도구가 되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먼저 김대중대통령과 집권당인 국민회의는 선거 공약으로 의료보험의 통합과 국민연금기금운용 개선(공공자금관리기금법 폐지), 가입자 참여의 증진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러한 공약이 지난 1년간의 김대중정권의 연금·의보정책의 틀을 크게 규정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의 이행 여부를 둘러싸고 대통령·집권당과 행정부 사이에서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었다. 국민회의 내에 개혁적 정치인들은 의보통합과 국민연금의 개혁에 대해 상당히 강한 입장을 표명하고, 이를 관철하려 노력했으나 행정부의 입장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는 그 동안 고수해 온 조합방식의 의료보험정책을 통합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내부적 저항기류가 있었고, 국민연금기금운용방식의 개선에 있어서도 재경부는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의 개선을 초기에는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 대략적으로 보면 집권당과 대통령이 통합의보와 국민연금기금운용 개선 등에 있어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강제했으며, 행정부는 이를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집단의 강한 반발이 존재했었으며 제도의 변화과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예, 의보통합에 반대하는 직장조합, 한국노총, 그리고 재벌등). 그리고 행정부내에서도 사회보장제도의 정책결정과 운영에 노동, 시민사회가 개입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적극적 수용의 입장보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으며 이러한 태도는 98년의 입법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금과 의료보험의 제도 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90년대에 급성장한 시민사회와 진보적 노동운동의 힘이었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결합은 의료보험의 경우 ‘의료보험연대회의’란 조직을 통해 외화되었고, 연금제도의 개선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양대 노총이 결합된 목소리를 냄으로써 98년 내내 개혁의 원동력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98년에 가동되기시작한 ‘노사정위원회’가 제도 개혁의 공식적 창구로 상당한 역할을 발휘하였는데,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 측이 주장한 연금과 의료보험관련 제도 개혁의 상당수는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합의한 일종의 합작품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노사정위에서 제시된 의보통합이나 국민연금기금운용 개선 등은 90년대 내내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의 정책연합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된 주요한 사항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보면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제도 개선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 기득권의 반발을 방어하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 개선의 실질적 내용도 담보하기 힘들었던 것이 98년의 연금과 의료보험 개혁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연금과 의료보험에서 지난 1년의 변화를 ‘배제의 정치’의 종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김대중정권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이며,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짚어 보아야 할 점은 우리 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세계은행이 제시한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개혁 내용 중 의료보험과 국민연금관련 부분이다.(세계은행이 제시한 우리 나라 사회복지부분 개혁 내용은 「복지동향」, 98년 10월호, 김창엽 외, “IBRD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였는가?” 참조)

세계은행이 요구한 국민연금 개혁 내용은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한 정부의 강제적 기금차입의 폐지와 기금운용의 민간부분 위탁 확대, 그리고 기여와 급여의 비율 조정 등 국민연금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담고 있는데, 국민연금법의 개정 과정에서 세계은행이 제시한 요구중 일부가 관철되었다.( 세계은행의 연금개혁안은 매우 광범위하다. 현재 정부는 공적, 사적연금 전반을 개혁하기 위한 기구를 발족시켜 연금개혁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중에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법에는 세계은행의 요구안 중 일부가 적용된 것이다.) 묘하게도 그동안 시민·노동단체에서 요구한 연금개혁안이 대부분 세계은행의 개혁안에도 상당부분 중첩되어 있었다.

‘이익집단의 정치’와 ‘동반자적 정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김대중정권은 연금과 의료보험정책에 있어서 기존 정권과는 다르게 ‘배제의 정치’에서 탈피하는 새로운 사회보장의 정치지형을 형성시켰다.

다시 말하면 국가통제하의 사회보장제도 운영에서 노동, 시민사회가 동시에 참여하는 형태로 제도를 변경시킨 것이며, 김대중정권은 이점에 있어서는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연금과 의료보험에서 ‘배제의 정치’가 사라진다면 그 이후 나타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연금과 의료보험에서 ‘이익집단의 정치’ politics of interest groups가 이루어질 가능성이다. 즉 연금과 의료보험에서도 의료인, 보험자, 가입자 등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이한 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전개될 가능성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연금이나 의료보험 모두 가입자나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제도화시킨 결과일 것이다. 또한 제도 형성에 있어서 소위 ‘지분’을 갖고 있는 집단사이에 갈등의 폭이 오히려 더 깊어질 수도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익집단의 정치와는 상이하게 국가, 노동, 시민사회, 의료공급자 등 이해관계자 사이에 일종의 ‘동반적 정치’ politics of partnership 가 형성되는 경우이다. 즉, 국가와 관련 집단들 간에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연금과 의료보험의 의의를 인정하고, 공적인 사회보험이 원활하게 유지되기 위하여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정치 형태가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관련 집단들 사이에 동반자적 관계를 강조하는 사회보장제도가 우리의 역사적, 제도적 경험에서는 매우 낯설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노동·시민사회, 그리고 의료인 등 이해관계인을 동반자적 관계로 대접한 경험이 없으며, 사회단체나 의료인 역시 정부와 공단을 동반자적 관계로 설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련 집단의 속성에 따라 국가와 비판적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으며, 혹은 종속적 협조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관리운영 형태는 그 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영국처럼 관리운영기구가 철저하게 국가기관이 될 수도 있고, 프랑스처럼 자율적인 기구이나 강한 국가통제를 받은 형식이 될 수도 있으며, 독일처럼 국가통제는 거의 배제된 채 노사(혹은 가입자)자율주의 원칙에 의해 ‘자율적 기관’ autonomous body 으로 운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관리운영의 형태가 있음에도 중요한 것은 이들 국가에서는 대의민주주의나 혹은 가입자들의 참여를 통해 정책결정의 민주성과 재정 및 제도운영의 투명성이 확보된다는 점이며, 이는 국가와 노동자, 시민사회의 관계가 ‘배제의 관계’가 아닌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동반자적 관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통합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관리운영에 있어서의 김대중정부의 과제는 가입자, 사용자, 의료인,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의 주요 세력들을 배제의 관계가 아닌 ‘동반자적 관계’로 재정립하고 이러한 ‘동반자적 관계’를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관리운영에 제도화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김연명/상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 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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