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선 ‘소득비례’ 국민연금

기로에 부딪친 국민연금의 ‘이상’

현행 국민연금은 두 가지의 ‘숭고한 이상’을 담고 있다. 첫째는 기여금과 연금액을 가입자의 소득에 비례하도록 한 ‘소득비례방식’ earnings-related system 을 택함으로써 연금액을 높이고 이를 기반으로 은퇴 이후에도 은퇴 이전의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연금의 계층간·세대간 소득재분배 기능을 매우 강하게 설계함으로써 공적연금을 통해 국민적 연대감을 고취하고 사회통합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의 숭고한 이념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입자의 소득이 ‘사회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파악되고, 그에 따른 소득비례 보험료를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가입자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소득비례 보험료를 징수하지 못하면 소득에 비례한 연금을 지급할 수도 없고, 계층간·세대간 소득재분배가 심하게 왜곡되어 적정한 삶의 질의 유지와 사회통합이라는 ‘이상’은 ‘몽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근의 도시자영자 연금 확대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면 국민연금의 이상은 벽에 부딪치고 ‘몽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약 350만으로 추산되는 순수 자영업주와 나머지 수백만명의 영세사업장 근로자와 일용직 근로자들의 소득을 파악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개발한 소득추정 기법(권장신고소득)이 소득비례제를 택한 국민연금의 이상을 제도적으로 구체화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추정소득 기법이 자영자의 지역별 소득차이를 반영하고, 낮게 평가된 국세청 자료를 어느 정도 실제 소득에 근접시킴으로써 일부 고소득 자영자의 소득파악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소득비례제도의 틀을 밀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최근 1-2달 사이에 국민연금의 도시지역 확대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자영자 소득파악의 부실 문제는 개혁적 성격의 국민연금 확대정책을 밀고 나갈 명분을 엄청나게 훼손시켜 놓았다. 한마디로 국민연금의 숭고한 이상은 소득파악이라는 벽에 부딪쳐 이상의 후퇴냐? 혹은 이상의 고수냐 하는 결정적 갈림길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연금관리 능력의 한계 ?

소득비례 국민연금제도가 이상에 불과하다는 논리는 소득파악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연금관리능력에 대한 의문이라는 차원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자영자 연금 확대 과정에서 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은 행정 편의적이며, 공급자 위주의 행정적 시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임을 통감하여야 한다. 그러나 복지부와 연금관리공단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일반적인 시각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민연금 사태를 악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부처 할거주의라는 고질적인 우리 나라의 국가행정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1천만 명에 달하는 가입자의 자격 심사를, 그것도 직업이동과 거주지 이전이 엄청날 정도로 빨리 진행되는 자영자와 일용직 근로자를 힘도 없는(?) 공단에게 맡기고 기본적인 자료제공에도 인색했던 다른 행정부처도 분명히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정치권도 최근의 국민연금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집권당은 국민연금 확대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격해지자 집권당이라는 힘을 기반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정책을 모색하기보다는 선거를 의식해 ‘연기’의 구실을 찾기에 급급했다. 한마디로 대안 없는 무책임한 ‘대중 추수주의’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야당 역시 근본적인 대안 찾기에 주력하기보다는 국민연금의 정치적 이용에 더 주력한 것이 실제의 모습이었다. 더욱이 국민연금의 기본적 틀을 짠 주체가 지금의 야당이며, 유사한 문제를 갖고 있는 농어민연금의 부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음으로써 문제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지금의 야당이라는 점에서 과연 비난의 자격이 있는가 라는 의문마저 제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다소 고집스럽고,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소득비례연금제의 ‘고수 노력’은 행정의 일관성과 행정을 집행해야 하는 국가의 권위 유지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해도 국민연금의 관리 능력에 대한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가입을 독려하여 소득신고율이 높아진다 해도 실제 보험료 납부자가 20-30%에 머무는 상황이고, 낮은 소득신고를 한다면 소득비례제의 틀은 허물어 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정치권에 희망을 거는 것은 더욱 더 난망한 일로 보이며 향후 1-2년 동안 계속될 선거국면은 국민연금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소득파악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민연금의 관리 능력의 한계라는 점에서도 국민연금은 제도의 후퇴냐 혹은 진전이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소득비례모형 개편론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와 국가의 연금관리 능력 미비라는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부각되면서 소득비례제와 자영자와 임금근로자가 하나의 기금으로 묶여진 국민연금제도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국가의 행정관리 능력 문제가 가변적이고 개선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논란의 핵심은 소득파악문제에 있다. 전경련이나 일부 언론에서 제기하는 국민연금 민영화 혹은 임의가입제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논의의 흐름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자영자의 소득파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국민연금의 소득비례제와 단일 기금운영이라는 틀을 포기하여 다른 형태의 연금모델을 모색하자는 주장이다. 소득파악을 우회하자는 일종의 ‘우회론’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자영자 소득파악 문제를 포기하면 국민연금, 의료보험, 4대보험 통합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의 일련의 제도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한국 사회의 불평등의 대명사인 임금근로자와 자영자의 세금 부담의 불균형 문제 개선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자영자 소득파악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보자는 주장이다. ‘정면돌파론’으로 볼 수 있는 이 논리가 매우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굳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소득비례제와 단일기금운용이라는 틀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소득파악 문제를 우회하자는 주장은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지만 실체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우선 소득비례연금제를 포기하고 기초연금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다. 기초연금제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지만 대충 ① 자영자에 한해 정액기여·정액급여제를 도입하는 기초연금제, ② 보험료는 소득비례로 하되 급여는 정액으로 하는 기초연금제, ③ 기초연금을 세금으로 충당하는 조세방식의 기초연금제 등의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이중에서 ②안과 ③안은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현재와 같이 계층간 소득재분배 문제가 왜곡될 가능성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②안이 제대로 되려면 정확한 소득파악이 되어야 하고, ③ 안이 의미가 있으려면 직접세의 비중이 높아야 하고, 자영자의 소득파악이 제대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① 안이 제대로 되려면 자영자와 임금근로자의 기금을 분리해야 하는데 이 경우 ① 안 역시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임금근로자는 현행 소득비례연금제를 고수하고, 자영자만 정액기여·정액급여제로 개편한다면 임금근로자는 막대한 혜택을 보는 반면, 자영자는 심각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래세대에게서 막대한 보조를 받게끔 설계되어 있는 현행 연금급여산식 때문에 임금근로자는 미래의 근로자와 미래의 자영자에게서 막대한 소득을 이전 받게 되지만 정액기여·정액급여로 되어 있는 자영자는 임금근로자 만큼의 소득이전을 미래세대로부터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영자의 기금을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자영자에게 현행 소득비례제를 고수한다면 마찬가지로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가 또 제기되게 된다. 결국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가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형태의 대안도 결국 동일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소득비례제의 대안으로 제시된 여러 모형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전혀 다른 차원의 대안도 있을 수 있다. 임금근로자와 자영자 모두에게 정액기여·정액급여의 기초연금(혹은 조세를 통한 부과방식의 기초연금)을 제공하고 나머지 소득비례부분은 임의가입제도로 바꾸는 방안도 제시될 수 있다(이 안은 국민연금제도개선기획단에서 제시된 안이다). 이 방안은 자영자의 소득파악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나 공적연금의 적절한 노후보장기능을 소득비례부분에 가입한 일부 계층에게만 줌으로써 또 다른 사회적 불공평성의 문제를 야기 시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리고 기존의 연금제도를 완전히 해체, 재구성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 문제도 제기된다. 더 심각한 우려는 이 방안에서는 소득비례부분의 민영화를 촉발시킴으로써 사실상 공적 연금의 와해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연금을 사기업이 운영하면 좋다는 사람에게는 할 수 없지만 필자는 기업이 운영하는 사적연금보다는 국가가 시행하는 공적연금이 사회적 형평을 추구하는데 훨씬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

소득비례 연금제의 고수 : 과연 ‘낭만적’ 주장인가 ?

지금까지 본 것처럼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득비례연금제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모형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 모형이 사회적 형평이라는 관점에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결국 기로에 선 소득비례 연금모형을 개편하는 문제는 쉽게 다른 형태의 대안을 찾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며 어떤 형태든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어야 합리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국민연금 사태를 계기로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보자는 다소 낭만적인 것으로 보이는 생각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즉 소득비례연금제를 고수하면서 자영자의 소득파악 문제나 국가의 행정관리 능력 문제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이나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점이다.

최근 국세청에서는 과세특례제 폐지, 간편장부제도 도입, 신용카드 사용 의무화 등 자영자 소득파악을 위한 전향적 조치를 내놓고 있다. 정부 역시 재정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세원을 발굴해야 될 입장에 있고, 그 세원은 결국 지금까지 거의 포기해 온 자영자 의 소득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에서 요구한 자영자소득파악위원회의 설치에 정부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자영자 소득파악을 위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이 국민연금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 그 동안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는 우리 사회의 질적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핵심과제로 조세형평, 조세정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왔다. 조세정의 문제를 줄기차게 주장해 온 시민·노동단체가 국민연금 문제에 개입한 이상, 소득파악을 우회하자는 주장은 명분도 없고 국민적 설득력도 없으며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소득비례제를 근간으로 하는 국민연금제도는 분명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선 뜻 가고 싶은 길은 없어 보이는 것이 딜레마이다. 그렇다면 소득비례제를 고수하고, 이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올바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장기급여인 연금은 1-2년 정도 불안한 출발을 한다해도 크게 제도의 본질이 훼손되지는 않으며 임금근로자와 자영자의 기금분리 문제 역시 1-2년의 시간을 갖고 논의해도 큰 무리는 없다. 문제는 1-2년의 기간 내에 사회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자영자의 소득비례 보험료를 개발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획기적인 소득파악 조치들이 나올 수 있는 가하는 점이다. 단순한 대답이지만 국가가 이러한 조치들을 시행하도록 개혁적 세력들이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것 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개혁조치를 시행하도록 정치적 압력과 여론을 선도해 온 점이다. 기로에 선 국민연금의 개혁적 성격을 보존하는 문제의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김연명/상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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