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3 2003-04-01   912

하루 종일 와이프를 불러요

한국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성

한국말이 서툰 필리핀 여자와 영어가 서툰 한국 여자가 쉽게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한국인남편을둔외국인여성들의모임”의 초대회장 로웨나 데라 로사 윤(Rowena dela Rosa Yoon·36세). 필리핀에서 왔다는 그가 타향에서 사는 것도 녹록치 않을텐데 오죽하면 그런 모임을 만들었을까. 이메일로 질문을 몇 차례 주고받고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쉴 새 없이 한국과 한국 남자에 대해 할 말을 쏟아냈다.

그는 로웨나로 살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를 로웨나 자체로 살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라고 했고, 또 누군가의 며느리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의 한국 생활은 “결혼”이라는 개념이 한국과 외국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하루 종일 와이프를 부르는 남편, 남편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가족들의 치다꺼리…. 낯선 땅에서 눈물만 흘리며 살다 자신과 같은 여성들을 돕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시부모나 남편과의 관계라고 한다. 문화관광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로웨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처럼 돈도 잘 벌고, 집안 일도 잘하는 수퍼우먼이 되기 위해 그는 매우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국 남자는 왕이에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그건 남자의 어머니들이 어릴 때부터 가르치지 않아서 그래요. 나중에는 남편이 설거지를 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죠.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어디 제대로 할 리가 있어요? 제가 다시 해야 해요. 너무 짜증이 나요. 결혼을 하니 아들만 낳으래요. 시부모님이 남자아기만 좋아해요.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요리도 하루에 세 번이나 해야 하고 뭐든 빨리 잘 하라고 해요. 로웨나! 빨리 빨리! (웃음) 더구나 남편 가족들에게도 잘 하라니, 정말 피곤해요.’

얼마 전 손광기(개그우먼 이경실을 폭행한 남자·이경실 남편) 사건에서 가장 무서웠던 말은 ‘그래도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로웨나와 다시 만나 이 사건에 대해 말한다면 아마도 말이 잘 통했을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언론과 일부 사람들이 ‘아내가 맞을 짓을 했겠지, 바람을 폈을지도 몰라’라고 반응하는 것에 대해 로웨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맞을 짓”은 영어로 뭘까?)

로웨나 씨가 한국의 결혼제도에서 가장 분노를 느끼는 것도 ‘아내폭력’이었다. 이 문제로 결국 이혼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 로웨나의 증언이다.

“한국남자와 결혼한 외국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남편은 아내가 느리고 말을 못 알아들어 답답하다고 때리기도 했어요. 심지어 임신을 했는데도 때렸다고 하더라구요. 경찰에 신고하면 남편을 잡아가기는커녕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요. 한국에서는 남편한테 잘 해야 한다. 어서 돌아가서 남편 말을 잘 들으라고 한대요.’

아내폭력, 남아선호 사상, 가사분담 등 21세기와도 변하지 않는 한국사회 결혼의 과제에서 외국인 여성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현재 “순응”이다. 원하는 대로 살면 피부색도 문화도 전혀 다른 타국 땅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일까? 기자라도 순응이 아닌 이 땅의 결혼이라는 제도와 싸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정부는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외국인 여성들에게는 KBS 『아침마당』을 영어로 더빙해 보여준 후, 그래도 결혼한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혼인 신고를 허락해라! 이렇게 요구할 수도 없지 않는가. ‘한국이 원래 그렇죠 뭐”라고 말하며 웃는 그녀의 웃음이 씁쓸하기만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내게 로웨나가 한 말은 ‘아직 미혼이라구요? 외국인 남자와 결혼하세요. 그럼 그 순간 프리덤이에요!’하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지인들의 결혼식에 갈 때마다 로웨나를 생각한다. 과연 나는 알면서도 이 무모한 결혼에 뛰어들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미혼여성의 지위가 변한 것은 분명하지만 결혼한 여성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결혼은 신성하지만 결혼이 주는 구속은 불결하기 짝이 없다. 그건 나의 여자친구,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나의 여자 선배들. 그리고 로웨나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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