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3 2013-02-16   2460

[동향2] 의료 결정과 소수자의 자기결정권

의료 결정과 소수자의 자기결정권 

 

정현희|가족구성권연구모임

 

지난 2012년 12월 8일, 가족구성권연구모임은 <소수자를 위한 의료결정권 워크숍>라는 이름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소수자는 어떻게 불행에 대비할 수 있을까?’라는 부제를 달고 진행된 이 워크숍에는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 소수자, 비혼 여성, 장애인, HIV/AIDS 감염인, 노인의 인권과 복지를 고민하는 토론자가 함께 했다. 차별 경험과 삶의 조건이 각기 너무도 다를 수 있는 이 소수자 그룹들이 ‘의료 결정’과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소수자들의 불행을 더욱 깊은 불행으로 끌어내리는 혈연․혼인관계 중심의 의료관행을 문제화하기 위해서이다. 

 

가족중심적 의료 계약의 장벽

 

[40대 비혼 여성의 사례] 제가 자궁내막증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건강이 안 좋으시고 형제들을 불편하게 오라가라 하고 싶지 않아서 제가 알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수술동의서를 써야했는데 친구는 안 되고 가족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친언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한 언니는 또 안 된다는 거예요. 혈연이어도 결혼한 언니는 가족이 아니야? 황당한 거죠. 그래서 누구여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부모님 아니면 남자형제여야 한다고. 수술동의서 작성할 때 온몸으로 적나라하게 우리 사회가 비혼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체험하는 계기였어요. (가족구성권네트워크,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 2012)

 

수술동의서란 환자가 수술에 대한 제반의 설명을 듣고, 수술에 동의한다는 승낙의 의사표시를 하는 서면이다. 가족과 동행하는 환자들에게 수술동의서는 간단한 싸인에 지나지 않는 절차가 될 터이다. 누군가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이 소소한 절차가 누군가에게는 난관이 된다. 입원시에 작성하는 입원약정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레즈비언 커플의 사례] 작년 초에 내 파트너가 갑작스레 병원에 실려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입원)동의서를 쓰려고 했는데 병원 측에서는 우리가 가족 이상의 사이라고 말을 해도 둘은 친구사이이고 사인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100만원 가량의 보증금을 내면 입원 동의서를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친한 게이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그가 남편인 것처럼 말을 해서 입원을 할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동성애자 가족구성권자료집』, 2006)

 

현재 의료법상 수술동의서나 입원약정서에 관한 세부규정은 없다. 수술동의는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가 아닌 이상 환자의 의사만으로도 충분한 동의 표시가 되지만 의료기관에서는 사후 의료분쟁을 막기 위해 배우자 및 혈연 가족을 보호자 또는 대리인으로 규정하고 동의서를 받고 있다. 입원약정의 경우 입원비 납부 및 채무 이행에 대한 동의가 핵심내용으로서 ‘연대보증인’이 필요하다. 대형병원들 중 일부에서는 입원약정서에 연대보증인을 정하도록하고 “보호자(보증인)와 주소지가 다른 치료비 지불능력이 있고, 금융기관의 신용정보 조회에 동의하는 분으로 작성해 주길 바란다'”고 명시하여 사실상 “우회적인 진료거부행위”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정미경 의원, 2008년 복지부 국감) 또한 연대보증인을 세우지 못할 경우 입원보증금을 요구하는 것은 “급여비와 비급여사항 외에 입원보증금 등 다른 명목으로 비용을 청구해서는 안된다”는 건강보험법 시행령(제22조 2항)에 위배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결과 2009년 12월에는 의료서비스에서 소비자피해를 막기위해 공정거래위원회 병원표준약관 중 <수술동의서> 및 <입원약정서>를 개정하였다.

 

하지만 표준약관은 권고사항일 뿐이며, 각종 의료계약들은 의료기관이 의료행위로 인한 재정적, 법적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병원이 믿고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신용으로서 법적보호자의 동의 및 채무 보증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비혼, 성 소수자, 독거 노인 등 ‘가족전형’을 벗어나는 소수자들, HIV/AIDS감염인이나 트랜스젠더와 같이 가족들에게 조차 낙인찍히고 외면당할 수 있는 소수자들은 법적 보호자의 부재, 법적 보호자와의 단절을 이유로 의료 계약에서의 소외를 경험한다. 환자 자신이 아닌 보호자의 ‘추가적인’ 동의 절차는 환자가 위중할수록, 의료조치가 복잡할수록 중요해지지만 소수자들에게는 그 간단한 서명란이 점점 커다란 결핍과 장벽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오히려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가족 

 

[HIV/AIDS감염인의 사례] HIV/AIDS 감염인들은 작은 질병도 큰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병세가 악화돼서 병원에 가게 되는 일이 많은데. 내가 깨어있는 상태면 상관이 없는데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깨어나보면 이미 의사들이 가족에게 내 상태와 조치에 대해 말해버리는 거에요.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을 수 있는데.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감당할 수 없으니까, 이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도망을 가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가족구성권연구모임, 소수자를 위한 의료결정권 워크숍, 2012)    

 

다양한 병력을 포함하여 HIV/AIDS, 정신과, 산부인과적 질병과 진료 기록은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불이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병력 및 진료기록이 개인정보로서 보호되어야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손쉽게 건네진다. 문제는 혈연․혼인 가족이 반드시 가족관계에 있는 소수자 개인의 삶을 이해․인정․보호하는 집단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종종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오히려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이들이 된다. 그러나 의료기관은 가족을 경제적, 정서적 돌봄공동체로 간주하고,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보를 제공하고 대신 결정하도록 한다. 이렇듯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뿌리깊이 제도화된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우선하는 집단권을 가지는 일이 허다하다. 가족의 집단권은 개별구성원들 각자의 이해가 일치하여 발생하는 공동의 권리(collective rights)라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단일한 조직체(a single corporate entity)의 지위로서 가지는 고유한 이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개인의 의사를 넘어서는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가족구성원의 질병과 의료조치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알아야하고 돌봐야한다는 책임이 동시에 부여된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권이 권리처럼 인식되고 관행적으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국내 임상 현장의 일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환자 자신보다 보호자인 가족의 결정이 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이 하나의 의료관행이다.

 

말기암 또는 중증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중지 결정에 관한 국내의 한 조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가 있었다. 보호자들은 “환자분의 인생관, 삶의 가치관, 회복이 어려운 상태에서의 소망 등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충분히 알고 있다’는 응답이 20%, ‘어느 정도 알고 있다’ 66%, ‘잘 모른다’가 12%였다. 하지만 진료 관련 의사 결정과 관련하여 환자와 대화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20%만이 충분한 대화를 하며, 30%는 충격을 주기 싫어서․해가될 것 같아서․어떻게 말할지 몰라서 등을 이유로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나왔다. 또한 ‘환자 본인의 의사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의 질문에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응답이 52%에 달했다. 또한 연명치료 중지와 관련한 의사결정은 보호자가 해야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8.9%, 환자 본인이 결정해야한다는 응답이 36.7%였다. 심폐소생술 거부와 같은 사전의료지시서에 환자가 직접 서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479건 중 1건만 환자 본인이 서명함) 대부분의 경우 가족들이 환자를 대리하여 서명하고 있다. 환자가 동의 능력이 있는 경우에도 환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질환이 심각하거나 위험도가 높은 수술이나 처지일수록 환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정보 제공과 동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형편이다. 지적장애인이나 청소년, 노인은 중요한 결정들을 가족들이 대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사가 반영되기 어려우며 애초에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놓인다.

 

절차뿐인 가족, 실질적인 관계들의 소외 

 

[장애여성공동체의 사례] 갑자기 같이 살던 사람이 아팠어요. 특히나 독립해서 사는 데 막판에 가족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들이 발생해요. 간병할 일이 생겼을 때나, 보호자 사인이 필요할 때. 그런데 이 친구가 왜 아픈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데 가족이 와서 사인을 해야하고, 가족이 직접 소통을 해야된다고 해서. 가족은 중간에 그냥 있고 우리가 의사랑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빨리 수술이 필요한 상황인데 가족들이랑 연락이 안돼서 핸드폰만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그런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그래요. (가족구성권연구모임, 『대안적 가족제도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집』, 2008)

 

종종 가족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대리인 역할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절차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그치기도 한다. 가족이 자신의 경제적․정서적․신체적 상황을 잘 알지 못하거나,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는 비단 사회적 소수자들이 아니어도 흔히 있는 일이다. 오히려 자신을 잘 알고 있거나,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얼굴을 맞대고 살거나, 친밀감과 돌봄을 공유하는 파트너와 공동체가 실질적인 대리인으로서 적합할 수 있다. 그러나 비혈연-비혼인 관계에 있는 대리인을 절차적으로 의료행위에 대한 의논과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 실질적인 돌봄자들이 가족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하거나 가족을 동행하여 의사와 면담해야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가족형태와 관계망이 다양화되는 사회 변화 속에서 긴급히 개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해외의 사전의사결정제도(Advance Directives;AD)에서 대리인을 규정하고 있는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 사전의사결정제도란 환자가 의사능력을 상실할 경우의 의료 행위에 대하여 생전유언이나 대리인에 관한 내용을 법에 의해 인정되는 문서로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대리인은 반드시 가족일 필요는 없으며,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지정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 작성자의 가치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성자의 바람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리인의 특별한 자격이 명시되는 경우는 없으며, 본인의 치료와 연관된 의료제공자, 의료보험관련 실무자 등 건강관리에 직업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제외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대리인 지정시 증인이 필요한데,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장애인이나 노인과 같은 경우에는 당사자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사람이나 고충상담자로 지명된 사람이 그 역할을 하도록 되어있다. 증인이 될 수 없는 경우는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법적대리인, 유언 및 법률에 의한 상속을 받는 사람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1인가구 및 비혼, 이혼의 증가가 떠들썩하게 사회문제로 다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현실은 ‘가족’이 근거리에서 왕래하는 경제 및 돌봄 공동체일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대리인, 증인 지정 제도에 반영된 인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결정권이 실질적으로 발휘될 수 있기 위해 그것을 존중하고 대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관계(비혼의 파트너, 동성의 파트너, 비혈연 공동체, 동거인, 후원자 등)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가족과의 법적 이해관계가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가로막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고려는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변화하는 경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가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은 재차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료비에 충분한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부터 그렇지 못한 사람들, 24시간 돌봐줄 사람이 있는 사람부터 혈혈단신, 노인부터 아이까지, 지하철을 오가는 사람들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병원이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과 생명이 잘 다뤄지기 위해서 다양한 삶의 형태가 인지되고 반영되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부단한 설득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변화이기도 하다. 의료적 맥락에서 소수자들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은 개인의 결정을 혈연․혼인 가족에 당연하게 귀속시키거나 위임하는 풍토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 자신의 삶과 보다 밀접한 신뢰, 친밀성, 협력의 관계를 대리인, 혹은 보호자의 지위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는 소수자들이 불행을 더 큰 불행으로 체험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안전망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비단 의료영역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족중심의 프레임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져야할 것이다.

 

【참고 자료】

권복규 외, 「우리나라 일부 병원에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연명치료 중지 관련 의사결정에 관한 태도 연구」, 한국의료윤리학회지 제13권 1호, 2010

김상득, 「자율성 존중원칙」,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편, 『의료윤리학』, 계축문화사, 2008

김신미, 「사전의사결정의 속성-대리인 지정을 중심으로」, 한국의료윤리학회지 제13권 1호, 2010

김형숙, 「의료상황에서 가족중심 의사결정의 문제점 고찰」,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허대석, 「임종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의 혼란」, 한국의료윤리학회, <한국의료윤리학회 제16차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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